#157아프리카의 무칸 (3) - 독 안에 든 쥐
피유우우-
한건우의 손을 떠난 검은 창이 제단 위를 향해 날아갔다.
“어딜!”
한 부족의 전사가 겁도 없이 창 앞에 뛰어들었다.
물소 뿔로 만든 관을 쓰고, 긴 창과 방패를 들었다.
‘무칸의 사도로군!’
가히 한 부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을 만한 용맹한 전사였다.
그러니 무칸의 사도로 뽑혔을 것이다.
“끄아아!”
전사가 큰 기합 소리를 외치며 방패 아이템을 휘둘렀다.
투창을 튕겨내려는 것이었다.
타아앗!
무조건 명중하는 신화급 아이템, 마창 게이볼그 앞에서, 그건 헛된 만용에 불과했다.
마창 게이볼그는 모든 물리적 방해물을 초월했다.
부족의 전사 역시 목표를 가로막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콰직-
쿠슈우욱-
“커헉!”
마창 게이볼그는 그대로 방패를 부수고 전사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꺄아아!”
“아악!”
찰나에 벌어진 끔찍한 광경.
무칸의 어린 노예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몸에 두른 반투명한 흰 천에 점점이 핏방울이 튀었다.
슈웅-
창의 속도는 거의 줄지 않았다.
부족의 전사를 꿰뚫고도 창끝은 핏방울 하나 머금지 않고 날카롭게 빛났다.
창끝이 무칸에게 이르렀다.
그의 온몸은 다이아몬드 폼으로 빛나는 상태.
무칸이 주먹을 휘둘러 창날을 받아냈다.
까아아앙-!
치지지지잉-
“!”
마창 게이볼그의 창끝이 무칸의 주먹에 그대로 꽂혔다.
우우웅-
창대가 세차게 떨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한건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이아몬드 폼, 경도가 대단하군.’
명색이 아르고스의 주인인데.
첫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힐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신체 강화의 최고봉인 <다이아몬드 폼> 특성.
그게 대체 얼마나 강력한 건지 감이 잡혔다.
설마하니 이 정도로 단단할 줄이야.
‘작은 상처밖에 안 났겠는데?’
회복 불가의 특성으로도 큰 영향을 못 줄 판이었다.
한건우의 표정이 굳었다.
무칸이 자신의 주먹에 꽂힌 마창 게이볼그를 잡아뽑으려 했다.
스릉-
창이 저절로 뽑혀 뒤로 물러났다.
한건우가 창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염동력> 특성의 가동 범위가 엄청나게 늘었지.’
수백 미터 밖에서 창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파아앗!
한건우의 등에 찬란한 빛의 날개가 솟아났다.
김도경에게서 흡수한 <빛의 군주> 특성이었다.
한건우는 그대로 수직으로 솟구치듯 날아올랐다.
“어엇!”
놀란 관중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슈욱-
입을 떡 벌린 사람들의 머리 위로, 한건우가 빛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한건우가 향하는 높은 제단 위.
무칸은 얼음처럼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쯤 무료하고 장난스럽던 기색은 온데간데 없었다.
무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다이아몬드 폼에··· 흠집을?”
모용황이나 아소카 싱 정도라면.
아니면 마리아 베르타가 <죽은 자의 날> 특성으로 최고 화력을 낸다면 모르겠지만···.
‘그냥 창을 던진 건데. 게다가 한 명을 꿰뚫은 창이었어.’
그런 창에 자신의 다이아몬드 폼이 흠집이 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차라락-
무칸은 얼른 다이아몬드 폼을 재정비했다.
그런데···.
‘어?’
흠집이 난 부분이 회복되지 않았다.
무칸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
무칸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한건우를 보았다.
휘익!
위기감을 느낀 그가 재빨리 뒤로 몸을 던졌다.
마치 높은 제단에서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스응-
추락하던 무칸의 몸이 허공에서 지운 듯이 사라졌다.
“음?”
한건우가 당황했다.
무칸이 <그림자 맹시>를 쓸 리도 없는데.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일까.
그때 다른 사도들이 한건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냐, 감히 폐하의 앞에서!”
“나부터 상대해라!”
타타우도 그들과 함께 전투 태세를 잡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복면을 한 한건우가 뭔가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대는 게 보였다.
한건우는 제단 뒤쪽의 허공을 흘긋 보았다.
허공에 공간 왜곡의 잔상이 일렁이다가 툭 꺼졌다.
“비상용 포털이라. 어이가 없군.”
자신의 부하들을 나 몰라라 하고 몸을 빼다니.
무칸을 잠시 놓쳤다고 그리 걱정할 건 없었다.
비상용으로 쓰는 일회용 포털의 이동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1킬로미터 안. 일종의 비상구 정도밖에 안 되었다.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마 예상치 못한 사건에 놀라서 일보 후퇴를 했을 뿐.
이 정도 일에 자신이 쌓아온 기반을 놔두고 도망칠 리는 없었다.
“네 주인이 어디로 갔나?”
한건우가 창을 세우며 무칸의 사도들에게 말했다.
“!”
“말하면 고통 없이 죽여 주지.”
한건우가 선심을 썼지만, 거기에 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한 명, 타타우만이 움찔했다.
‘저 목소리, 그리고 저 체구는?’
단 한 번이라도 압도당한 상대라면, 몸이 기억하기 마련이었다.
타타우의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도망치라고, 그게 안 되면 넙죽 엎드리라고.
‘저 자는 아르고스의 사도인데, 대체 뭐지?’
한건우는 빛의 날개를 활짝 펴고 긴 창을 들고 있었다.
높은 제단 앞 창공에 떠 있는 모습은 마치 군신 같았다.
한건우가 명령했다.
“엎드려라.”
“어딜!”
무칸의 사도들 중 하나가 분노하며 주술을 응축했다.
한건우의 명령은 사도들을 향한 게 아니었다.
“허억.”
무칸이 두고 간 아름다운 노예들이 움찔하며 몸을 낮추었다.
두려움에 길들여져서 강압적인 명령에 바로 반응한 것이었다.
[특성 중첩 : 빛의 군주]
[특성 중첩 : 검풍]
샤아아-
날카로운 광선이 마창 게이볼그의 날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
길어지면서 점점 가늘어지는 기존의 파괴 광선과는 달랐다.
<검풍>과 중첩하면서 검기처럼 단단하게 강화되었다.
3미터, 5미터, 10미터···.
창날 자체가 길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순간.
슈우웅-!
한건우는 팔을 크게 휘둘렀다.
마창 게이볼그가 수평의 궤적을 그렸고, 파괴 광선이 소리없이 공간을 갈랐다.
누군가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지평선과 평행하는 선이었다.
스응.
“...!”
높은 제단의 바닥에서 약 1.5미터의 높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선이 지나갔다.
스르르- 투욱!
한 사도의 상체가 제단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눈을 번히 뜬 채로 죽어있었다.
“아악!”
그게 시작이었다.
툭.
투욱.
한건우에게 맞서던 사도들은 모두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오직 한 명, 타타우만이 살아남았다.
“흐으···.”
타타우의 머리카락이 잘려서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엎드리라’는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엉거주춤하게 몸을 낮춘 탓이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자신의 주인은 도망쳤고, 동료들은 모두 단 일합에 죽은 상황.
‘아니,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어.’
그제야 타타우는 깨달았다.
지난번 한국에서 한건우와 했던 건 전투가 아니었다.
한건우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살려준 것이었다.
쿠르릉!
콰아아-
제단의 지붕 부분이 잘려나가 지상에 떨어졌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만 명의 관중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도망쳐!”
몇몇 각성자 병사들이 질서를 유지하려고 국민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더는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관중들이 물밀듯이 우우 처형장을 빠져나갔다.
나가는 길은 오르막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그런 구조 탓에 사람이 깔려 죽는 일은 없었다.
“자리에 앉아!”
“제자리에 있어!”
통제되지 않고 밀려오는 군중에 각성자 병사들이 패닉을 일으켰다.
그들은 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동의 한가운데.
파도치는 군중의 그림자 속에 이비현이 파고들었다.
스윽-
뛰어오는 아이를 곤봉으로 후려치려던 병사가 제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커헉!”
병사의 목에 일자로 그어진 칼자국이 생겨났다.
손으로 자신의 목을 눌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도 모르고 목숨이 끊어졌다.
푹-
장검으로 노인을 내리치려던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끄으윽.”
병사는 자신의 배에 난 구멍을 바라본 채로 쓰러졌다.
무칸의 각성자 병사들이 하나둘 처리되었다.
간만에 암살자 클래스의 실력을 발휘한 이비현의 활약이었다.
타다닥···.
이비현은 혼란 속에서 처형장 한가운데로 뛰어 내려갔다.
거기엔 아직 로지 마소크가 서 있었다.
처형장 무대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낡은 연습용 목검을 들고 있었다.
각성자 병사와 마주친다면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로지 마소크 전 시장.”
이비현이 다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어둠 속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놀란 로지 마소크가 목검을 겨누었다.
타앗-
이비현이 시미터를 휘둘러 가볍게 목검을 쳐냈다.
“당신을 구하러 온 사람.”
긴장한 로지 마소크는 쉽게 발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제단 위를 바라보았다.
“아···.”
로지 마소크는 눈을 의심했다.
제단 지붕은 박살이 났고, 사도들 역시 두 토막이 나서 쓰러졌다.
빛의 날개를 단 한건우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 침착한 얼굴이었다.
‘저 자가 무칸을 공격하고, 그 강력한 전사들을 죽였어.’
슈우욱-
한건우가 날개를 접고 아래쪽으로 꽂히듯이 내려왔다.
“당신들, 무칸을 죽이러 온 겁니까?”
로지 마소크가 먼저 물었다.
방금 죽기 전까지 내몰렸던 상황인데도, 그녀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맞다.”
“....”
한건우가 답했다.
“그런데 무칸을 죽이고 가면, 이 땅이 무법천지가 될까 고민이군.”
“!”
그건 한건우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악인을 죽이고 떠나는 건 어쩌면 쉬운 일이었다.
‘무칸은 충분히 이길 수 있어.’
한건우는 방금의 일합으로 그를 꺾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지켜본 북아프리카 지방은 생각 이상으로 참담했다.
무칸을 없애도, 그의 빈자리에 더 악질의 독재자가 나타나는 게 아닐까.
외지인인 한건우가 거기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의 개입으로 더 큰 불행이 생겨나는 건 막아야 하지 않을까.
로지 마소크의 시선이 흔들렸다.
한건우를 믿을 수 있나 판단하는 눈빛이었다.
마침내 그를 믿기로 마음먹은 듯, 그녀가 말했다.
어차피 한건우의 손을 잡는 것 말고 다른 방법도 없었다.
“지하 감옥을 열어주시면 됩니다. 무칸의 처형식은 달마다 행사처럼 열리니, 아직 저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많이 살아있습니다. 각성자들도 갇혀있고요.”
“그래? 그들을 구하면 이 땅을 책임질 수 있겠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겁니다.”
로지 마소크의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좋아, 그럼 하나만 묻자. 무칸과 싸우려고 오랫동안 숨어서 준비했다니 알고 있겠지.”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지 답하겠습니다.”
“무칸은 방금 비상 포털로 도망갔다. 어디로 갔을까?”
로지 마소크는 고민조차 없이 바로 앞쪽을 가리켰다.
수도 광장 건너편.
성벽 같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으리으리한 건축물이 보였다.
황궁 지붕에는 무칸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황궁으로 갔을 겁니다.”
“자기 집에 숨은 건가.”
“네, 외부 포격에도 방어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있거든요.”
한건우는 무칸의 황궁을 바라보았다.
그곳이 무칸의 무덤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