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아프리카의 무칸 (2) - 처형식
“수도 광장이라면···.”
이비현이 지도를 확인하려는데, 한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구경꾼만 따라가도 되겠어.”
한건우의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을 향해 우우 몰려가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흑인이었고, 다른 인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피부색이 드러나면 눈에 띌 것 같았다.
한건우와 이비현은 얼굴을 두건으로 완전히 가리고 어두운 색의 후드를 덮었다.
구경꾼 속에 섞여드니, 속삭이는 대화가 들려왔다.
“이번 집행은 누굴까?”
“몰라. 지난 달엔 아랫지방의 촌장들을 산 채로 불태웠던가?”
“그건 두 달 전.”
“최근엔 학자들의 팔다리를 하나씩 자르고 신병 연습 상대로 내주어서··· 정말 끔찍했지.”
“봤어. 바로 죽어버리더라. 그게 무슨 연습이 되나?”
“그러면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게 된대.”
“아···.”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공포와 흥분이 올라와 있었다.
잔인한 처형식을 끔찍해하면서도, 그걸 집행하는 무칸에 대한 비판을 입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세뇌된 걸까?’
오랜 독재와 공포정치.
이 땅의 주민들은 이미 무력해졌을지도 모른다.
드넓은 광장으로 접어들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
광장의 구조는 독특했다.
수도 광장 한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높고 화려한 제단이 솟아있었다.
그리고 제단 바로 밑은 계단식으로 깊이 파여 있었다.
마치 부채꼴로 파여진 고대 공연장의 무대 같았다.
‘저 아래서 처형식을 하는 모양이지?’
지상 높이 세워진 제단, 그리고 지하로 파여진 처형장.
둘 다 아직은 텅 비어 있었다.
이미 수만 명의 구경꾼이 돌계단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숨죽인 속삭임만 들려올 뿐.
무기를 꺼내들고 돌계단을 오가는 각성자 병사들 때문에 겁을 먹은 것일까.
광장의 하늘 위를 날아가는 새 우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뿌우우우-
기묘한 정적을 깨고 힘찬 나팔소리가 들렸다.
수만 명의 관중들이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와아아-!”
함성과 함께 무칸이 제단 위에 올라섰다.
어두침침한 옷을 걸친 국민들과 달리, 그를 둘러싼 장식과 차양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그야말로 신 같은 등장이었다.
나팔수가 제단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북부 아프리카 제국 동맹의 위대한 정복자이자, 최초이자 최후의 황제이시고, 이 땅의 모든 날짐승과 들짐승과 물고기의 주인이시고, 살아있는 신이신 무칸 폐하를 경배하라!”
척!
화아아-
무칸이 자신의 손을 번쩍 들었다.
그의 손 전체가 다이아몬드로 바뀌면서, 눈을 찌르는 듯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다이아몬드 폼>이군.’
“와아아아-!”
무칸이 다이아몬드 폼을 보여주자, 사람들은 두 손을 들며 더 큰 함성을 질렀다. 마치 광신도 같았다.
조건 반사에 가까운 반응에 귀청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무칸이 오만한 눈길로 자신의 국민들을 내려다보았다.
군복처럼 생긴 제복에 휘장을 주렁주렁 달고, 보석 왕관까지 썼다.
무칸의 애완 하이에나도 보석 갑옷을 입고 늠름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한건우가 보기엔 우스꽝스럽다 못해 천박한 모습이었다.
무칸의 발치에는 그의 시중을 드는 노예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러 인종의 아름다운 소년 소녀들이었다.
반투명한 천으로 몸을 휘감아 거의 헐벗은 채였다.
다들 미약에 취한 듯 눈빛이 몽롱했다.
“변태인가 봐요.”
이비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건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타타우는 어디 있지?’
무칸의 뒤로, 부족의 전통 복장을 입은 각성자들이 우뚝 서 있었다.
눈빛과 자세 하며 범상치가 않았다.
그 중에는 타타우도 섞여 있었다.
‘각 부족의 대표 각성자들을 사도로 삼은 건가?’
무칸이 이끄는 북부 아프리카 제국 동맹은 꽤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기존의 세력을 가까이 두고 거느리고 있는 모양.
‘그런 것치고는 몇 명 안 되는데···.’
저기에 한 자리 끼지 못하고 멸망한 부족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여기까지 오면서 본 것만 해도 충분한 대답이 되리라.
무칸이 황좌에 앉자, 나팔수가 다시 외쳤다.
“죄인을 데려와라!”
맨 아래의 깊은 바닥.
돌문이 열리고, 각성자 병사들의 우악스런 손에 한 중년 여성이 끌려나왔다.
허름한 누더기를 걸친 여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깡말라 있었다. 그간 제대로 먹지 못한 모양이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보게 되어, 여자가 눈을 찡그렸다.
그럼에도 여자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인데도 전혀 기가 꺾이지 않았다.
한건우가 보기에도 그 기개가 대단했다.
“...로지 마소크!”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 관중석의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세상에···.”
“<마마> 마소크다.”
일순간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무칸에게 신앙에 가까운 충성을 바치던 자들이, 갑자기 여자의 이름을 되뇌이고 있었다.
“누구지?”
“로지 마소크라면, 몇 년 전에 행방불명된 지방 도시의 시장일 거예요. 원래 판사 출신이고. 무칸이 황제 즉위하는 걸 반대하다가 실종되었다고 하는데 살아있네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한건우는 다소 놀랐다.
“그런 사람까지 조사했다고?”
“이곳에서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어서요.”
하긴 그럴 법도 했다.
몇 년이나 공백이 있었는데, 거의 모든 이들이 바로 알아볼 정도니까.
어머니를 뜻하는 <마마>라는 별명이 붙은 걸 보니,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두 충격을 받은 가운데.
나팔수가 목을 가다듬더니 긴 두루마리를 펼쳐 죄명을 읊었다.
“감히 황제를 참칭하며 황위를 찬탈하려 한 죄! 국외에 도피하여 외국 세력과 손잡고 반란을 모의한 죄! 황제 폐하를 모욕하며 드높은 명예를 훼손한 죄! 그 중 하나만으로도 사형에 처할 죄이므로,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죄인 로지 마소크를 총살형에 처한다!”
관중석이 한 번 더 술렁였다.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병사에게 얻어맞고 쓰러지는 자들도 있었다.
로지 마소크라는 이름의 중년 여성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광장 처형장의 구조 탓에, 온 관중석에 그녀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죄목은 사실이군요. 인정하겠습니다!”
“....”
그녀의 돌발 발언에 무칸의 나팔수마저 멈칫했다.
“그러나 명예 훼손죄는 인정할 수 없군요. 명예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훼손한단 말입니까?”
티잉-
무칸이 다이아몬드 폼으로 변한 손가락을 튕겨 주목을 끌었다.
“짐은 총살형이라는 자비를 베풀려 했다. 스스로 복을 걷어차는군.”
무칸이 무어라 명령하자, 나팔수가 수신호를 내렸다.
드드드드···.
처형장 바닥에 구멍이 생겨났다.
쿠웅- 쿠웅-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두운 구멍에서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각성자 병사들은 재빨리 감옥문 앞으로 몸을 피했다.
처형장 무대 위에는 로지 마소크 혼자 남겨졌다.
‘블랙 엘리게이터.’
새까만 갑주 같은 비늘로 온몸이 덮인 악어 형상의 마수였다.
크기를 보니 B급 균열의 주인급은 될 법했다.
앞다리 두 개만 나왔는데도 처형장의 무대가 꽉 차는 듯했다.
쿠웅-
마침내 블랙 엘리게이터가 전신을 드러냈다.
뒷다리에는 굵은 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관중석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할 뿐, 무대 위에서는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였다.
블랙 엘리게이터의 샛노란 눈알이 핑그르르 구르더니, 로지 마소크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크르러어···.
블랙 엘리게이터가 입을 쩍 벌렸다.
떼그르르.
나팔수 밑에 있던 병사가 그녀에게 연습용 목검을 던져주었다.
“!”
블랙 엘리게이터 앞의 일반인 여성.
게다가 연습용 목검 한 자루라니.
명백한 조롱이었다.
그러나 로지 마소크는 침착하게 목검을 주워서 자세를 잡았다.
마지막 반항이라도 해보겠다는 것 같았다.
쿠웅-
블랙 엘리게이터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그녀의 검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수의 코앞에서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했다.
“건우 씨.”
다급해진 이비현이 한건우를 불렀다.
한건우는 무칸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무칸은 로지 마소크의 발언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분노는커녕 조금은 무료해 보이기까지 했다.
‘심심풀이.’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놈은 지금 게임을 하는 중인 거야.’
저건 상대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차라리 화가 나서 죽이려 했다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만했을 것이다.
무칸은 게임기 앞에 앉은 소년 같은 표정이었다.
언뜻 보면 진지하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건 재미를 위해 하는 행동.
자기가 만든 게임 속 제국에서 설정 놀음을 하는 것이었다.
‘미친 놈.’
저게 아르고스의 주인들의 민낯일 것이다.
모용황이 한건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이 지구는 우리 아르고스의 사유지야. 일종의 농사일이라고 생각하게. 땅에 씨를 뿌리고, 해충을 쫓고, 수확물을 거둬야지.
한건우의 속에서 분노가 올라왔다.
크롸악!
쿠웅-
블랙 엘리게이터가 입을 벌리고 로지 마소크에게 달려들었다.
한건우는 앉은 채로 주먹을 으깨듯이 꽉 쥐었다.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3차 개화를 거쳐 수백 배로 가중된 중력장이었다.
쿠콰아아앙-!
가중된 중력장이 정확히 블랙 엘리게이터의 몸통을 노리고 떨어졌다.
“어억!”
수만 명의 관중들이 비명을 삼켰다.
허공에서 거대한 주먹이 내리친 듯.
보이지 않는 중력장이 블랙 엘리게이터를 짜부라뜨렸다.
파스스···.
블랙 엘리게이터가 있던 자리에는 검붉은 곤죽만 남아있었다.
그 앞에서 로지 마소크는 목검을 든 채 바짝 굳어있었다.
“뭐냐?”
무칸의 얼굴에 맴돌던 장난기가 사라졌다.
쿠과아아앙-
한건우는 한 번 더 중력장을 내리쳤다.
“크어억!”
이번에는 관중석 한쪽에 모여있던 무칸의 병사들이 곤죽이 되었다.
“으, 으어어···.”
“무, 무칸 폐하께서 왜.”
관중들은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입을 벌리고 굳어버렸다.
그들은 누군가 처형식을 방해하러 침입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게 압도적인 힘은 무칸에게서만 보았기에, 이것 역시 무칸의 변덕인 줄로 알았다.
관중석을 훑던 무칸의 눈이 정확히 한건우에게 꽂혔다.
파악-
무칸이 제단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칸이 어깨 뒤로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허공에서 움찔거리기만 했다.
‘멍청한 놈.’
무칸의 최강의 무기였던 다이아몬드 부메랑.
모용황에게 덤비다가 그게 먼지가 된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흐어어!”
공포에 질린 관중들이 머리를 숙였다.
한건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비현에게 지시했다.
“저 여자, 살아남도록 챙겨줘.”
“네.”
한건우가 가리킨 사람은 로지 마소크였다.
이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한건우는 돌계단 옆 난간을 발끝으로 두드렸다.
석재로 된 난간은 꽤 튼튼했다.
‘이 정도면 지지대가 될 만하군.’
스르릉-
한건우가 아공간 무기집에서 마창 게이볼그를 꺼냈다.
마창 게이볼그의 검은 블레이드가 번쩍 빛났다.
[마창 게이볼그(신화급)]
- 투창 시 반드시 명중한다.
“으아악!”
주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무칸의 부하를 제외하고, 무칸 앞에서 허락 없이 무기를 꺼내는 것은 죽을 죄였다.
같이 휘말려 죽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특성 발동 : 마창 게이볼그의 주인(재앙급)]
- 창에 맞은 상대방은 10분간 회복 불가 디버프를 받는다.
파앗-
슈우웅-
한건우가 창을 위쪽으로 투척했다.
그의 어깨와 팔 근육이 크게 꿈틀거렸다.
“!”
차라라락-
무칸의 온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이아몬드 폼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