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아프리카의 무칸 (1) - 살아있는 신
모용황은 소소를 데리고 북경으로 돌아갔다.
워낙 신출귀물하는 여자이니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른다.
‘모용소?’
한건우는 소소의 본명을 되새겼다.
‘그러고보니 아르고스의 주인들··· 다는 모르겠지만 명문가의 후예가 많군?’
중국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명문세가인 모용씨는 물론.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가문은 중세 초기부터 귀족 가문이었다고 했다.
아소카 싱도 만만치 않았다.
기원전의 왕조까지 이어지니까.
마리아 베르타와 무칸은 조금 결이 다르달까.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근본 없어 보였다.
한건우의 첫번째 목표물은 바로 아프리카의 무칸이었다.
데려갈 사람도 있으니 일단 한국으로 향했다.
“한건우 씨.”
새벽부터 포털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비현이 한건우를 향해 포르르 뛰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왜 직접 나와있어.”
“갑자기 말도 없이 외국에 가셔서···.”
이비현이 한건우의 온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전투의 흔적은 없었다.
안심한 이비현에게 한건우가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한건우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이비현의 건물로 갔다.
그녀가 집무실 겸 휴게실로 쓰는 작은 방이었다.
“왜 그런 자들의 정보를 찾으신거죠?”
“그 자들과 이제부터 싸울 거니까.”
짧은 침묵이 있었다.
“두 사람은 사망자인데요?”
“DB 수정해. 드 라모트 백작부인, 아소카 싱. 둘 다 살아있어.”
이비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건우를 살폈다.
“이집트에 다녀오신 걸 보니... 무칸을 만나셨나요.”
이집트는 북아프리카에 속했고, 실제로 넓게 보면 무칸의 영역이기도 했다.
“그래.”
그때 한건우는 특이한 걸 감지했다.
무칸이라는 이름을 말할 때, 이비현의 눈빛에서 짙은 혐오감이 느껴졌다.
“그 자가 왜?”
“다른 인물들보다도··· 그놈은 특히 악질이더군요.”
이비현은 숫제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그래?”
미등록자 정보조직의 수장이자 블랙마켓의 큰손으로 웬만한 일에는 면역이 되어있을 이비현이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게 낯설었다.
“거기 계시는 동안, 무칸에 대한 추가 자료를 좀 찾았어요.”
이비현이 밀봉된 서류파일을 건넸다.
“오, 잘했어.”
한건우의 첫 목표물은 바로 아프리카의 무칸이었다.
거기엔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명분이 좋았다.
무칸의 사도인 타타우가 한건우의 영역을 먼저 침범했으니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저 예언 석판을 찾으러 적극적으로 움직인 걸로 위장할 수도 있었다.
둘째로 시간이 절약될 것 같았다.
무칸은 다른 이들처럼 자신을 꽁꽁 숨기지 않았다.
북부 아프리카 제국 동맹의 황제로서, 대중 앞에 자신을 한껏 내세우면서 살고 있었다.
본거지를 찾고 상황을 파악하는 게 훨씬 쉬울 것이다.
‘타타우에게 심어둔 <주시자의 뱀>도 아직까지 유용하고 말이야.’
마침 솜브라에 의뢰하려던 일인데, 시간을 아낀 셈이었다.
트득-
한건우는 마력으로 밀봉된 서류파일을 가볍게 뜯었다.
꽤 묵직한 서류뭉치가 나왔다.
한건우는 선 채로 서류를 넘겼다.
문자 기억을 저장하는 <기억의 석판> 특성은 이럴 때 유용했다.
차락!
처음에 한건우는 그 서류를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
선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는 건 순식간이었다.
문자 하나하나가 한건우의 기억에 똑똑히 저장되었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
한건우의 얼굴은 단단한 무표정으로 돌아와있었다.
한건우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새끼는 뭐하는 새끼지?”
“....”
바로 옆 나라의 사정에도 어두운 게 현실이었다.
지구 건너편,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일은 깜깜 무소식일 수밖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했다.
한건우는 아까까지 하던 생각을 취소했다.
명분이고 시간 절약이고, 다 의미없는 소리였다.
“반드시 없애야 할 놈이군.”
죽이는 건 기본이고.
깔끔하게 고통 없이 죽여서도 안될 것 같았다.
그러면 피해자들의 원혼이 구천을 떠돌 테니까.
이비현도 같은 감정을 느꼈던 듯.
깊이 동감하는 표정이었다.
“가자, 전투 준비해.”
데이트를 가자는 것도 아닌데.
이비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
“통역 스킬을 쓰는 건 별로예요.”
이비현이 살짝 투덜거렸다.
시중의 스킬 주문서 중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걸로 골랐는데도 그랬다.
부욱-
이비현이 스킬 주문서를 찢었다.
희미한 연기가 그녀의 귓속과 성대를 타고 들어갔다.
“왜, 느낌이?”
“그것도 그렇고, 어감이 백 퍼센트 전달되는 것 같지 않아서요.”
일본어를 비롯해서 몇 가지 언어를 유창하게 하는 이비현이었다.
그런 그녀라도 아프리카 땅은 어쩔 수 없었다.
공식 언어에 부족 언어까지 따지면 셀 수 없이 많았으니까.
언어가 여러 개인 지역에서는 각성자들이 대부분 통역 스킬을 패시브로 장착하곤 했다.
‘북부 아프리카 제국 동맹.’
이름만 들으면 굉장했다.
그러나 현지의 실태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옆 나라까지는 포털을 타고 왔고, 이제부터는 걸어서 이동했다.
망토를 깊이 눌러쓰고, 각성자의 기운은 깨끗이 감췄다.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주민이 있을 때면 은신 특성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시골 지역을 지나갔다.
목적지는 황궁이 있는 수도였다.
한건우와 이비현은 주민들이 사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무칸의 오랜 독재로 시장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게 과거가 아닌 현대라고는 믿을 수 없는 생지옥이 되어있었다.
‘정보가 과장이 아니었군. 오히려 실제가 더 심해.’
흑인 주민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깡마른 몸에 누더기 같은 것만 겨우 걸쳤다.
그들의 눈빛은 거의 무생물처럼 죽어있었다.
여기서 각성자가 되지 못한 대다수는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고 했다.
각성자가 되어도 대단한 건 없었다.
각성해서 무장 강도단에 들어가는 게 소년들의 꿈이었다.
이비현이 늪지대 옆 연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설마···.”
“시체로군.”
사람의 시체가 커다란 연못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마수 못지않은 거대한 악어떼가 꾸물거리는 모습을 보고, 창백해진 이비현이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전혀 안 보이네요.”
이비현은 망토를 더욱 꼼꼼히 눌러썼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길거리에 여자라고는 씨가 말랐다.
죽을 때를 받아놓은 구부정한 노인 뿐이었다.
수도로 통하는 관문으로 들어가기 전.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걸 내려다보는 한건우와 이비현의 표정은 어두웠다.
“저기가 바로 마석 광산이군.”
균열 입구가 보였다.
파훼된 미공략 균열로, 마석 광산으로 쓰는 곳이었다.
보통은 기업이 주도하여 각성자 광부 팀을 불러서 작업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달랐다.
“...아이들이에요.”
이비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는 내용이지만 눈으로 보니 남달랐다.
어린아이들이 제 몸보다 큰 광주리를 지고 나르고 있었다.
서로 대화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구덩이에 원석을 쏟아놓고 가는 이도.
텅 빈 눈빛으로 원석을 갈퀴로 거르는 이도.
심지어 무기를 잡고 그들을 감독하는 군인들까지.
모두 열 살 남짓의 소년들이었다.
땡볕 아래에서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리는데,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는 모양.
몇몇은 소금 뿌린 빵조각을 걸신들린 듯이 먹고 있었다.
한건우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광부로 일하는 건 일반인 아이들이군. 각성자는 소년병이 되는 것 같고.”
“힘없는 일반인이 어떻게 마석을 캐는 걸까요?”
“저건 석회처럼 무른 마석이야. 아마 더 큰 애들이나 성인들은 다른 곳에 투입되었겠지.”
이비현이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냥··· 놔두고 가야 하나요?”
“당장은 어쩔 수 없어. 아이들을 대책 없이 풀어줘 버리면 바로 잡혀서 죽게 될 거야.”
이비현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인적 드문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바로 그 때.
부르르릉-
산길에서 오토바이 떼가 튀어나와 한건우와 이비현의 앞을 막았다.
하급 각성자로 이루어진 무장 강도단이었다.
한건우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머릿수를 셌다.
‘수는 열한 명.’
위이잉- 위잉-
오토바이 떼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포위망을 만든 모양.
한건우와 이비현을 중앙에 두고 자기들끼리 빙빙 돌았다.
곡예운전을 하면서 위협하듯 앞바퀴를 쳐드는 놈도 있었다.
“죽어라!”
“얼마만의 손님이냐. 하핫!”
피이이-
파이어 애로우가 장전되는 게 보였다.
한 놈은 어깨에 멘 손도끼를 던지려 했다.
한건우가 심드렁하게 대응하려는 때.
“잠깐, 멈춰! 여자다, 여자!”
“외국인 여자야.”
“흐흐··· 횡재했군.”
강도 떼가 극도로 흥분했다.
그들이 눈짓을 나누더니 오토바이를 일제히 멈추었다.
강도들이 탐욕스런 눈을 번뜩이며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저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봐··· 수도에 상납하기 아까운데?”
“보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맛을 봐도 되겠지. 흐흐···.”
“남자 놈은 어쩌지?”
“혀를 뽑고 광산으로 보내자. 저 갑옷은 내 거야.”
“누구 맘대로!”
이비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통역 스킬 때문에 강도들이 빠르게 내뱉는 말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차라락-
이비현이 만곡도를 꺼내들었다.
그 유려한 동작을 보고 강도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뭐, 뭐야!”
“저 여자 각성자였어? 전혀···.”
[특성 발동 : 인드라의 뇌전]
우르르···.
파지지직- 콰과광!
강도들의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쳤다.
“!”
한건우가 하늘로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치이이익···.
새카맣게 탄 열한 구의 시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비현이 한건우를 돌아보았다.
“제가 처리해도 되는데요.”
“그냥 그러고 싶었어.”
이비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 땅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보이는 웃음이었다.
이속 스킬로 빠르게 이동하니, 얼마 안 있어 수도 관문이 보였다.
“뭐야, 저건.”
한건우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관문 위에는 무칸의 초상화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화려한 제복을 입고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었다.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크고 선명했다.
“실물하고 많이 다른데?”
무칸의 초상화는 배우 뺨치게 잘생기게 그려져 있었다.
거의 사기 수준이었다.
초상화 아래에는 긴 문구가 쓰여 있었다.
한건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통역 스킬은 말에만 적용되니 글을 읽을 수는 없었다.
언어의 석판이라도 꺼내볼까 하다가, 굳이 알 필요가 없을 듯해서 놔두었다.
그 내용은 곧 반강제로 알게 되었다.
“북부 아프리카 제국 동맹의 위대한 정복자이자, 최초이자 최후의 황제이시고, 이 땅의 모든 날짐승과 들짐승과 물고기의 주인이시고, 살아있는 신이신 무칸 폐하를 경배하라!”
줄을 서서 관문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똑같은 문장을 반복적으로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해야만 관문에 들어갈 수 있는 듯했다.
“세상에.”
이비현이 듣기에도 역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관문 앞에는 무칸의 소년병들이 매서운 눈으로 통행인들을 살피고 있었다.
한건우와 이비현은 은신 특성으로 관문을 조용히 통과했다.
수도 관문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그나마 구색은 갖추고 있었다.
지나가는 각성자 병사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행인들이 많아? 몇 명쯤 쏴 버릴까.”
“멍청한 놈, 오늘은 광장에서 처형식이 있잖아.”
“아쉽다. 순찰 구역 잘못 걸려서 좋은 구경 놓쳤어.”
“그러게. 무칸 폐하도 오신다는데.”
한건우와 이비현의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