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54화 (154/238)

#154다섯 명의 주인 (4) - 사냥

모용황이 모든 걸 꿰뚫어본 듯이 말한 순간.

한건우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망했나?’

설마 들킨 건가.

나머지 예언 석판 조각을 한건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몸에 밴 포커 페이스 덕분에, 겉으로 당황한 티는 나지 않았다.

“호오, 과연 모용황 님. 날카로우시군요. 그런 이는 없으리라 짐작하지만···.”

아소카 싱이 감탄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의 눈빛은 바뀌어 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졌다.

‘나는 순순히 조각을 찾아서 냈지만 다른 주인들은 과연 그랬을까?’

‘내가 멍청했군. 지금이라도···.’

머리를 굴리는 게 뻔히 보였다.

모용황은 아직도 한건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까지 아는 거냐, 모용황?’

그럴 리 없건만.

아공간 금고 속 예언 석판 2조각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직은 곤란한데.’

모용황은 황혼의 시간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세계선의 일부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했다.

적어도 모용황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모용황이 잘못 안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어떻게든 예언의 석판만 빼앗아서 완성하면 만사형통일 테니까.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한건우는 아직 그걸 피할 방법을 모르는 상태였다.

모용황은 <화안금정>을 통해 이계의 지식을 얻은 것이었다.

한건우도 이제 <언어의 석판>이라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어쩔 것인가.

‘어차피 모 아니면 도다.’

맹약을 유도하려는 전략은 실패했지만.

속내를 들키지 않았다면 당연히 끝까지 밀여붙여야 하고.

이미 들켰다 해도 하는 데까지는 해보는 거다.

“들어보니 제 생각이 부족했군요.”

“재미는 있었어, 건우.”

마리아 베르타가 총신을 탁탁 치면서 윙크했다.

“접근을 바꾸죠.”

“응?”

“여러분이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 뭡니까?”

한건우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임시적으로 합의를 맺어야 하는 자리.

모두가 원하는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하는 것보다, 최악의 결론을 피하는 게 빠르다는 생각이었다.

“누군가 나머지 조각을 찾은 다음, 다른 주인들과 합의하지 않고 큰 힘을 가져버리는 것.”

모두의 시선이 은근히 모용황에게 쏠렸다.

“아니면 조각을 찾고도 숨기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때를 기다린다며 시간을 끌다가 모두가 황혼의 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죠.”

“....”

현실적인 예측.

무거운 침묵을 깨고 모용황이 물었다.

“사도 한건우. 자네의 결론은 무언가? 그렇다면 누가 힘을 가져야 하지?”

“지금의 정보값으로는 아무 결론도 못 냅니다.”

모용황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뭐라.”

“단, 마지막 석판의 결합만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지게 하면 됩니다.”

“왜지?”

“아직 석판의 정보 자체는 비밀에 싸여 있는 상태죠. 아마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으로 얻게 되는 힘과 큰 관계가 있을 겁니다. 그걸 모르고 결정하는 건 의미 없습니다.”

“!”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아이템 창의 히든 메시지만 풀렸을 뿐.

석판에 쓰여진 ‘예언’ 자체는 미지수였다.

“그렇죠. 히든 메시지를 확인한 것만으로 한순간에 생각이 바뀌었는데, 내용을 확인하면 어떻게 될지···.”

아소카 싱의 혼잣말 같은 독백이 들렸다.

다른 주인들도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누구보다 놀란 것은 주인을 따르던 사도들이었다.

‘저 한건우라는 자는 대체 뭐지?’

‘주인들과 동등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주인들도 그걸 받아들여 주고 있다....’

‘후계가 아니라 벌써 주인이 된 것 같은데.’

사도들이 질시와 경탄 어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마지막 결합만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한다라.”

“그렇습니다.”

모용황은 흰 수염을 어루만지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좋네, 방법이 있지.”

모용황이 손바닥을 펴서 땅바닥을 향했다.

이 균열의 대지는 마른 흙으로 덮여있었다.

슈웅- 트드드득.

토양을 이루는 흙이 정육면체로 깔끔하게 잘려 솟아나왔다.

집채만한 흙더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뭉쳐져 네모난 금속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모용황은 네모진 금속을 우그러뜨리고 뒤틀면서, 더욱 압축했다.

금속 상자는 서서히 새까맣게 변했다.

마치 창조주가 물질을 다루는 듯한 모습.

“....”

이 자리에는 모용황을 처음 보는 사도들도 있었다.

경외의 시선이 꽂힌 가운데.

한건우는 다른 쪽으로 놀랐다.

‘저 질감은··· 아다만티움이군.’

흙더미에서 저렇게 진귀한 금속을 만들 수 있다니.

황금의 지붕을 덮은 지하성이 생각났다.

터엉!

집채만하던 흙더미는 어느새 손에 들 수 있는 상자 크기로 작아졌다.

앞쪽에 문이 달린 금고였다.

“아다만티움 금고일세. 외부의 어떤 위력에도 보호되지.”

모용황은 5개의 조각이 모인 예언 석판을 금고 안에 넣었다.

“모용황 님은 이걸 언제든지 해체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백작부인이 팔짱을 낀 채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자 모용황이 곧바로 해결책을 냈다.

“여기에 다섯 겹의 봉인을 더하도록 하지. 각자의 고유한 특성으로만 열리도록.”

“!”

한건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기껏해야 주인들이 나누어 가진 증표 같은 것으로 봉인할 줄 알았는데.’

반드시 다섯 명이 모여서 논의할 자리를 주겠다고, 이들을 안심시킬 생각이었다.

증표야 어떻게든 손에 넣으면 되니까.

각자의 고유 특성을 봉인의 열쇠로 사용한다니.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한건우가 처음 든 생각은···.

‘오히려 잘 됐군.’

한건우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은··· 죽이고 가자.’

“좋은 생각이군요. 우리가 열쇠를 나눠 가진다 한들, 누군가 빼앗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고유 특성은 빼앗을 수 없으니까요.”

아소카 싱이 고개를 적극 찬성하며 끄덕였다.

정말로 완벽한 계획이긴 했다.

죽인 자의 특성을 흡수하는 한건우만 없었다면.

아소카 싱이 아다만티움 금고 앞에 섰다.

“<강신>의 봉인.”

아소카 싱의 몸에 인도의 신이 강림했다.

그가 입을 벌리자, 강한 기운이 뻗어나와 아다만티움 금고를 뒤덮었다.

특성을 사용해서 봉인을 만든 것이었다.

“<피의 군주>의 봉인입니다.”

드 라모트 백작부인의 검붉은 기운이 그 위를 덮었다.

피비린내가 코에 끼치는 듯했다.

“디아 드 무에르토스.”

마리아 베르타가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듯한 시늉을 했다.

<죽은 자의 날>이라는 그녀의 특성이었다.

피잉- 타타탕-

총화기 없이도 그녀의 손끝에서 특성의 기운이 가볍게 쏘아져나왔다.

무한히 공급되는 마력 탄환이 십자가 모양의 탄착군을 만들며 아다만티움 금고 표면에 흡수되었다.

“역시 <다이아몬드 폼>만한 게 없군요.”

무칸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무칸의 손은 영롱한 광채를 뿜어내는 다이아몬드로 바뀌어 있었다.

모용황에게 망신당한 것은 잊었는지, 어느새 기운을 차린 그였다.

무칸이 다이아몬드 손가락으로 금고의 표면을 긁었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아다만티움 금고에 흠집은 남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 움직임을 따라 특성의 기운이 금고에 스며들었다.

‘서명을 하는 거로군.’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 같았다.

한건우는 그 손이 만들어내는 문양을 똑똑히 기억에 새겼다.

저걸 똑같이 따라 써야 할지도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모용황의 금안이 번뜩 빛났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황금빛의 마기가 금고를 휘감았다.

모용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건우는 알 수 있었다.

‘<화안금정>으로 봉인하는구나.’

한건우에게는 다행이었다.

물질을 다루는 모용황의 능력은 특성이 아닌 권능 같았다.

아직 권능을 가진 자를 죽인 적이 없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권능은 흡수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용황의 <화안금정>이 아이템이 아니라 특성이라는 걸 안 것도 수확이었다.

다섯 겹의 봉인이 된 금고 앞에서, 모용황은 엄숙하게 말했다.

“이제 중요한 건 예언 석판을 완성시키는 걸세. 어느 세계에나 황혼의 시간은 도래하고, 그걸 막을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주어지지.”

“....”

모용황의 목소리는 분명히 작았다.

그런데도 귀에 꽂히듯이 모두에게 선명하게 들렸다.

“그걸 넘기지 못한 세계가 어찌 되었는지···.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보았을 것이네.”

모용황이 고개를 들어 미공략 균열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도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르고 퍼석한 흙과 건조한 공기.

겉으로 보기에는 바깥의 이집트 사막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곳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제공해준 사냥터···.’

한 세계가 조각조각 잘려나가, 다른 세계의 사냥꾼, 즉 플레이어를 위한 사냥터가 되는 것.

거기 살던 생물은 마수가 되어 사냥당하는 것.

어쩌면 한건우가 사는 세계선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 모인 아르고스의 각성자들에게 당부하네. 최선을 다해 예언 석판을 완성시키도록 하세. 시스템이 우리 세계에 내려준 구명줄을 잡아야 하지 않겠나?”

*

“한건우 씨, 정말 대단하던데요. 아르고스의 회합에 새 역사를 쓰셨어요.”

소소가 속삭였다.

한건우는 그녀에게 요구했다.

“모용황 님과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 아무도 엿들을 수 없는 곳으로 자리를 마련해줘.”

“네.”

소소는 생긋 웃으면서 돌아서려 했다.

한건우는 문득 그녀의 정체를 떠올렸다.

“잠깐. 네 진짜 이름은 뭐야?”

“모용소. 모용씨의 61대손이랍니다. 소소라고 부르시면 돼요.”

“용케 잘 숨기고 지냈군.”

“할아버님께 배워서요.”

모용황의 손녀이자, 후계자 교육을 받아왔을 그녀.

모용황이 무생물에 가깝게 기척을 숨길 수 있는 것처럼, 소소 역시 보기보다 강할 게 뻔했다.

“내 손녀가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나?”

모용황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내가 회의에 끼어들어 석판을 봉인하게 된 꼴이니,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역시 속을 모를 노인네였다.

“전혀요.”

“자네는 역시 참 독특하더군. 다른 사도들을 보니 어떻던가?”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군대 같더군요.”

주인과 사도의 관계는 상명하복 그 이상이었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 기세.

거의 종교에 가까웠다.

모용황과 한건우의 관계는 사뭇 달랐다.

완벽한 위장을 위해 연기할 생각도 했건만.

모용황은 한건우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꽤 동등하게 대해주었다.

“다른 주인들은?”

“모두 당신을 두려워하더군요.”

“허허! 잘 봤군. 아이처럼 떼를 쓰기에 봉인을 해주었지만, 달라질 건 없지.”

“....”

“목적성이 있으면 행동이 빠릿해지기 마련. 자신이 힘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고 믿고 나머지 석판을 열심히 찾아내지 않겠나?”

“...그럴 겁니다.”

“자네가 나의 인정을 받으려고, 석판을 찾아 온 동북아를 뒤집고 다닌 것처럼 말이야.”

모용황이 껄껄 웃었다.

한건우는 아까부터 계속 거짓 간파 특성을 사용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희미한 마기를 감지한다 해도, 단순한 패시브 특성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자는 정말 모르는군. 내가 석판 조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한건우는 멋쩍은 듯 웃고, 본론을 말했다.

“동북아를 다 뒤지고 있지만 한계가 있어서··· 이제부터는 저도 남의 구역을 좀 침범해볼까 합니다.”

첫번째 목표는 이미 정했다.

명분이 있는 상대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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