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50화 (150/238)

#150큰손 (5) - 놈을 칠 거다

균열에서는 간혹 이계의 문자가 나타났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계에도 지능이 높은 생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인간형 마수라 해봐야 트롤 정도의 수준.

인간에 필적할 만한 고지능 생명체의 문명은 오래 전에 멸망한 듯 유적으로만 남아있었다.

이계의 지성체가 남긴 기록이 하나씩 나타났지만, 초창기에는 해독할 방법이 없었다.

고대 드워프의 광산에서 룬 문자가 쓰여진 돌벽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고대 북유럽에서 사용되었던 룬 문자와 거의 유사했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로제타 스톤을 얻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쾌거라는데요···.]

[그 이상이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를 얻은 기분입니다···.]

당시 균열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쌍수를 들고 환호했다.

학자들은 룬 문자 기록을 통해서 이계의 지식을 얻어냈다.

드래곤이나 마수, 이계 식물에 대한 지식도 대부분 그렇게 알아낸 것이었다.

운 좋게 룬 문자와 다른 문자가 함께 쓰여진 경우, 그것도 차츰 해석해 나갔다.

그러나 한계는 뚜렷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더듬더듬 알아가는 데 그쳤다.

대다수의 문자는 아직 미지의 세계에 남아있었다.

한건우은 <언어의 석판>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예언 석판과 거의 비슷했다.

새까만 표면은 매끄럽고, 아무런 글씨도 없는 점이 비슷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임 사장이 물품 장부를 들고 서 있었다.

고객이 경매를 올려달라고 맡긴 물건이지만, 한건우가 지시한다면 얼마든지 조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명색이 물품인데, 그냥 빼돌릴 수는 없죠. 경매장의 신뢰도에 금이 갈 텐데요.”

남의 업장이라면 모를까.

경매장은 이미 반쯤 이비현의 것이었고, 앞으로는 완전히 가지게 될 곳이었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임 사장이 씩 웃었다.

“뭡니까?”

“판매자에게 직거래로 시가로 가격을 제시하고 구매하시죠.”

바로 타타우가 했던 제안 그대로였다.

임 사장이 부연 설명을 했다.

“말씀하신 석판이 들어왔을 때부터 생각했던 겁니다. 이게 전투력에 도움을 주는 물건도 아니고··· 이런 물건은 유찰될 가능성이 높다고 밑밥을 깔아놨거든요.”

“그런가요.”

“석판 아이템을 수집하는 손님이 뷰잉을 하던 중에 직거래를 제안했다고 하고, 다음 기회는 잡기 어려울 거라고 하면 쉽게 받아들일 겁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임 사장도 말솜씨가 많이 늘었다.

다만 상상력이 풍부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 석판으로 이계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못 한 모양이군.’

한건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한건우 자신도 모용황을 만나지 않았다면 별 생각 없이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이계의 지식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용황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까.

‘이것만 있으면···.’

한건우는 당장이라도 언어의 석판을 들고 이계인의 무덤이 있는 유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참, 경매 의뢰인이 사망한 각성자 용병의 유족이라고 했던가요?”

“아, 예. 맞습니다.”

한건우의 얼굴에 잠시 착잡한 감정이 스쳐갔다.

플레이어는 원래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다.

공무원이나 길드원이 아닌 프리랜서 용병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게 싫으면 각성을 해도 플레이어 생활을 하지 않으면 된다.

가까이는 금해준이 그렇듯이, 실제로 그런 사람은 종종 있었다.

지금도 매일 몇 명씩 용병들이 죽어가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유족이라는 단어가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

“경매장에서 감정한 낙찰 예상가의 10배를 쳐 주세요.”

“예? 그렇게 많이요?”

임 사장은 화들짝 놀랐다.

그가 아는 한건우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이 크고 시원시원하지만, 거래에서는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시죠.”

한건우는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한건우는 좀처럼 짬을 내지 못했다.

길드에 돌아왔더니, 고개를 돌릴 때마다 새로운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건우 형! 장영표 씨가 급히 찾았어. 유니콘의 뿔을 막 녹였다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빨리 뭘 결정을 해줘야 한대.”

“아, 그래.”

유적에 찾아가려던 한건우는 그대로 행선지를 틀었다.

건물 지하층, 장영표의 벙커 작업장.

파아아-

희뿌연 연기가 밀려왔다.

유황과 산, 각종 연마제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점점 더 엄청나지는군.’

장영표에게 집도 하나 마련해 주었건만.

도무지 집에 가는 꼴을 못 보았다.

지하 작업장에는 잡동사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누가 지적이라도 하면 장영표는 모든 물건이 자신의 규칙에 따라 놓여있다고 주장하곤 했다.

“빨리요, 마스터! 급합니다!”

연기 속에서 장영표가 재촉했다.

이 길드에서 한건우를 가장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장영표라고, 사람들이 얘기하곤 했다.

“109번째 시도에서 드디어 성공했다구요. 지금 빨리 골라주십쇼.”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는지.

유니콘의 뿔로 만들어진 용액이 반짝이는 빛무리를 흘리고 있었다.

장영표의 성화 속에서 몇 가지를 골라주었다.

새로 만든 아이템에 대한 자랑 섞인 보고를 듣다가, 겨우 끊고 1층으로 올라왔다.

막 바깥으로 나가려는 찰나.

길드원 한 명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마스터! 지금 옥상으로 가 주십시오! 드래곤이 심기가 불편한지 전기 스파크를 내뿜고 있어요. 이러다 정전되게 생겼습니다.”

“예.”

한건우는 곧바로 옥상으로 갔다.

심술이 난 드래곤을 달래는 건 그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빠! 왜 이제 와요!]

드래곤이 꼬리를 탕탕 내리쳤다.

해츨링 때라면 깜찍한 행동일지 모르겠다.

아성체의 드래곤이 하는 건 애교라고 보기에는 과했다.

고층 건물 전체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한건우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다가갔다.

인간형의 모습이 익숙해서 그럴까.

그의 눈에는 드래곤의 본체도 귀엽게 보였다.

“우리 딸, 아빠가 바빠서 서운했어?”

[헤헤.]

드래곤은 삐뚤어진 척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웅-

드래곤은 순식간에 귀여운 어린아이 모습으로 변했다.

한건우는 통통 튀며 달려오는 드래곤을 거뜬히 안아들었다.

아이로 변한 드래곤이 한건우의 품에 폭 안겨왔다.

무게감이 상당했다.

“하루가 다르게 크네.”

[얼른 더 커서 어른이 되고 싶어.]

드래곤이 칭얼거렸다.

한건우는 드래곤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자기도 바라는 바였으니까.

드래곤이 언제 성체가 되는지는 미지수였다.

‘드래곤을 키워본 경험이 있어야 알지.’

한참을 어르고 달래서 낮잠까지 재우고 내려왔더니.

이제는 결재 요청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 도쿄 지부에서 보낸 연락이···.”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한건우가 오랜만에 책상에 앉자, 눈치를 보던 행정 직원들도 문 밖에 줄을 섰다.

길드의 세세한 운영은 거의 다 금해준이 맡고 있었다.

금해준이 전권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결정만 한건우에게 올라오는데, 오늘이 그 날인 모양이었다.

‘금해준 이놈은 어디 갔지?’

다양한 도움의 요청이 밀려오는 가운데.

정작 금해준이 안 보였다.

평소에 한건우를 제일 귀찮게 하던 사람이 안 보이니,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금해준은 휴가 갔습니까?”

마지막 결재판을 되돌려주며, 한건우가 물었다.

직원은 어쩐지 곤란한 듯 뒷목을 긁적였다.

“아, 길드 매니저님 말씀이십니까···? 휴가는 아니시고, 저···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

한건우는 곧 그 거북한 반응의 실체를 깨달았다.

한건우는 몇 시간마다 한 번씩 <주시자의 뱀>을 활성화해서 타타우의 행선지를 파악하곤 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치료 중인 모양으로, 그의 눈과 귀는 감겨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별달리 주목할 움직임은 안 보였다.

그렇게 정신을 집중할 동안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지윤이가 왜 이 근처에 있지?’

각성하자마자 여동생에게 걸어놓은 <신성한 보호> 특성.

모든 보호 특성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만 걸 수 있게 되어있는 패시브 특성의 기운이었다.

보호 특성을 걸어 연결된 상태라서 위치를 감지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한건우는 의아했다.

‘날 찾아온 건가?’

지윤이는 아직 고등학교 2학년.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쉬는 날이라고 했던가? 그런 말은 없었는데.’

한건우는 여동생이 있는 곳을 탐지했다.

[특성 발동 : 빛의 군주]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움직여서 다다른 곳은, 옆 블록의 카페였다.

“?”

한건우는 머리에 피가 확 몰리는 것 같았다.

금해준이 지윤이와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뭐지?’

한건우의 사고가 정지했다.

둘은 한두 번 이렇게 만난 게 아닌 듯.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몹시 다정해보였다.

‘그러고 보니 해준과 지윤이는 나이가 비슷하던가···?’

그래도 거부감이 들었다.

회귀 전의 경험으로 임수호와 가까워지지 않게 은근히 떼어놓았더니. 이번에는 금해준인가?

수호와 해준은 같은 남자로서 참 좋은 동생들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윤이의 상대로는 한참 모자랐다.

아니, 지윤이에게 어울릴 만한 남자는 세상에 없다.

게다가 다 떠나서, 지윤이는 아직 학생이 아닌가.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어이가 없군.’

파지직!

꽉 쥔 주먹에서 자기도 모르게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허억.”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금해준이 고개를 돌리자, 유리창 밖에 선 한건우가 보였다.

“어, 형님···.”

어딘가 찔린 듯, 엉거주춤하는 모습에 한건우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지윤이 서둘러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아까 먼저 오빠 찾으러 갔는데 없어서···.”

평소에는 또랑또랑하게 말을 잘 하는 지윤인데.

오늘따라 쭈뼛거리는 모습이 어색했다.

한건우는 카페 안, 지윤이 앉아있던 자리를 흘깃 보았다.

지윤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복슬복슬한 털이 달린 고급스러운 곰인형과 꽃다발, 그리고 케이크가 보였다.

“아.”

그걸 보자, 한건우는 잊고 있던 사실이 생각났다.

금해준도 아는 걸 자기가 까맣게 잊었다니.

“지윤아, 미안.”

“에이, 미안하긴 뭘.”

지윤이도 한건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듯.

배시시 웃기만 했다.

“지윤아, 생일 축하해.”

“고마워, 오빠.”

지윤은 밝게 받아주었다.

“말로만 하려니 민망하네.”

“길드 분들이 그러시는데, 오빠가 엄청나게 바쁘다고 하더라. 생일 다 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봐서 좋다.”

“해준이랑 잘 놀고 들어가. 집에서 보자.”

한건우는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서기 전, 한건우는 금해준이 있는 쪽을 보았다.

딱히 노려본 것도 아닌데 금해준은 펄쩍 뛰었다.

“형님, 들어가십쇼. 조금 이따 집무실에서 뵙겠습니다.”

“그래, 꼭, 보자.”

돈을 갈퀴로 쓸어담아, 일반인 중에서 개인 자산 순위만 몇 위권에 들어가는 금해준이 아닌가.

생일날 고작 카페 데이트에 곰인형과 꽃다발 나부랭이 선물이라니.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한건우는 집무실로 먼저 돌아왔다.

겨우 홀가분하게 혼자가 되었다.

간만에 평화를 만끽하면서 습관처럼 <주시자의 뱀>을 활성화했을 때.

‘드디어.’

타타우가 눈을 뜬 모양이었다.

[바보 같은 놈. 네가 맘대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무릎을 꿇은 타타우의 앞에 그의 주인이 앉아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침을 뚝뚝 흘리는 애완용 하이에나를 쓰다듬고 있는 검은 손만 보였다.

[이집트에서 예언 석판을 찾았다. 모용황을 불렀어. 그 자리에서 놈을 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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