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큰손 (4) - 언어의 석판
<주시자의 뱀>은 곧 타타우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특성 발동 : 주시자의 뱀]
- 대상자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끄으···.”
타타우는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놓은 채로도 불길한 기분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의 뇌 속에 보이지 않는 감시자가 자리잡았다.
‘이걸로 두 번째로군.’
김도경에게 써먹은 이후, 남에게 <주시자의 뱀>을 심은 것은 처음이었다.
주시자의 뱀은 매우 유용했지만, 처음 심기가 까다로웠다.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해서 정신을 잃은 상태로 만들어야만 하니까.
실은 한건우가 진짜로 이걸 심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모용황의 부하, 소소였다.
그녀는 정말이지 비밀스러운 여자였다.
아르고스의 첫 번째 주인, 모용황의 수족과 같은 부하였다.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속, 겹겹이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소소는 수없이 많은 가짜 신분으로, 한국의 특수안보부와 중국의 천망, 일본의 유력한 야쿠자 조직까지 문어발을 담그고 있었다.
‘아마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정보에 접근하는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대체 소소의 원래 국적과 출신은 무엇인지, 한건우를 만나러 오지 않는 평소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주시자의 뱀을 심으면 정말 쏠쏠하겠지만.
소소는 당연히 그런 빈틈을 주지 않았다.
한건우와 제법 편한 사이가 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거리를 유지했다.
언제든 한건우가 자기를 공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경매장 홀 바깥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인기척이 났다.
“들어와도 돼.”
한건우가 말하자, 이비현이 다급히 들어왔다.
“괜찮으시죠?”
그녀의 큰 눈이 휘둥그레졌다.
먼지와 연기로 난장판이 된 홀 안에, 한건우가 홀로 서 있었다.
한건우는 몹시 멀쩡한 모습이었고, 그 앞에 쓰러진 타타우는 반 송장에 가까웠다.
‘한건우 씨가 싸우고 난 모습은 대개 이런 식이지. 아니, 요새는 한건우를 상대로 일합이라도 주고받은 상대를 찾기가 더 힘들지만···.’
방금 이비현이 느끼기로는 타타우는 상당한 강자였다.
수인화라는 희귀한 능력 탓에 전신이 흉기와도 같았다.
괴물 같은 속도와 신체 능력도 엄청났다.
‘만일 일대일로 마주쳤다면···’
기습 공격은 해보겠지만, 한 번 실패하면 돌파할 방법이 안 보이는 상대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상대를 한건우는 간단하게 두들겨 패버렸다.
“....”
이비현이 가만히 서 있자, 한건우는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온통 부서지고 난장판이 된 경매장 홀을 흘깃 보았다.
벽과 골조만 멀쩡하지, 좌석과 인테리어는 싹 다 새로 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런, 너무 많이 부서졌나?”
한건우가 머쓱해했다.
경매장의 대주주인 이비현이니 예민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슨 일이지!”
“침입자가 있었다고?”
그때 이비현의 뒤를 따라 다른 이들도 들어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들은 일명 ‘큰손’이라 불리는 사장들.
블랙마켓의 구역을 관할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각성자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혼자 다니는 것은 이비현뿐이었다.
“허억.”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경매장 홀의 참담한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 정도면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경매가 열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가드들은 어디 있단 말이야···?”
황망하게 경비원을 찾는 자가 있었다.
한건우가 대답했다.
“내가 오기 전에 모두 죽어있었다.”
“?”
그때 큰손들을 헤치고, 자리를 피했던 임 사장이 돌아왔다.
애초에 멀리 가지 않았던 듯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임 사장이 한건우에게 다가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건우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으니까.
“!”
한건우의 얼굴을 알아본 큰손들이 바짝 굳었다.
대한민국 각성자 랭킹 1위.
젊은 나이에 최강의 길드 아레스를 이끄는 길드 마스터, 한건우.
국가를 움직이는 그가 난데없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폭격을 맞은 듯한 홀 구석에 거구의 흑인이 쓰러져 있었다.
방금까지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게 분명했다.
그 앞에 한건우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고고하게 서 있었다.
그 광경은 몹시 비현실적이고 위압적이었다.
큰손들과 그들의 경호원 무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했다.
눈치 빠른 이들이 머리를 굴렸다.
‘랭킹 1위 한건우가 이비현의 뒤를 봐준다더니, 아직도구나.’
이전에는 솜브라의 이비현이 한건우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대세였다.
애까지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것도 옛날 이야기인 줄 알았다.
솜브라가 점점 세력을 넓히며 블랙마켓의 구역을 야금야금 먹을 동안, 한건우는 블랙마켓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외에 특별히 솜브라의 사업에 관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1년여.
빠르게 변하는 뒷세계에서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이비현의 뒤에 한건우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가 만곡도를 꺼내들고 타타우에게 다가왔다.
“말씀하시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이놈의 부하들과 같이 묶어서 시장 바닥에 둬.”
이비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침입자인데다 저희 경비원까지 죽였는데, 그걸로 되시겠습니까?”
“충분해.”
“알겠습니다.”
큰손들의 눈과 귀가 바쁘게 움직였다.
한건우와 이비현이 주고받는 대화 내용도 그렇고, 이비현의 깍듯한 태도도 놀라웠다.
이 바닥에서 이비현은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차갑고 냉혹한 여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이비현이 한건우를 볼 때는 그야말로 극진하게 대하고 있었다. 눈빛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우리가 알던 게 틀렸군.’
‘이비현은 한건우의 애인 같은 게 아니라 부하였어.’
‘솜브라도 그럼 사실 아레스의 하위조직인 건가!’
큰손들은 서로 기민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마음 속으로 외치는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해서, 한건우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솜브라의 부하들이 경매장 홀에 도착했다.
타타우를 실어나가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타타우가 정신이 들려는 듯 꿈틀거리자, 한건우는 뒷목을 한 대 더 쳤다.
아까 백인 각성자들 포함해서, 셋 다 만신창이가 된 상태.
상급 힐러를 만나기 전에는 회복하기 어려울 듯했다.
타타우의 체중으로 들것이 부서질 듯했다.
부유 특성을 쓰는 법사까지 동원되었다.
“깨어나면 어디로 도망가는지 추적할까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이비현이 속삭였다.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괜찮아.”
“아···.”
가장 완전한 추적 장치를 심어놓았으니, 굳이 인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비현의 태도가 묘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한건우가 물었다.
“왜 그래?”
평소처럼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면 한 번 더 물으려던 참이었는데.
이비현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한 마디를 꺼냈다.
“제가 이제··· 아무런 도움이 안 되나요?”
“어?”
한건우는 조금 당황해서 이비현을 바라보았다.
쌓여있던 감정이 복받쳐서 터진 듯, 목소리가 무거웠다.
“워낙 강하시니 원래도 큰 도움은 못되었지만···. 쓸모없는 사람으로 붙어있고 싶지 않아요.”
급기야 이비현의 눈꼬리에서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떨어졌다.
‘이런.’
“비현아.”
“아··· 아니예요.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제가 괜히.”
이비현은 눈물을 슥슥 닦고 돌아서려 했다.
탁!
한건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비현의 눈동자가 이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커졌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그래.”
“...죄송해요.”
이비현이 모기 기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한건우에게 잡힌 손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제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누군데. 그런 사람이 이러면 안 되잖아.”
“한건우 씨···.”
이비현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놀라움이 뒤섞였다.
한건우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손목을 빼려는 시늉을 했지만, 큰 의지가 없는지 영 힘이 부족했다.
한건우는 느끼는 점이 있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이비현이 저렇게 느낄 정도라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말을 안 할 뿐이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건우가 너무 앞서 나가는 바람에, 그걸 따라오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교 대상이 너무 높을 뿐이지, 한건우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눈부신 성장을 하지 않았나.
객관적으로 보아도 1년 전의 위치와 지금의 위치가 비슷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비현도 그걸 몰라서 그런 건 아닐 테니.
“요즘 내가 너무 고생을 안 시켰나?”
이비현이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웬 남자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이비현 님! 지금 같이··· 헉.”
임 사장이 들어온 것이었다.
그가 홀 안의 묘한 분위기를 보고 멈칫했다.
‘망할, 눈치 없이 중요한 순간에 끼어들었구만.’
이비현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건 아닐까.
임 사장의 등에서 땀이 삐질삐질 나는 듯했다.
한건우는 자연스럽게 이비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방금 그놈이 찾던 석판 아이템 말이죠?”
“예, 맞습니다···. 같이 금고로 가시죠.”
임 사장은 어쩐지 죄 지은 기분으로 길을 안내했다.
타타우에게는 경매 물품을 절대 사전에 못 보여준다고 딱 잘랐지만.
사실 그런 규칙은 없었다.
임 사장은 이비현에게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석판 형태의 아이템이 들어오면, 경매에 올리기 전에 무조건 자기에게 제일 먼저 보여달라는 지시였다.
그래서 최대한 숨겼을 뿐이었다.
‘강한 각성자가 위협하는데도 최대한 끝까지 지시를 따르려고 했어.’
임 사장은 한건우가 기대한 것보다 더 충실하게 역할을 수행해줬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군.’
임 사장이 경매장 아이템을 보관하는 창고로 갔다.
무려 3중의 아공간 잠금장치를 거쳐, 한건우는 임 사장이 말한 석판을 발견했다.
“사망한 각성자 용병의 유족이, 잡동사니를 통째로 경매장에 맡겼습니다. 그 중에서 발견했죠.”
새까만 석판 아이템.
겉보기에는 예언 석판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쉽게 찾는 걸까.
그러나 아이템 창을 확인하고 나서, 일말의 기대는 작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언어의 석판]
- 석판 위에 쓴 언어를 원하는 형태로 번역할 수 있다.
한건우가 김이 샌 표정을 짓자, 임 사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찾던 물건이 아니십니까?”
‘번역기 같은 건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군.’
석판을 다시 내려놓으려던 한건우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언어라고?’
아이템 설명을 읽어봐도, 그 대상에는 제한이 없었다.
한건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계의 언어도 가능하다는 건가.’
한건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모용황이 그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화안금정>을 통해 세상의 모든 정보를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용황은 지구를 넘어서 이계의 지식까지 얻었다.
이계의 고문서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토록 강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길드가 관리하는 홍대의 빙하기 균열.
그 안에 있던 이계의 유적이 생각났던 것이다.
‘유적 전체에 글씨가 빽빽하게 쓰여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