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큰손 (3) - 수인화
“가라.”
“?”
“나는 위대한 은코노 부족의 후예다. 여자는 죽이지 않는다.”
거구의 흑인이 턱을 치켜들며 말하자, 이비현은 벙찐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옆얼굴에 황당한 기색이 어렸다.
‘뭐라는 거야.’
한건우도 헛웃음을 지었다.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같은 각성자끼리 남녀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컨셉이라도 과한데, 진심 같아서 더 문제였다.
“어이, 은코노.”
한건우가 도발적으로 손끝을 까닥이며 그를 불렀다.
흑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왕방울만한 눈에서 흰자위가 유난히 번쩍거렸다.
터엉-
자신을 타타우라고 소개한 흑인이 주먹을 쥐어 가슴을 두드렸다.
수컷 고릴라가 가슴 근육을 치는 것처럼 엄청난 소리가 났다.
“은코노 부족의 후예, 타타우.”
“뭐든 간에. 남의 구역에 쳐들어왔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한건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은 가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임 사장이 일을 보던 경매장 사무실은 거의 박살이 나 있었다.
타타우는 더이상 변명을 하지 않았다.
웃음기가 사라지자, 원래도 험악하던 얼굴이 더욱 무섭게 일그러졌다.
적을 마주하자 한건우는 은근히 가슴이 뛰었다.
요즘 길드 일도, 균열 공략도 일사천리. 수월하게만 풀렸다.
그의 앞에 나타난 이 거구의 방해물이 왠지 반가웠다.
‘한번 실력을 볼까?’
치잉-
한건우가 손가락을 튕기자, 붉은 광선이 뱀처럼 움직이며 춤을 추었다.
<빛의 군주>와 <아그니의 화염>의 중첩이었다.
타아앗-
“!”
타타우는 보기보다 날렵했다.
그는 특성 중첩으로 만들어낸 붉은 광선을 피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차악!
타타우가 무릎을 반쯤 꿇은 채로 한건우와 이비현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그의 눈높이가 이비현과 비슷해졌다.
“한국의 경매장은 참 우스운 곳이군.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왜 이리 많은가?”
타타우가 비꼬았다.
그의 눈동자에 한건우를 향한 호승심이 일렁였다.
“경매장의 주인이라고 안 했어. 이 나라는 전부, 내가 지키는 구역이야.”
한건우가 맞받아쳤다.
타타우가 몸을 일으켜 오만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급히 석판을 찾아와서 빼앗으려 하는 걸 보니 아르고스의 조직원일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주인 급은 아닐 것 같고··· 사도인가?’
한건우가 그렇게 판단할 동안, 타타우는 한건우를 알아보았다.
“너, S급 한건우?”
“....”
한건우가 부정하지 않고 피식 웃자, 그걸로 타타우는 확신했다.
타타우는 근육질의 팔로 팔짱을 끼고 위압적으로 한건우를 쏘아보았다.
“마지막 경고다. 나를 방해하는 자는 죽는다.”
“자신감이 있나 보군.”
“S급?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타타우가 두꺼운 목을 까딱하며 쓰러진 가드들을 가리켰다.
그걸 보고 한건우는 미심쩍었다.
‘한국의 소식에 대해서 잘 아는 놈은 아니군.’
한건우의 얼굴과 이름은 용케 알고 있으나, 소식 업데이트가 좀 느린 것 같았다.
‘정말 이 자가 아르고스의 사도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한건우도 다른 사도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나.
다른 사도가 그를 꼭 알아보라는 법은 없다.
‘내가 S급이라고 알고도 덤비는 걸 보면, 저 자도 그 정도는 되겠지.’
타타우의 온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만만치 않았다.
한건우는 빠르게 그의 체형을 훑었다.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전투하기 전에 나오는 본능적인 습관이었다.
새까만 피부로 덮인 근육질의 몸은 종마처럼 윤기가 났다.
외형적으로도 그렇지만, 방금 보여준 날랜 몸놀림을 보면 법사나 주술사 같지는 않았다.
양팔과 어깨의 근육이 대칭적으로 발달했다.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쓰는 자는 아닌 듯했다.
몇 가지 선택지를 지우자, 남는 건 별로 없었다.
‘권사?’
타타우의 맨손 주먹을 훑어보았지만, 너클을 찬 흔적이 안 보였다.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황.
한건우는 추론을 그만두었다.
이 자를 때려눕히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
슈우욱-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건지.
타타우와 한건우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아이들의 싸움이든, 각성자의 전투이든.
몸으로 하는 싸움에는 전 세계적으로 통하는 법칙이 있다.
대부분, 먼저 치는 놈이 이긴다.
그리고 일격에 끝나는 경우도 많다.
가까워진 타타우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앗!”
이비현은 만곡도를 들고 긴장한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예고 없는 움직임에 깜짝 놀랐다.
휘이-
무기를 빠르게 휘두르면 진공이 생기듯이,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밀폐된 공간이라 공기의 움직임이 여실히 느껴졌다.
타아앗-
두 마리의 맹수가 맞부닥친 듯, 엄청난 충격파가 밀려왔다.
타타우의 일격이 한건우의 가드에 명중한 것이었다.
이비현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먹혔다!’
타타우의 혼신의 힘을 담은 첫 일격이었다.
타타우가 쾌재를 부르며 한건우의 턱을 연타하려는 순간.
한건우가 구부리고 있던 왼팔 주먹을 마저 뻗었다.
[특성 발동 : 역천의 권]
상대로부터 흡수한 충격을 다시 돌려주는 것.
아주 단순한 특성이었다.
그 단순한 특성이 한건우의 손에 들어가자, 사기에 가까운 위력을 발휘했다.
강철보다 강한 몸으로 충격을 버텨내고, 상대로부터 받은 충격 에너지를 소실 없이 대부분 흡수했다. 어마어마한 마력량 덕분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냥 내질러도 위력적인 주먹에 충격파까지 싣는 것이었다.
퍼어어억!
터엉- 트드드득···.
타타우의 몸이 시멘트 벽을 부수고 처박혔다.
“크어억···.”
타타우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그의 강력한 일격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향해 돌아온 셈이었다.
‘좋아.’
한건우는 방금 한 번의 충돌로 확신했다.
상대방은 권사 클래스가 맞았다.
그것도 근접전 위주로 구사하는 인파이터형 권사였다.
그렇다면 아무리 강하더라도, 한건우의 장난감이나 다를 바 없었다.
트드득!
벽에서 몸을 빼낸 타타우가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알 수 없는 부족의 언어였다.
발음이 무척 원색적이라, 처음 듣는 언어인데도 내용을 알 것만 같았다.
스으으-
타타우의 몸에서 마기의 파동이 일었다.
그가 치켜든 두 주먹에서 빽빽한 털이 돋아났다.
짧고 윤기나는 검은 털이 타타우의 주먹과 하완을 뒤덮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타우의 주먹이 부풀어올라 세 배는 커졌고, 끝에는 갈고리처럼 휘어진 발톱이 자라났다.
그건 누가 봐도 고양이과 맹수의 손이었다.
손바닥과 손끝에는 충격을 흡수하는 육구가 두툼하게 자라났다.
“허억!”
임 사장이 헛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아직 적절한 타이밍을 못 잡아서 도망을 못 치고 있던 차였다.
임 사장도 수많은 각성자들을 봐 왔지만, 이런 건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비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수인화.”
몸의 일부만 변했으니, 완벽한 수인화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수인화 자체가 대단히 드문 능력이었다.
그 드물다는 테이머만큼이나 드물었다.
타타우의 양 주먹은 흑곰의 앞발로 변했다.
양 발은 흑사자의 뒷다리처럼 변해 있었다.
부족의 전통 의상 사이로 검고 길쭉한 꼬리도 보였다.
“크르르르···.”
타타우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그의 척추는 구부정해졌고, 키는 더욱 커졌다.
넓은 사무실이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비현, 임 사장 데리고 자리를 피해.”
한건우가 이비현에게 말했다.
이비현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비현이 임 사장을 일으켜세우고 빠르게 빠져나갈 동안, 타타우는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직 한건우를 향해서만 이빨을 드러내며 투지를 불태웠다.
한건우는 마음만 먹는다면 타타우가 자기의 손끝 하나 못 건드리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근접전을 하기로 했다.
마법 없이 자신을 이겨보라고 바락바락 외치던 알파스의 박이경이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그 외에 수많은 각성자들도···.
‘권사 클래스는 좀 그런 게 있지.’
멀리 갈 것도 없이, 회귀 전의 한건우도 그런 심리가 있었다.
주먹이든 검술이든 마법이든 똑같은 공격인데.
어쩐지 맨몸을 부딪치는 격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패하면, 진짜로 패배한 것 같지 않았다.
‘수준에 맞춰서 박살을 내주지.’
“크워어!”
타타우가 야생의 곰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한건우에게 덮쳐들었다.
한건우는 슬쩍 피하면서 부서진 문틈을 통과해, 넓은 관중석이 있는 큰 홀로 넘어갔다.
장소를 바꾼 것이었다.
타타우가 앞으로 구르며 한건우의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콰직!
타타우의 뒷발이 스쳤을 뿐인데, 관중석 의자 여러 개가 산산조각으로 박살났다.
수인화는 겉모습만 변하는 게 아니었다.
변화한 부위는 인간이 아닌 마수로 변한 듯 마기를 머금고 있었다.
타타우는 아까 불의의 역습을 당했음에도, 기세가 등등한 채였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분명히 위력이 대단했다··· 예상치도 못했어. 그러나 힐러나 버퍼를 달고 온 것도 아니니, 연속으로 쓸 수 있는 특성은 아닐 터.’
방금 타타우가 당한 건 일격필살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타타우는 그 공격을 버텨냈다.
맷집 두터운 것 하나는 자신 있었으니까.
‘한건우, 이제 밑천이 드러났군.’
타타우가 큰 착각을 한 채로 덤벼들었다.
퍼어억!
타타우가 온 체중을 실어서 흑곰의 앞발을 휘둘렀다.
솥뚜껑만한 주먹이 한건우의 몸통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됐다!’
간장 부분에 깊숙하게 들어가는 주먹의 감각에, 타타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
[특성 중첩 : 역천의 권]
[특성 중첩 : 아그니의 화염]
한건우의 주먹이 불꽃으로 감싸였다.
순간, 타타우의 왕방울만한 눈이 더 커졌다.
퍼어억-
쿠과과과!
타타우는 수십 미터를 날아가, 경매장의 홀 벽에 그대로 처박혔다.
“그어억···.”
치이이익···.
타타우의 온몸에서 김이 솟아올랐다.
벽은 용케 부서지지 않았다.
사무실의 시멘트 벽과는 달랐다.
“역시 벽이 튼튼하군.”
한건우가 감탄하면서 타타우에게 다가갔다.
블랙마켓의 경매장 홀은 아마 국내에서 가장 안전한 건축물 중 하나이리라.
수억에서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아이템들을 보관하고 경매에 올려야 하니.
습격에 철저하게 대비해서 지을 수밖에.
그 덕분에 타타우는 모든 충격을 자기 몸에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투욱.
벽에 박혀있던 타타우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건우는 내심 타타우에게도 감탄하고 있었다.
<역천의 권>을 두 번 연속 맞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걸 맞고도 버티는 사람은 정말로 흔치 않을 것이다.
“하, 한 건우···.”
타타우는 힘겹게 두 발로 일어섰다.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단 두 번의 타격.
막을 수도 없었고, 버텨낼 수도 없었다.
그의 온몸이 고장난 듯 삐걱였다.
타타우는 고통과 두려움을 모르는 은코노 부족 최강의 전사였다. 고통쯤이야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두렵다.’
상대는 타타우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다.
그런데 왠지 거인처럼 느껴졌다.
뚜벅, 뚜벅.
한건우가 타타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타타우의 이성은 지금이라도 그를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으으-
한건우의 주먹은 다시 불꽃에 휩싸였다.
지나치게 두려우면 도망조차 못 간다는 것을, 타타우는 처음으로 알았다.
*
한건우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타타우 앞에 섰다.
그의 온몸에서 흰 연기가 솟고 있었다.
“사실 이걸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어쨌든 타타우를 붙잡고 묻느니, 이게 가장 빨랐다.
그가 아르고스의 사도라면, 실패를 주인에게 보고하지 않을까.
스스스···.
그의 손끝에 마력이 응축되고, 투명한 뱀이 만들어졌다.
[특성 발동 : 주시자의 뱀]
뱀은 타타우의 혈관을 타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