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47화 (147/238)

#147큰손 (2) - 불청객

덩치 큰 백인 둘이 이비현을 막아선 것이었다.

“그만.”

두 백인은 외국 클럽의 문지기처럼 시커먼 정장을 빼입고, 가뜩이나 어두침침한 지하시장에서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다.

그들은 귀 뒤에 통역기가 달린 헤드셋을 끼고 있었다.

한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하는 이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지?’

뒤따라가던 한건우는 어이없는 눈으로 그들을 살펴보았다.

둘 다 키가 2m에 육박했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몸통 앞뒤 좌우의 두께도 상당했다.

블랙마켓에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각성자인 건 당연하지만, 조금 익숙한 분위기가 풍겼다.

한건우는 그들의 손등을 타고 내려온 문신을 알아보았다.

‘국제 각성자 용병부대 출신. 현역은 아니고.’

사설 경호부터 내전까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이들이었다.

한건우도 부대를 이끌면서 몇 번은 합작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꽤 강한 자들 같았다.

‘둘 다 B급 각성자 정도는 되겠군.’

주변에 S급이 늘어나서 자꾸 잊게 되지만.

보통은 B급만 되어도 길드 내에서 주력으로 대접받는 정도는 되었다.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켜라.”

이비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녀의 손끝이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아공간 무기집 속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걸, 한건우는 알고 있었다.

“어이, 꼬마. 오늘 경매 없어. 가서 놀다가 와.”

“...?”

백인 각성자가 어이없는 말로 이비현을 쫓아 보내려 했다.

이비현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여기서 이비현이 당장 그들을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서울 블랙마켓의 대주주인 그녀가 경매장에 들어가겠다는데.

가로막는 자가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쉿! 잠깐.”

“저기 봐.”

주변이 조용해졌다.

시장 곳곳에서 호기심에 찬 시선들이 이쪽으로 꽂혔다.

블랙마켓 안에서 각성자끼리 싸움을 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경찰이나 법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마켓의 보호비를 걷어가는 주주들에게 응징을 당했다.

그러나 이비현이 바로 그 주주였다. 눈치 볼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백인 각성자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그들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경매장 문을 가로막았다.

“내 고용주가 나올 때까지, 아무도 못 들어간다.”

“고용주? 그게 누구지?”

이비현이 여상스럽게 물었다.

백인 각성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건 알아서 뭐···.”

파앗-!

이비현의 모습이 <그림자 맹시>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두 백인 각성자는 본능적으로 대응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전투의 향방은 한순간에 갈렸다.

스윽-

“크억!”

종이를 베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비현이 그들의 뒤에서 스르륵 나타났다.

순식간에 백인들의 뒤로 돌아가 다리의 힘줄을 깔끔하게 벤 것이었다.

두 백인 각성자가 동시에 풀썩 쓰러졌다.

그들의 몸 뒤쪽에서 피가 솟았다.

그들은 쓰러진 상태에서도 허리에 찬 무기를 잡고 반격하려 했다.

짧은 던파와 나이프.

근접 경호원의 무기였다.

쉬익!

이비현이 한 손으로 던진 암기가 그들의 팔 힘줄에 정확히 박혔다.

그녀의 동작은 물 흐르듯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번에는 은신을 한 것도 아니고, 예상 밖의 기습도 아니었다. 그저 확연한 실력 차이일 뿐이었다.

“끄어어···.”

백인 각성자들이 무기를 놓치며 몸부림쳤다.

그들이 멀쩡하게 몸부림치는 걸 보고, 한건우는 이비현이 든 검을 보았다. 무표정한 그녀의 손에는 S자로 휘어진 만곡도가 들려 있었다.

“시미터가 아니군.”

이비현의 시미터에는 자신이 준 바실리스크의 맹독이 발라져 있었다.

방금 아공간 무기집에서 그걸 골랐다면, 이 자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대장님!”

소식을 듣고 뛰어왔는지, 블랙마켓의 지점에 나와있던 부하들이 뛰어왔다.

이비현이 말없이 고개를 까딱했다.

부하들은 백인 각성자 둘을 제압해서 시장 한켠으로 끌고 갔다.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한 채 몸통으로만 몸부림치는데도, 제압이 쉽지 않았다.

소란이 진정되자, 블랙마켓의 상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차는 이들도 있었다.

“멍청한 놈들. 이비현 님을 못 알아보고.”

“저러니 남의 구역에 와서 사정 모르고 설치면 안 돼.”

말로는 태연한 척 수다를 떨었지만, 상인들의 간담이 서늘했다.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따라갈 수조차 없었다.

소문이 무성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 그녀의 일격을 생생하게 목격한 것만으로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솜브라의 이비현이 저 정도였구나.’

‘뼈도 못 추리겠구만.’

이비현은 더이상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뒤따르던 한건우가 물었다.

“방금 그놈들. 왜 안 죽였어?”

“아직 그자들의 뒷배를 모르기도 하고, 그들의 고용주가 혹시 한건우 씨가 의뢰한 ‘석판’ 일과 관련이 있는 자라면··· 그건 한건우 씨가 판단해야 할 것 같아서요.”

한건우는 대답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비현의 말이 자신의 마음과 정확하게 일치했으니까.

‘짧은 순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니.’

그때 이비현이 한건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요. 많이 변했죠?”

“?”

“경매장 말이에요.”

“맞아, 대단하군.”

한건우는 경매장 내부의 변화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터 같은 공간에서 선 채로 참여하던 경매는 옛말인 듯.

지하를 더 깊이 파서 계단식으로 관중석을 만들어 놓았다.

언뜻 보면 꽤나 구색을 갖춘 공연장처럼 보일 정도였다.

관중석은 텅 비어 있었고, 직원들도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였다.

아까 그 백인의 말대로, 오늘은 경매가 이루어지지 않는 날이었으니까.

이비현은 공연장 같은 경매장의 큰 홀을 지나, 운영진이 있는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서 곤란한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죄송합니다. 경매 프리뷰에 이미 등록된 물건을 빼낼 수는 없습니다.”

“누가 빼내라고 했나? 직접 보고 사겠다는 것이다.”

이비현은 문을 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섰다.

우는 소리로 사정하고 있는 건 한건우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임 사장?’

블랙마켓의 잡화상 출신으로, 한건우와 솔스톤 거래를 텄던 그 상인이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크고 작은 거래를 지속해왔다.

임 사장은 이제 서울 블랙마켓 경매장의 운영을 맡아보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사장.

블랙마켓의 대주주인 큰손들을 대신해서 운영을 하는 바지사장이었다.

시장 구석에서 아이템 위탁 거래를 하던 임 사장이 이제는 서울 옥션의 사장이 되었으니, 영전이라고 할 정도의 신분 변화였다.

그런데 임 사장이 상대하고 있는 자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몹시 독특하고 느릿한 억양 탓에 외국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백인 각성자들의 고용주가 저 자일까.

“내, 내일 경매에 올라왔을 때 보고, 정식으로 입찰하시면 됩니다.”

블랙마켓에서 장사로 잔뼈가 굵은 임 사장이었다.

그런 그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 자들처럼 되고 싶은가?”

우두둑.

뭔가를 거침없이 부수는 소리가 났다.

임 사장이 숨을 삼키는 듯했다.

“허억··· 어쩔 수 없습니다. 한번 등록이 된 이상, 물건은 내일까지 보관하다가 경매로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좋다. 지금부터 네 팔다리를 하나씩 떼어내겠다. ‘석판’이 언제 튀어나올지 기대되는군.”

문 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한건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역시 석판을 찾아온 게 맞는군.’

7개의 예언 석판 중 한 조각.

아르고스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물건이겠지만.

2개의 조각을 숨기고 있는 한건우로서는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조직의 내부에 들어오고 나서도, 생각보다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용황과 소소에게 은근히 떠봤지만, 그들은 다른 주인이나 사도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겨우 몇 가지 정보만을 들었을 뿐.

철저한 점조직 형태로 운영하는 걸까?

그건 분명히 아니었다.

<주시자의 뱀>으로 살펴봤을 때, 김도경은 모용황 말고 다른 주인과도 소통했으니까.

죽은 김도경과 한건우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뜻이었다.

‘내부적으로 신입을 살펴보는 기간이 있거나··· 모용황이 나를 아직 완전히 못 믿고 있는 거다.’

한건우는 일단 공식, 비공식 마켓을 불문하고 석판 형태의 아이템이 발견되면 자신에게 가장 먼저 알려달라고 연락을 뿌려놓았다.

‘예언 석판을 모으는 건 아르고스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했지. 게다가 아직 아이템의 내용이 확실치 않으니, 모두들 관심을 가질 거야.’

특히 아직 ‘???’로 표시된 히든 메시지가 남아있지 않던가.

한건우도 보았듯이, 예언 석판 2조각을 결합할 때 첫 번째 히든 메시지가 풀렸다.

모용황은 4조각을 결합했지만, 아직 히든 메시지는 한건우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밖에 안 풀린 상태.

예언 석판 1조각을 추가로 입수한다면, 아르고스의 주인들은 그걸 결합하는 순간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눈알만 둥둥 떠서 오는 게 아니라, 직접 회동할 가능성이 크지.’

한건우는 그들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모용황이 주인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했으니, 다른 주인들은 모용황 정도에는 못 미친다는 거야.’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면 그때부터는 길이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빠른 시일 내에 각개격파하면서 특성을 흡수하고, 모용황에게 도전할 것이다.

한건우는 그렇게 가닥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벌써 이렇게 제 발로 나타난 자가 있을 줄이야.’

경매장 사무실 안에서 임 사장이 우는 소리를 냈다.

“아니, 소, 손님···.”

“마지막 경고다. 아이템 보관소를 열고 석판을 꺼내 와.”

경매장의 아이템 보관소는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임 사장이 더욱 우는 소리를 했다.

“손님, 그건 저라고 해도 열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 네가 이 경매장의 주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상대의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가라앉았다.

누가 진짜 주인인지까지는 잘 모르고 온 모양이었다.

스으으-

안에서 마기를 운용하는 기척이 들렸다.

더이상 기다릴 게 없었다.

콰앙-!

한건우가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사무실 문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임 사장. 그러고 있었어?”

어쩐지 숨에 차서 말을 더듬는다 했더니.

임 사장은 거구의 흑인에게 멱살이 잡힌 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임 사장의 주변에는 경매장을 지키던 가드들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분노한 이비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완전히··· 괴물인데?’

한건우는 거대한 흑인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온몸을 뒤덮은 문신과, 화려한 천과 짐승 가죽으로 만든 부족의 의상은 그렇다치고. 타고난 피지컬이 대단했다.

아까 용병부대 출신 백인 경호원들은 댈 것도 아니었다.

2m가 훌쩍 넘는 상대방의 키는 이제까지 본 사람 중 가장 컸다. 알파스의 박이경보다도 큰 것 같았다.

한건우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냥 피지컬만 좋은 거라면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겠지만.

‘이놈은 강하군.’

바깥에 있던 잔챙이 같은 놈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흑인이 눈을 돌려 한건우와 이비현을 응시했다.

“....”

공기의 밀도가 무거워지는 듯했다.

이제껏 임 사장이 그를 마주보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한 게 용하다 싶을 정도였다.

“너희들은 뭐지?”

휙-

거구의 흑인은 임 사장에게 관심이 떨어졌다는 듯 멱살을 놓았다.

임 사장이 끈 떨어진 연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컥···.”

목을 잡고 켁켁거리던 임 사장은 엎드린 채로 부서진 문으로 뒷걸음질쳤다.

이런 자리에는 최대한 안 끼는 게 상책이었다.

차락-

흑인이 임 사장의 다리를 짓밟으려 하자, 이비현이 만곡도를 겨누며 그를 막았다.

“저 자는 보내라. 이곳의 경매장은 내가 관할한다.”

이비현의 말을 듣고, 거구의 흑인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유난히 큰 그의 이빨은 짐승의 송곳니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