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46화 (146/238)

#146큰손 (1) - 암흑 시장의 주인

“웬일이에요,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한건우를 마중 나온 이비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답지 않게 수줍은 미소였다.

“너만 할까?”

한건우는 이비현이 새로 산 건물을 바라보았다.

짙은 회색의 외벽, 안이 보이지 않는 유리창.

아무런 간판도 달려있지 않아서 꽤 수상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이곳은 국내에서 가장 큰 정보조직, 솜브라의 본사였다.

아예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는 이들도 꽤 많았다.

최근에는 블랙마켓의 아이템 경매 관리에도 참여하고, 인력 중개 사업까지 발을 넓혔다고 했던가.

그녀는 국내의 지하 시장 전체에서 큰 손으로 꼽히며 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제가 뭘요, 들어오세요.”

실내로 들어가자, 이비현은 바로 회색 망토를 벗어던졌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치렁치렁 자라나 있었다.

몇몇 미등록자들은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 솜브라에 입단했다는 농담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농담 같지는 않군.’

건물 안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자재가 고급이었다.

언제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

금해준네 자택처럼 재벌가에서나 해놓는 각성자 방호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그녀가 이끄는 <솜브라>는 더이상 이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폐업한 놀이공원에서 숨어서 지내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었다.

한건우는 기특한 소녀 가장을 보는 시선으로 이비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솜브라가 이처럼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건, 90%는 한건우의 공이었다.

나머지 10% 정도는 정남준 대통령의 도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건우과 정남준 대통령은 아무도 모르게 딜을 쳤으니까.

한건우의 요구사항은 단순했다.

앞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할 테니, 비공식적으로 이비현과 솜브라를 묵인해달라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한건우 플레이어가 보증한다면요.

생각 외로 정남준 대통령은 쿨하게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한건우도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이상할 건 없었다.

‘아직 이비현이 그런 쪽으로 유명한 건 아니지.’

한 마디로 이비현은 악질 축에 끼지도 못했다.

한건우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무자비하고 잔혹한 <그림자 왕> 이비현의 존재는 이제 잊어도 될 것 같았다.

이비현은 미등록 각성자들의 대모로 통했다.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게 집과 일자리를 주고, 능력을 발굴해서 적재적소에 써주고···.

칭송하는 말만 들어보면 거의 성녀 수준이었다.

가족처럼 지내는 솜브라의 동료애는 대단했다.

아레스 길드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끈끈했다.

특수안보부의 단속이 약해지고, 미등록자들의 불법 사조직이 기승을 부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많은 미등록자들, 특히 그 중에서도 쓸만한 이들이 솜브라로 자처해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특수안보부의 그 여자는··· 같이 안 온 거죠?”

이비현이 한건우의 등뒤를 살펴보며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이비현이 말하는 건 ‘소소’였다.

본명을 알 수 없는, 모용황의 심부름꾼.

소소는 여러 가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3개의 신분으로는 천망과 특수안보부, 그리고 일본의 야쿠자 조직까지 소속되어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히 모용황의 입김이 들어갔을 것이다.

‘대체 뭐 하는 여자인지.’

본래 국적과 정체도 불분명했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모용황의 사람이었다.

한건우가 모용황을 만나고 온 이후 1년이 흐를 동안.

소소와 접촉하는 일이 많았다.

길드원들은 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비현은 소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비현은 소소라는 여자를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그녀가 특수안보부 요원인 걸 알고는 더욱더 적대감을 드러냈다.

딱 한 번만 암살을 하면 안 되냐고 묻기까지 했다.

“혼자 왔어.”

“다행이에요.”

이비현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장님! 저번에 말씀하신··· 억!”

이비현의 부하가 다급히 뛰어오다가 한건우를 보고 멈춰섰다.

“이, 이분은···.”

한건우는 요새 이런 사람들을 꽤 겪었다.

유명세에도 단계가 있다는 걸, 한건우는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사람들이 얼굴과 이름을 알아보는 정도였다.

연예인이나 공인들을 보는 것처럼.

지금은 그때와는 차원이 달라졌다.

말을 갓 배운 어린아이도 한건우의 이름 세 글자는 알았다.

이비현의 부하는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눈을 부릅떴다.

‘그 유명한 랭킹1위 한건우···. 솜브라에 전속으로 일을 맡겨주는 그분이구나.’

한국에서 ‘랭킹 1위’라는 단어가 갖는 위력은 대단했다.

한국에서 한건우라는 이름은 ‘강함’을 나타내는 하나의 개념처럼 되었으니까.

그는 솜브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한건우가 조직에 얼마나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지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한건우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역시 이비현 대장님··· 대단한 사람과 편하게 지내시네.’

부하의 눈이 반짝였다.

“용건이 뭐죠?”

부하에게 존댓말을 쓰는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럼에도 부하는 아차, 하고 바짝 얼었다.

대장과 손님 앞에서 정신을 놓고 놀라고만 있다니,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군기가 바짝 들었군.’

한건우는 부하와 이비현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이비현은 자기 나이를 끝끝내 비밀로 한 것 같았다.

하루종일 함께하는 부하들에게도 절대 말하지 않았다.

‘이비현이 나보다 한 살 어렸던가?’

아직도 이비현의 정확한 나이를 아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부모처럼 그녀를 키운 전임 대장 유영원과, 그녀의 정보를 알고 있던 한건우.

얼굴만 뜯어보면 어린 티가 나는데도.

솜브라의 소녀 가장, 아니 리더로 살아온 경험, 그리고 냉랭한 느낌 때문에 나이를 알 수 없는 인상이었다.

“얘기하세요.”

이비현의 부하가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대장님께서 말씀하신 아이템이, 블랙마켓의 경매장에 올라왔습니다.”

“지역은요?”

“여기, 서울입니다.”

“뭐죠? 서울 옥션이라면 미리 선금을 주고 빼올 수 있잖아요?”

이비현이 차분하게 따져 묻자, 그녀의 부하가 눈치를 살폈다.

“그게··· 이유는 모르지만 판매자가 뻗대면서 모른 체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큰손이 관여한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얘기하겠습니다.”

요즘 블랙마켓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정교해졌다.

예전처럼 개인 상점의 모임이 아니었다.

경매장과 포털을 중심으로, 블랙마켓의 모든 업소들이 조금씩 자릿세를 내고 있었다.

블랙마켓의 최종적인 주인이라고 할 사람은 따로 없었다.

여러 큰손들이 마켓의 구역을 나눠서 자릿세 겸 보호비를 받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이비현이었다.

이비현은 서울과 부산의 블랙마켓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경매장과 포털은 지분을 가진 큰손들의 공동 소유였다.

그러니 그 정도 입김을 못 낼 것도 없었다.

한건우가 눈짓을 하며 물었다.

“그거 맞아?”

“네. 지난번 의뢰하신 물건요. 비슷한 게 나왔나 봅니다.”

한건우가 이비현에게 따로 부탁한 게 있었다.

어떤 루트로든, ‘석판’ 형태의 아이템이 블랙마켓에 돌아다니는지 잘 보라고.

그리고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무조건 입수하라고.

“같이 가보지.”

한건우가 자리에서 떨쳐 일어났다.

‘이 참에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어.’

*

“옛날 생각이 나는군.”

동묘 구제시장, 진웅상사 옆 남자화장실.

365일 24시간 고장 표시가 붙어있고,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는 칸이 있었다.

바로 플레이어를 위한 지하 암시장, 블랙마켓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서울이 가장 컸고, 주요 대도시에도 자연스럽게 하나씩 생겨 있었다.

삐걱-!

문을 비틀어 열자, 지하로 들어가는 낡은 계단이 보였다.

언제나 비슷한 모습이구나, 생각하는 찰나.

이비현이 한건우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려가 보면 놀라실걸요.”

“음?”

“1년 반 전이었나, 그때 오신 게 마지막이죠? 그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커졌어요.”

계단의 끝, 그녀가 블랙마켓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이비현이 예고했는데도 한건우는 놀랐다.

“!”

원래 서울의 블랙마켓은 자정에 열어 새벽이 되기 전에 파하는 곳이었다.

아직 초저녁인데, 이 안은 별세계처럼 활발했다.

예전의 허름하던 시장이 아니었다.

조명은 똑같이 어두침침했지만, 활기 자체가 달랐다.

그야말로 돈이 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인종이 다양해졌다.

상인 중에도 외국인이 꽤 있었고, 좌판과 진열대마다 당당하게 이계의 물건들을 내놓고 팔고 있었다.

박쥐처럼 생긴 마수를 한약재마냥 말린 것, 특별 취급주의 표시가 붙은 포션 상자. 이리저리 움직이며 숨쉬는 눈알이 담긴 유리병···.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상품들이었다.

한건우가 말없이 놀란 기색을 보이자, 이비현이 조용히 귀띔했다.

“요새 서울의 블랙마켓이 커졌다는 걸 알고, 외국 조직들도 많이 밀항을 들어왔어요.”

서류로는 보고받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더 굉장했다.

한건우는 상점을 하나하나 유심히 구경했다.

그는 긴 로브를 입고 모자를 눌러 써서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요즘은 어딜 가도 한건우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으니, 조용히 움직이고 싶었다.

그럼에도 소매를 붙잡으며 호객하는 상인이나 전단을 뿌리는 직원들은 한건우를 슬쩍 피해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

겉모습으로는 알아볼 수 없도록 철저하게 위장하고, 기운도 잘 갈무리해 숨겼는데. 왜 저러나 싶었다.

“저 때문에 한건우 씨를 알아본 것 같아요.”

이비현이 머쓱해하며 웃었다.

그녀는 블랙마켓에서는 얼굴을 꽁꽁 숨기고 다니지 않았다.

이곳은 떳떳한 곳은 아니지만, 그녀의 삶의 터전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비현의 걸음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말로는 한건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비현을 의식하는 상인들도 많았다.

<진동 감지> 특성 없이도 사람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이비현 님이다.”

“헉, 좌판 빨리 숨겨. 허가 아직 안 떨어졌어.”

“옆에 누구랑 오신 거지?”

“한건우 플레이어 같은데···?”

상인들의 눈에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이비현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아갔다.

많은 인파 속에 저절로 길이 열렸다.

그런 이비현을 지켜보는 한건우의 마음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많이 컸구나.’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모자라.’

어차피 각성자들이 모이는 곳에 암흑 시장이 없을 수는 없었다.

세상 모든 게 공식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

어느 나라든지 블랙마켓은 존재하는 게 그 증거였다.

최근 1년간.

한건우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숨가쁘게 달려왔다.

한국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할 정도로 기반을 다지고, 동북아시아 쪽에도 뻗어나가는 것이 목표였다.

공식적인 힘과 권력 쪽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암흑시장의 자본과 정보의 흐름이었다.

‘거기까지 내가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해.’

한건우가 직접 나서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이비현을 내세워서 전국 블랙마켓의 주인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이었다.

이비현은 블랙마켓의 중심지, 경매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경매장 앞.

감히 그녀를 가로막는 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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