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아르고스의 첫 번째 눈 (4) - 1년 후
“그럼 나머지 3개의 예언 석판을 찾는 게 임무겠군요.”
“우리 아르고스의 지상 목표지.”
모용황이 진솔하게 인정했다.
한건우는 아이템 창의 숫자 부분을 보았다.
[히든 아이템 : 예언 석판(4/7)]
- 황혼의 시간을 멈추는 방법이 담겨 있다.
- ???
아이템 창에서 보듯이, 예언 석판은 총 일곱 조각으로 이뤄져 있었다.
남은 건 세 조각.
“아르고스에서는 균열 발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간 네 조각을 모은 거로군요.”
“그렇네. 첫 번째 조각은 내가 직접 찾았고, 두 번째 조각은 미공략 균열에서 나왔지. 세 번는 동유럽의 지하 경매시장, 그리고 네 번째 조각은 어느 부족장을 죽이고 얻었지.”
모용황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모용황은 모르고 있는 듯했지만, 가장 중요한 열쇠는 한건우에게 있었다.
일곱 개의 예언 석판 중 2개를 이미 한건우가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직 발견되지 않은 1개를 그들이 먼저 찾는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한건우가 가진 조각을 내놓지 않으면, 그들은 허탕만 칠 것이다.
‘하나는 한국의 균열, 하나는 중국의 균열에서 나왔으니. 예언 석판은 전세계의 균열에 흩어져 있는 건가?’
정말 그렇다면 찾기 어려울 만도 했다.
만주의 균열은 원래 미래에 생길 걸 당겨서 연 것이니.
같은 시간대에 7개가 존재하라는 법도 없었다.
몇 년에 걸쳐서 하나씩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건우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잠깐, 석판이 숨겨진 균열이 있다 해도, 석판을 못 찾은 채 공략되어 닫히면 어떻게 되는 거야?’
한건우는 곧 석판이 나온 균열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홍대의 <빙하기의 어둠> 균열···. 처음에 정부 계측기에 잡히지 않는 오류가 있었지.’
홍대 미공략 균열의 등급은 C급이었다.
그런 사고가 없었다면 결코 공략 못 할 정도로 어려운 균열이 아니었다.
‘다른 각성자들이 균열을 정상적으로 공략했다면, 예언 석판은 십중팔구 못 찾았을 거야.’
그랬다면 빙룡의 시체와 이계의 유적지는 영원히 발견되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혔을 것이다. 예언 석판 역시도.
그 다음이 만주의 S급 균열, <황혼의 서리거인>.
한국의 각성자 세력을 재편하려는 아르고스의 음모로 억지로 열렸다.
‘원래대로라면 황무지 한복판에 S급 균열이 열린다는 건데.’
그런 경우에는 미공략 균열로 남을 확률이 높았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그 땅을 버리려 했다.
S급 균열 여러 개가 동시에 터지는 초유의 사태만 아니었다면, 한국도 그냥 국경을 강화하는 정도로 그쳤겠지.
게다가 그 균열의 공략 조건은 서리거인의 왕을 죽이는 것.
서리거인이 안고 잠들어 있던 터라, 발견될 확률이 높은 편이었다.
‘웬만하면 발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일종의 배려를 해주는 건가?’
모용황은 <시스템>을 하나의 코드라고 했고, 예언 석판은 시스템이 주는 힌트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난이도 조정을 해준 걸지도 모른다.
한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임무, 제가 수행하죠.”
한건우가 자신감을 보이자, 모용황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쉬운 과업이 아닐세. 다른 사도들은 수 년이 걸려도 못 이룬 일들이니.”
“해내야죠. 우선 제 구역부터 확실히 수색하겠습니다.”
9번째와 13번째 사도의 구역.
한국과 일본 서부, 그리고 중국 동부를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한건우는 수색 따위를 할 생각은 없었다.
*
아르고스의 첫 번째 눈이자 최초의 주인, 모용황.
모든 메시지를 해독하는 <화안금정>, 그리고 모든 물질을 다루는 권능을 가진 모용황과의 충격적인 조우 이후.
한건우는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끝없이 솟구치다가 처음으로 단단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아르고스, 그리고 모용황이 던진 수수께끼는 꽤 컸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세계선에도 황혼의 시간이 찾아온다는 것.
모용황은 황혼의 시간을 멈추는 방법을 하나 제시했다.
다른 이계에서는 실패한 방법이지만, 자신은 해낼 수 있다고 했다.
그걸 위해서 아르고스는 시스템이 힌트로 주는 예언 석판을 모으고 있었다.
그렇게 용사의 모험담처럼 모든 게 해결되면 좋았겠지만.
모용황은 한 가지 문제를 얘기했다.
우리의 세계선에서 일부를 희생시켜야 할 거라고.
누구를 희생시킬지는 뻔했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각성자 중에서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선별하겠군.’
모용황이 한건우에게 털어놓은 말에 거짓은 없었다.
<거짓 간파> 특성이 꽤 도움이 되었다.
그게 없었다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고민하느라 괜한 시간을 낭비할 뻔했다.
“하···.”
진실이 두렵다는 생각은 처음이었다.
“오빠, 요즘 무슨 일 있어?”
조심히 방문을 연 여동생 지윤이 물었다.
“음, 그래 보여? 괜찮은데.”
한건우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건우에게 그 누구보다 소중한, 하나뿐인 여동생, 한지윤.
천명환의 장난질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났던 지윤이다.
지금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밝고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괜찮다면 다행인데···. 오빠, 잘 해내고 있잖아. 길드 일에 어려운 게 있어도 부담 갖지 마. 귀찮은 건 해준 오빠한테 다 맡겨 버려.”
한건우는 픽 웃음이 나왔다.
지윤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몰라도.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위로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 지윤이가 잘 한다고 하면 그런 거 맞네.”
“아이, 왜 그래.”
지윤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겉으로는 밝은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걱정이 어려 있었다.
“지윤이를 걱정시켰으니 내가 잘못했네. 앞으로는 부담 안 가질게.”
“약속해?”
한건우는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회귀 직후부터 지금까지를 돌이켜보았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새롭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기만 했다.
후회되는 과거를 바로잡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니, 가장 친한 친구이자 부관이었던 임수호가 떠올랐다.
회귀 전에는 형인 임진호를 잃고 어둡게 살아가던 그도, 이제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다.
가끔 까불거린다 싶었지만, 진호와 함께 점점 단단한 어른이 되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임수호와 임진호는 아레스 길드의 기둥 같은 존재들이었다.
한때 한건우의 손에 죽었지만, 이제는 동료가 된 이비현과 은설아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개인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지.’
점점 한건우의 목표는 커졌다.
특수안보부의 실체는 상상보다 더 추악했다.
그에 맞서면서 한건우는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나둘씩 동료가 늘었고, 한건우를 믿고 따르는 부하도 많이 생겼다.
서로 연합할 수 있는 길드도 늘어났다.
‘그게 끝이 아니었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고, 훨씬 깊은 지식을 가져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해답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찾아낼 거야.’
첫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했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적수가 없는 최고가 되는 게 먼저다.’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각성자로서의 무력이었다.
한건우 본인뿐만 아니라 드래곤, 그리고 길드원 하나하나.
지금까지보다 더욱 강해져야 했다.
*
숨가쁘게 1년이 흘렀다.
그동안 예언 석판을 찾겠다는 명목으로, 한건우의 길드는 동북아에 남은 미공략 균열을 거의 쓸어버렸다.
한국의 미공략 균열은 대부분 한건우가 파훼한 지 오래였다. 모용황의 힘을 빌려 일본과 중국에도 세력을 넓힌 것이다.
예전에는 회귀 전 알던 지식을 빌려서 해결했지만.
이제는 거의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한건우와 드래곤 둘만으로도, 대부분의 미공략 균열은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 최강의 길드를 ‘일성’이라고 말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화룡정점을 찍은 건 연말, 한국 각성자 랭킹 산정이었다.
대중과 언론이 주목하는 가운데, 십 년이 넘게 태일제가 지켜오던 랭킹 1위의 자리가 드디어 바뀌었다.
[대한민국 랭킹 1위 : 한건우]
“한건우 플레이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랭킹 순위가 발표될 때.
정남준 대통령이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다.
솔직히 예상하던 바였기에, 한건우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이 랭킹의 순위가 앞으로 꽤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정남준 대통령은 한건우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한건우 덕분에 청와대와 정부 안의 정적을 골라낸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정치적 조언까지도 모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으니까.
“대체 정체가 뭡니까? 이렇게 명망이 높아지시니, 차기 대통령으로 나오시면 큰 위협이 될 것 같습니다. 하하.”
정남준 대통령은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었지만, 한건우에게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연임 성공하셔야죠.”
한건우도 정남준 대통령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이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었다.
수완 없이 정의롭기만 한 정치인인가 했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는 김도경의 부재로 특수안보부가 약해진 틈을 타서, 특수안보부의 권한을 상당히 약화시켰다.
한건우가 도와주기는 했지만, 이능력 특수전단을 완전히 특수안보부의 영향력에서 빼내는 과정만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
한편 태일제와 원유선은 다시 일선에서 물러나서 조용히 지냈다.
거의 은퇴 상태나 다름없이 잠적했다.
그들은 한건우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예전처럼 경쟁적으로 길드 사업을 키우지도 않았고, 한건우의 길드를 견제하려 들지도 않았다.
‘나도 있지만··· 아르고스의 눈치를 보는 모양이군.’
태일제와 원유선 입장에서 보면, 김도경이 한건우로 대체된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김도경을 한건우가 죽였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한건우의 등 뒤에 아르고스가 있다고 믿고 있을 테니까.
한건우는 정남준 대통령과 손잡고, 정부 내에서 특수안보부의 그림자를 지워갔다.
다행히 모용황은 태클을 걸지 않았다.
자기 힘으로 한국 땅을 장악하려는 시도로 보일 것이다.
정부와 의회 같은 공식적인 세력을 제외하면, 한 국가에서 강한 힘을 가진 집단은 손에 꼽았다.
‘각성자를 움직이는 대형 길드, 그리고 자본을 움직이는 대기업.’
금해준의 할아버지가 이끄는 LK그룹은 미공략 균열을 덮는 <피라미드> 내수와 수출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금해준의 할아버지는 건강 문제로 LK그룹에서 은퇴했고, 금해준의 아버지가 물려받게 되면서, 사업 구조도 바뀌었다.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한건우의 입김이 많이 들어갔다.
‘이제 미공략 균열 방어물 수출은 사양산업이 될 겁니다. 신사업을 키우시죠.’
미리 귀띔을 해준 덕에, 타이밍 좋게 사업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에서 그치겠지만, 한건우는 다른 한 가지도 놓치지 않았다
‘블랙 마켓··· 법의 바깥에 있는 지하시장까지 통합해야 해.’
한건우는 마지막으로 이비현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