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아르고스의 첫 번째 눈 (3) - 예언 석판
‘뭐라고?’
한건우는 모용황의 표정을 다시 살펴보았다.
농담인가 싶었다.
그 정도로 어이가 없는 제안이었다.
‘특수안보부의 수장이라.’
특수안보부의 수장이라면, 정부의 기관장 중에서는 비교할 데 없는 최고의 자리다.
현재까지는 언론이나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비밀스럽게 지냈지만.
회귀 전, 특수안보부의 세력이 점차 강해진 이후에는 그 수장도 얼굴을 내놓고 활동했다.
‘그러고 보니 김도경··· 그가 나중에 특수안보부의 수장 자리까지 올랐지.’
특수안보부의 수장 자리.
그것만 준다고 해도 놀라울 판이었다.
그 뒤에 붙은 말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대통령? 그것도 종신직?’
일단 한국의 헌법에 따르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한건우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암울한 14년간의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대통령직은 적어도 겉으로는 멀쩡하게 돌아갔다.
‘정남준 대통령 이후로는 줄줄이 각성자들만 대통령직에 앉기야 했지.’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 말고 다른 이들은 어떤 제안을 받았을까?
한건우가 채 입을 떼기도 전.
주름진 손으로 찻잔을 든 모용황이 한 방을 더 날렸다.
“아르고스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 지하성에 초대되어 그 자리에 앉은 사도들은 몇 안 되지. 그 중에서도 단연컨대 최고의 조건이야.”
“....”
모용황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차를 냉수처럼 들이켰다.
한건우를 바라보는 그의 금안이 유독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자네가 마음에 들었어. 중요한 임무만 잘 수행한다면, 한국에서는 원하는 만큼의 자금과 함께 자율권을 보장해 주지.”
한건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힘을 추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탐이 날 만한 제안이었다.
처음에는 <아르고스>라는 조직이 허술한 게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리 한건우가 특별한 존재라고 한들,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할 조직이 정체를 너무 쉽게 노출한다 싶었다.
물론 김도경은 사도가 되라는 제안을 거절하면 죽이겠다고 경고했다.
사도를 그만둘 경우 배신자로 간주해서 죽이려 들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비밀 결사답게 조금 더 음습한 구석이 있을 줄 알았다.
함구와 속박의 저주를 건다던지···.
실상은 오히려 단순했다.
굳이 주인으로 올라가지 않고 사도만 되어도,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부와 권력이 주어질 판이다.
‘누구도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겠군.’
물질을 자유롭게 바꾸는 모용황의 권능만 봐도 그랬다.
그건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현자의 돌과 같았다.
세상에는 황금보다 더 값비싼 물질도 많으니.
그야말로 돈을 찍어내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땅 밑의 공항, 그리고 황금 지붕을 얹은 ‘지하성’의 비밀이 그거였다.
무한한 자금, 그리고 무한한 힘···.
모용황이 마음만 먹으면, 돈에 깔려 죽을 만큼 자금 지원을 해주는 건 쉬운 일이리라.
‘천망의 미스터리가 하나 풀렸군.’
과연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다 했다.
한건우가 생각에 잠겨 있을 동안, 모용황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한건우가 씩 웃었다.
“역시 싫습니다.”
“...!”
모용황의 옆에 서 있던 소소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한건우가 이처럼 단박에 거절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원하는 게··· 따로 있나? 돈이라면 어차피 원하는 만큼 주어질 것인데.”
처음으로 모용황의 얼굴에 감정이 드러났다.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
“뭐?”
“이룬 것도 없이 보상부터 받아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임무를 말해주십시오.”
어차피 아르고스에서 어떤 미끼를 내걸더라도 그걸 덥썩 받을 마음은 없었다.
특히 모용황이 내건 두 개의 직위는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었다.
특수안보부든, 대통령이든.
한건우가 자연스럽게 무혈 입성하기는 어려울 자리였다.
그 과정이 평화로울 리 없었다.
모용황은 아이에게 장난감을 준다고 약속하는 듯이 쉽게 말했지만.
현실 속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야말로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 피바람 속에서 한건우가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한건우에게 필요없는 자리인 건 물론이었다.
특히 특수안보부가 그랬다.
공격해서 와해시켜야 할 조직이지, 한건우가 차지해야 할 조직이 아니었다.
‘당장 놈을 죽일 수 없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밖에.’
임무라는 건 그냥 주어질 리는 없다.
게다가 이토록 중용하려고 했던 한건우라면.
아르고스의 주인들에게 꼭 필요한 일,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걸 알면, 모든 걸 알 수 있다.’
그런 마음에서 꺼낸 말이었다.
모용황이 보기에는, 한건우가 먼저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겠다고 나선 꼴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던 모용황이 별안간 껄껄 웃어젖혔다.
“늙은이를 놀라게 하는군!”
모용황이 손을 휘휘 저어 소소를 물러나게 했다.
얼마나 대단한 얘기를 하려고 그러나. 한건우는 모용황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모용황이 허공을 향해 손끝을 퉁겼다.
우우웅···.
옥새를 담는 함 같은 것이 나타났다.
화려하게 장식된 아공간 금고였다.
모용황이 금고의 문을 열었다.
“!”
한건우의 시선 끝이 흔들렸다.
그러나 모용황은 그 이유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금고 안에 든 것은 한건우가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밤하늘처럼 새까맣고 매끄러운 금속판.
바로 히든 아이템인 예언 석판이었다.
한건우도 이걸 2개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석판은 홍대의 미공략 균열 안, 이계의 유적에서 발견했다.
두 번째 석판은 만주에서 찾았다.
‘자기 세계의 종말을 기다리며 누워있던 서리거인의 무덤에서 찾았지.’
두 개의 석판을 붙이자, 이음새 없이 하나로 붙어버렸던 기억이 났다.
한건우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검은 금속판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가진 것과는 조금 차이점이 있었다.
‘두께가 달라.’
자신보다 더 많은 석판을 모은 것 같았다.
한건우가 금속판에 손끝을 댔다.
모용황은 그걸 제지하지 않았다.
[히든 아이템 : 예언 석판(4/7)]
- 황혼의 시간을 멈추는 방법이 담겨 있다.
- ???
아이템 창을 보고, 한건우는 적잖이 놀랐다.
‘벌써 석판 4개를 모았군.’
그때 모용황이 설명했다.
“우리 아르고스는 이 나머지 3개의 석판을 찾고 있네.”
“....”
한건우는 그걸 길드 아이템 창고에 넣지 않았다.
모용황과 똑같이 늘 아공간 금고에 넣어서 한건우가 어딜 가든지 함께했다.
지금도 한건우는 예언 석판 2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체를 알 길이 없었다.
“대체 이건 뭡니까? 아르고스에서는 이걸 왜 찾는 거죠?”
모용황의 타오르는 듯한 금색 눈동자가 석판을 바라보았다.
해야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이었다.
“이 석판은 <시스템>이 세계선에 주는 힌트 같은 것일세.”
“...?”
“세상에 균열이 막 열리고, 아무것도 모르던 각국 정부가 군대를 보내 마수와 싸우고 있을 무렵이던가. 우리는 한 균열 안에서 이계의 유적을 발견했네. 거기서 첫 번째 석판을 얻었지.”
모용환의 말을 듣자하니, 그들은 균열이 발생한 초창기부터 함께 손을 잡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전부터 쭉 있던 조직이 커진 걸지도 모른다.
정부나 기업도 상황에 맞게 변하는데, 비밀 결사라고 왜 다르겠나.
“그전까지는 다들 균열이라는 것의 정체를 잘 몰랐지. 단순히 괴물이 나오는 재해라고만 여긴 거야.”
모용황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랜만에 대화 상대를 찾아서 신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유적만 보아도 고등 생명체가 살았던 세계라는 걸 알 수 있었어. 많은 기록이 남겨져 있었고, 우리는 그걸 해독했네. 거기서 많은 이계의 지식을 얻었지.”
한건우가 겪은 일과 비슷한 것 같았다.
그 유적에도 온통 빽빽하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어떻게 해독한 겁니까?”
“나의 <화안금정>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어.”
“화안금정?”
한건우는 모용황의 금색 눈을 유심히 관찰했다.
자신이 가진 <화식조의 눈>처럼, 또 하나의 특성일까.
아니면 눈에 사용하는 아이템일지도 모른다.
“배운 적 없는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만든 거라면, 어떠한 코드나 암호도 해독할 수 있어. 허허, 이런 얘기는 들어도 잘 모르는가?”
“....”
모용황은 끌끌 웃었다.
“이렇게 말하면 관심이 생기겠군. 이 <시스템>을 이루는 코드까지도 말이야.”
“예?”
인간이 시스템의 코드를 해독할 수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자네는 각성자 등록이나 관리를 맡은 기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 적이 없는가?”
“...무슨 뜻입니까?”
“각성자는 <시스템>의 메시지를 볼 수 있지만, 아무런 권한이 없는 사용자일 뿐이야. 시스템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지. 그런데 어떻게 일부는 관리자의 권한을 가지냐는 말이지.”
“각성관리청을 말하는 겁니까?”
“한국은 그렇고. 중국도 비슷하지. 민간에 관리 권한을 준 경우도 있지만 결국 다 비슷한 셈이지.”
한건우는 머릿속에 큰 종이 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본능은 벌써 해답에 이르렀지만, 이성은 아직 설명을 듣고 싶어했다.
“그 권한을··· 당신이 주었다는 겁니까?”
“우리 아르고스가 주었지.”
모용황이 벽에 걸린 홀로그램 지도를 가리켰다.
한건우는 세계 지도를 채운 불빛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아르고스의 망에 등록된 각성자들.’
한건우 자신도 저 불빛의 일부인 셈이었다.
그때 한건우의 뇌리에 떠오른 건 바로 미등록자.
특히 이비현과 유영원의 얼굴이었다.
처음에 이비현이 한건우의 각성자 등록을 말렸던 게 떠올랐다.
구체적인 이유는 그녀도 말하지 못했지만.
‘뭐, 음모론자는 아니었군.’
아르고스는 세계의 모든 각성자들을 등록하고 관리하는 망을 만들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의문점은 한 가지로 좁혀들어 갔다.
아공간 금고가 무게가 느껴질 리 없건만.
두 개의 석판을 담은 한건우의 아공간 금고가 갑자기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건 예언 석판과는 무슨 관계가 있죠?”
“황혼의 시간을 잘 넘기기 위한 준비 작업이지.”
한건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황혼의 시간이라면, 세계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죠?”
“역시 알고 있군!”
모용황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황혼의 시간이 오면, 우리의 세계선도 저물지. 산산이 파괴되어서 균열의 일부가 되고, 결국 닫히는 거야.”
“....”
이 지구도 나중에 어딘가에서는 균열 속 이계가 되고, 여기에 사는 사람과 동물들도 마수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일까?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여러 이계에서 실패한 과업이지만, 우리는 해내야지.”
모용황의 얼굴에 담담한 의지가 떠올랐다.
“....”
한건우의 마음속에 당겨졌던 불씨가 조금 식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는 어떻게 아르고스의 주인들을 사냥할지에 대한 구상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너무 거대한 담론을 접하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이들을 막는 게 옳은 건가?’
만약 아르고스가 나아가는 방향이 옳다면?
자신 때문에 지구에 황혼의 시간이 오는 게 빨라지거나, 막지 못하게 된다면?
한건우는 제한된 정보 안에서 갈등했다.
그러다 모용황의 말 속에서 뭔가가 거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황혼의 시간을 ‘잘 넘긴다’는 건 정확히 무슨 말입니까?”
“인간의 힘만으로는 황혼의 시간에 대응하기 어려울 거야. 나만큼 강한 각성자라도 마찬가지지.”
“그러면...?”
모용황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의 세계선에서 일부를 희생시키면 되지.”
“....”
“그때를 위해 모든 절차를 다 준비했지만, 마지막 단계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어. 예언 석판을 전부 모아야 알 수 있을 거네.”
한건우는 슬쩍 웃음이 나왔다.
‘이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괜한 고민을 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