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아르고스의 첫 번째 눈 (2) - 지도
선명한 금안을 가진 노인이 한건우를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 아르고스의 다섯 주인 중에서 가장 강한 분···.
김도경의 비서가 방금 이렇게 말했다.
‘이 자가···.’
언뜻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노인이었다.
등과 목은 구부정하고, 얼굴은 쪼글쪼글하게 주름져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황금을 두른 궁궐의 주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빈틈이 하나도 안 보인다!’
한건우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사로서 살아왔다.
전투 계열의 각성자로, 군인으로, 그리고 길드 마스터로서.
셀 수 없이 많은 적들과 사선에서 싸워왔다.
상대방 중에는 마수도 있었고, 각성자도 있었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다.’
회귀 전, 지금처럼 강하지 않던 시절, 무척 강한 각성자를 마주쳤을 때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인간이 아니라 대자연의 일부를 맞닥뜨린 듯했다.
턱없이 막막한 감각에 한건우는 압도당했다.
“각성자 한건우, 나의 지하성에 온 것을 환영하네.”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건우를 부르는 호칭이 독특했다.
익숙한 말투이기도 했다.
“당신이 아르고스의 첫 번째 주인입니까?”
“그렇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도경의 비서, 소소의 한쪽 눈을 통해 이야기했던 그 자였다.
‘설마 이런 노인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노인이 고송의 나뭇가지를 쥐었다.
또 가지치기를 하려나 싶은 순간.
스윽-
나뭇가지에 돋아난 솔잎이 모두 황금으로 변했다.
“!”
색깔만 바뀌거나 눈속임을 한 것이 아니었다.
물질을 이루는 성분 자체가 바뀐 것이었다.
촤라락-
정원 한가운데에 선 노인을 중심으로, 정원의 모든 풀잎과 나뭇잎이 한 번에 황금으로 바뀌었다.
지하의 바람에 날리던 여린 잎들이 모두 황금이 되어 꼿꼿이 굳었다.
아무 데서도 볼 수 없는 찬란한 황금의 정원이었다.
노인의 행동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스스스···..
황금의 정원을 이루던 수십만 개의 이파리가 한순간에 검은 흙으로 변해 파스스 흩어졌다.
잎이 흙먼지로 돌아가나 싶었던 순간.
화악!
검은 흙은 불꽃으로 바뀌어 불타올랐다.
궁궐의 정원에는 한겨울이 온 것처럼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었다.
고송의 나뭇가지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을 털어냈다.
한건우의 눈이 흔들렸다.
‘별로 힘을 쓰는 기색도 없었어.’
노인은 손길 하나, 눈빛 하나만으로 물질을 이루는 원소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나무를 황금으로, 황금을 흙으로, 흙을 불로···.
태일제처럼 같은 금속을 고체에서 액체로 바꾸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어느 하나의 원소에 구애받지 않았다.
모든 물질을 신처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왜 이들을 따르는 자들이 ‘사도’인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한건우는 노인의 능력을 주시했다.
‘이게 이 자의 특성? ...아니야.’
저건 특성 수준이 아니었다.
‘권능이다.’
한건우 자신도 악마의 권능인 <탐식>을 가지고 있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자는 정말로 강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기는커녕, 상대방의 깊이조차 알 수 없었다.
아르고스의 다섯 주인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게 이런 의미란 말인가.
한건우는 심해의 해구를 앞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깨부터 주먹까지 힘이 꽉 들어간 한건우를 뒤로 하고, 노인이 뒷짐을 지고 돌아섰다.
노인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궁궐 정원을 둘러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손님에게 구경거리가 좀 되었나?”
“...훌륭했습니다.”
그건 진심이 담겨있었다.
노인이 껄껄 웃으며 돌아섰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모용씨의 59대 직계 가주, 황이라고 하네.”
“...?”
한건우는 배움이 깊지 않았으나, 중국의 모용이라는 성씨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 직계 후손이라면 대단한 명문가겠지만.
한건우에게 딱히 의미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중국 <천망>의 수장이자, 모든 물질을 지배하는 권능이 있고.”
“...!”
노인은 엄청난 말들을 대수롭지 않게 주워섬겼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자네에게 의미 있는 건 이것이겠지.”
노인, 모용황이 손가락을 퉁겼다.
정원 안쪽의 황금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스르륵 열렸다.
모용황은 흙 묻은 손을 옷에 털어내며 앞장섰다.
모용황을 따라 들어간 궁 안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현대식 건물이라는 뜻이었다.
벽 한쪽에는 영화관처럼 널찍한 화면도 보였다.
‘세계 지도로군.’
화면에는 한 눈에 전 세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홀로그램 지도가 떠올라 있었다.
지도의 각 대륙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그만 불빛이 촘촘하게 빛났다.
지도를 뒤덮은 빛무리는 바닷물 속에서 발광하는 미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모용황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게 바로 아르고스의 첫 번째 눈이자 최초의 주인, 모용황이 보는 세상이네.”
한건우는 작은 불빛들로 빛나는 지도 앞에 섰다.
가장 먼저 한국을 찾아보게 되었다.
한국에는 어느 정도 빛무리가 보였다.
아시아와 유럽, 남미대륙에는 수많은 빛무리가 몰려 있었다.
호주나 북미 대륙은 거의 암전이었다.
그저 장식은 아닌 것 같았다.
‘호주와 북미는 지금 이미 마수들에 의해 점령당해서 불모지가 되었다고 들었어.’
짚이는 것이 있었다.
한건우는 자신이 지나온 궤적을 살펴보았다.
유독 불빛이 몰려있는 건 서울과 같은 대도시.
울릉도에는 거의 불빛이 없었고, 대마도도 암전이었다.
7룡성이 있던 함경도 쪽도 희미했다.
만주 땅도 거의 어둠에 가까웠다.
지도를 바라보던 한건우가 물었다.
“이 빛은··· 사람을 뜻하는 겁니까?”
모용황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지구는 사실 균열 안이나 다를 바 없다네. 시스템의 명령만 잘 수행하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걸 얻어 나올 수 있지.”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세계를 정복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허허···.”
모용황이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화아악!
모용황의 금안에서 엄청난 마기가 뻗어나왔다.
황금을 녹인 듯한 홍채 속, 검은 동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가 수축되었다.
“윽···.”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우우웅-
한건우는 중력 역가중으로 압박을 버텨냈다.
전에 한 번 겪어봤으니, 계속 준비하고 있던 특성이었다.
터엉!
터어엉!
보이지 않는 마기가 자신을 압박하며 내리눌렀다.
자칫하면 무릎을 꿇게 될 판이었다.
“크윽···.”
한건우는 이 힘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모용황이 자신의 권능으로 공기의 무게를 극도로 무겁게 해서 짓누르는 것이었다.
모용황은 그 채로 뒷짐을 지고 등을 돌렸다.
그가 지도가 떠오른 화면을 바라보았다.
“세계 정복? 허허···. 그래, 그런 걸 꿈꿀 때도 있었지.”
터엉-
한건우의 온몸 근육이 압력에 맞서 팽창했다.
세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제자리에서 버티는 건 한계였다.
“우리는 그걸 이미 수십 년도 더 전에 이루었네.”
스으으으···.
압박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이 지구는 우리 아르고스의 사유지야. 일종의 농사일이라고 생각하게. 땅에 씨를 뿌리고, 해충을 쫓고, 수확물을 거둬야지.”
모용황이 수염을 매만졌다.
그가 선택한 단어 하나하나에 한건우는 극심한 거부감이 일었다.
한건우가 이를 악물었다.
‘이럴 수가···.’
한건우는 아르고스의 주인이라는 자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자신보다 약하다면 문제될 게 없고, 설령 강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신이 아닌 인간인 이상 약점이 있기 마련.
약점이 있다면 그걸 파고들어서 이길 수도 있을 거라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한건우는 회귀 이후 연전연승, 패배를 모르고 승리만 거둬왔다.
가장 어려운 균열들을 공략하고, 공포스러운 마수 앞에서도 겁먹지 않았다.
그뿐인가.
각성자 중에서 가장 완력이 세다는 박이경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랭킹 2위인 김도경을 두 번이나 압도적인 격차로 꺾었다.
랭킹 1위인 태일제, 랭킹 3위인 원유선이 있지만, 그들과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올해 말, 한건우가 랭킹 1위를 달성할지 몰랐다.
그러나 모용황은 격 자체가 달랐다.
한건우가 이제껏 만난 각성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안 돼.’
한건우는 뼈아프게 느꼈다.
오랜만에 느낀 자신의 부족함.
몹시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의지를 불타게 만들었다.
긴말할 필요 없었다.
한건우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모용황이 여기에 자신을 부른 목적이 있었다.
“그걸 위해··· 사도가 되기 위한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김도경을 죽이라는 것.
그건 아르고스의 첫 번째 눈이 요구한 자격 조건이었다.
성공만 하면, 한국과 일본 서부, 중국 동부 지역을 전부 맡긴다고 했다.
“그래. 우리는 모두 놀랐네.”
모용황이 말을 이었다.
‘우리’라는 말에 한건우는 절로 긴장했다.
“9번째 사도, 특수안보부의 김도경. 자네를 만나 판단력이 흐려지기 전에는 내가 아끼던 아이였지.”
“....”
“13번째 사도. 흑천회의 검귀. 그리고 천망의 당련화. 모두 뛰어난 아이들이었어.”
모용황은 그들의 죽음이 몹시 안타깝다는 투였다.
한건우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저에게 그들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복수? 허허허.”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200년 가까이 살아오다 보니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 않는데. 자네는 정말 재미있어. 그리고 정말로 아쉬워.”
“그건 무슨 말입니까?”
200년 가까이 살았다는 건 터무니없는 허풍 같았다.
아무리 강한 각성자라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노화, 그리고 죽음이었다.
노화가 없다면, 각성자의 경험치가 오를수록 무한히 스탯이 강해질 것이다.
힐러의 치유 능력으로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면, 영생을 사는 이도 나타날 것이다.
자신이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기꾼은 넘치도록 많았다.
실제로는 아무도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모용황이 듬성듬성 난 흰 턱수염을 문지르며 금안을 빛냈다.
그가 안타깝다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네가 조금만 일찍 태어났다면 좋았겠어. 어쩌면 우리는 함께 아르고스의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한건우의 눈이 빛났다.
아르고스의 다른 주인이 어떤 자들인지 알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다 모용황 정도로 강한 것일까?
한건우는 조금 돌려서 물어보았다.
“김도경이 말하기를, 사도가 주인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아니겠나? 이 세상에는 능력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지.”
“....”
그때 소소가 다과상을 직접 들고 들어왔다.
어느새 몸에 달라붙는 차이나 드레스 차림이었다.
매번 다른 사람처럼 변신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모용황이 다과상 앞에 앉았다.
“특수안보부의 서울지부장. 그 자리를 맡게.”
“!”
찻잔을 따르던 소소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찻물을 이어 따랐다.
한건우는 소소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모용황을 마주보았다.
“거절합니다.”
“허, 건방지군.”
“....”
“좋아, 9번과 13번 사도를 겸하는데, 같은 위치에서 놀 수는 없지.”
모용황이 장난스럽게 킬킬 웃었다.
그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특수안보부의 수장 겸 한국의 종신 대통령. 그 자리는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