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아르고스의 첫 번째 눈 (1) - 자금성
균열을 나오기 전.
드래곤 주위의 공간이 일렁였다.
다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아빠, 나 안아줘!”
발을 동동 구르는 드래곤을 잡아서 번쩍 안아들고, 한건우는 균열 입구로 성큼 발을 옮겼다.
슈우우-
균열을 나오자, 인적 드문 야산의 풍경이 펼쳐졌다.
한건우는 균열 앞을 지키던 구조대원들을 살펴보았다. 언뜻 보기엔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한건우 플레이어, 감사합니다.”
사람 좋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지만, 한건우는 미묘한 차이점을 알아보았다.
‘아직 초점이 풀려 있군.’
원유선이 정신을 건드린 여파가 남아있는 듯했다.
구조대원의 수도 한 명 줄어 있었다.
심리 조종에 걸리지 않은 대원을 제거한 모양이다.
김도경이 이렇게 철저하게 움직여준 덕분이랄까.
김도경과 련화의 행보는 비밀에 부쳐질 수밖에 없었다.
스스스스···.
해결된 균열이 닫혔다.
한건우가 김도경을 죽였다는 증거도 영원히 사라졌다.
두 사람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이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원유선.
그리고 원유선과 달리 관여를 피했던 태일제
둘 다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사람들은 아니었다.
‘굳이 입을 막을 필요는 없겠어.’
김도경은 공식적으로 사망이 아니라 실종 상태가 되었다.
그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그 사실을 대서특필하는 언론도 없었다.
각성자에 대한 뒷소문을 다루는 찌라시에서만 비밀스러운 소식이 오갔다.
[랭킹 2위 K, 하루아침에 증발. 익명의 정보에 따르면 큰 이적료를 받고 중국으로 망명했다는 소문도.]
한건우는 휴대폰을 확인하면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광휘의 성기사>라는 별명과 흠잡을 데 없는 매너로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김도경이었다.
그런 그에게 반감을 갖는 세력도 있었던 모양.
알아서 악의적인 루머가 생겨나고 있었다.
한건우는 이비현을 불렀다.
“이거 너희 솜브라에서 작업한 건 아니지?”
“아니예요. 정부인사 이야기는 한건우 씨 허락 없이는 안 건드리죠. 라이벌 조직에서 한 거 같아요.”
한건우는 다른 지점에서 놀랐다.
“라이벌? 너희가 아직도 라이벌 조직이 있어?”
국내의 정보 조직 중에서는 이제 솜브라가 원탑이었다.
미등록자 조직만이 가지는 경쟁력이 있었다.
바로 어디든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숨어들 수 있다는 것.
이비현은 한건우의 길드에 편승해서 그야말로 날아올랐다.
거기에 만족해도 되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기존의 고만고만한 정보 조직과는 달리 체계적이고 철저하게 조직을 운영했다.
이비현은 조직을 키우는 데 목숨 바친 사람처럼 지냈다.
전국 블랙마켓에서 솜브라의 정보를 통하지 않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한건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음··· 한국에는 없구요. 제가 보기엔 중국발 정보예요.”
“그렇군.”
이비현이 한건우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한건우 씨, 김도경은 제가 생각하는 게··· 맞죠?”
“그래.”
이비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예상이 맞아서 기분 좋은 건가 했더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고마워요.”
“네가 왜?”
“그렇게 되었어야 할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한건우 씨가 그만큼 강하다는 게 기뻐서요.”
이비현은 말하다가 스스로 어색해진 듯했다.
가끔은 보면 수줍은 소녀 같은 그녀였다.
이런 그녀가 미등록자 조직의 수장이라는 게 안 믿길 때가 있었다.
한건우가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습관이 든 행동이었다.
“부탁이 있어서 불렀어.”
“뭐든지. 말만 하세요.”
“루머라는 건,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라고 하더라.”
“그렇죠.”
“이런 루머가 나왔다는 건, 김도경이 알고 보니 국가의 배신자였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흥미를 끈다는 거야.”
“네.”
김도경이 죽고 나서 남아있을 일말의 영향력.
그리고 혹시나 특수안보부에서 그를 국가를 위한 희생자로 작업하지 못하도록.
한건우는 그걸 차단할 생각이었다.
“비공식 정보 하나만 풀자.”
*
[실종된 랭커 K, 만주 사태 관련해서 중국 측과 담합한 이적행위가 밝혀져 정부 수사 중 잠적했다는 소문.]
[그전부터 중국 첩보조직과 무척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만년 2위인 자신의 랭킹에 불만을 가져, 비인증 약물로 사고사했다는 소문도.]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던가.
씨앗을 한두 개 뿌렸을 뿐인데.
비공식적 루트를 타고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제는 한건우가 사람들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 말에 반박할 사람이 없었다.
본인이 등판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특수안보부 조직도 아무 대응 없이 잠잠했다.
‘딱히 대처하기도 애매하겠지.’
뜬구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뒷세계의 소문.
공식적으로 대응하는 건 오히려 관심만 키워줄 가능성이 컸다.
실종된 김도경의 이름이 오명이 되어갈 무렵.
한 여자가 한건우를 찾아왔다.
죽은 김도경의 비서였다.
이번에는 당연하다는 듯 조수석에 타 있는 그녀의 모습에 한건우는 어이가 없었다.
“한건우 씨, 반가워요. 절 기다렸나요?”
“비서 일은 그만두었나?”
여자가 생긋 웃었다.
“덕분에 새 상사를 모실 것 같아요. 9번째 사도를 없애는 데 성공하셨더군요.”
“그렇다.”
9번째 사도라면 김도경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도가 될 자격을 증명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루만 시간을 내주실까요?”
“물론이지.”
드래곤도 길드원도 근처에 없는 상태.
한건우는 혈혈단신이었다.
‘혼자 가야 하는 곳이야.’
드디어 <아르고스>의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비서를 통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바로 그 자.
황금빛의 눈과 기계음을 닮은 목소리.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나이도, 성별도, 얼마나 강할지도.
여자의 차로 갈아탔다.
그녀가 향한 곳은 공항이었다.
“?”
아무나 비행기를 타고 자유롭게 해외를 다니던 시대는 옛말이었다.
국경 간의 장벽이 높아진 지금. 외국에 가려면 정부의 심사를 거쳐서 포털을 이용해야 했다.
공항에 가는 게 도리어 드문 일이었다.
“지금 가려는 곳 근처에는 포털을 연결해놓지 않았어요. 전용기가 제일 빨라요.”
“전용기?”
그녀가 이끄는 대로 가니, 별다른 심사도 없이 출국장을 통과해 전용 제트기에 탈 수 있었다.
한 번 이륙하는 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는 마정석 제트기. 그 안의 좌석은 고작 다섯 개뿐이었다.
한건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행기가 출발했다.
군용 헬기에는 익숙했으나 호화롭게 꾸며진 전용기는 영 낯설었다.
‘승객은 2명뿐인데, 승무원만 여럿이군.’
그들은 한건우가 누군지 알아보면서도 전혀 놀란 티를 내지 않고, 가면처럼 친절한 미소만 띠었다.
서비스는 부담스러울 만큼 친절했다.
금해준과 함께 다니느라 VIP 대접에 익숙했지만, 그것보다 한술 더 떴다.
“한건우 님, 음료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먼저 부르기 전에는 쉬셔도 됩니다.”
승무원들을 물리고, 한건우가 여자에게 물었다.
“목적지는 어디지?”
“북경입니다.”
대답을 들으리라 기대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순순히 대답이 나온데다, 그 내용이 뜻밖이었다.
“북경?”
“예, 맞습니다.”
중국은 하도 영토가 넓어, 국토 전체를 다 촘촘하게 방어하지는 못했다.
몇몇 도시와 도시 사이를 잇는 경로 말고는 마수가 돌아다니는 황무지가 더 많았다.
중국의 옛 수도, 북경도 그런 신세였다.
새 수도는 상해에 있었고, 북경은 버려진 땅이었다.
균열 발생 초기에 미공략 균열이 집중적으로 터져, 지금은 사람이 살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
“북경은 지금 폐허 아닌가?”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아닙니다.”
“그러면?”
“아르고스의 다섯 주인 중에서 가장 강한 분이 살고 계시죠.”
한건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아르고스의 ‘주인’이라 칭하는 자가 5명이라···.’
김도경이 보고하던 걸 떠올려 보았다.
5명의 주인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뜻을 함께하는 것 같았다.
한건우는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추측해보았다.
각국 정부의 배후에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걸 보면···.
‘다섯 명 모두 외국인이고, 아마도 균열 발생 초기에 각성한 각성자가 아닐까?’
“...곧 만나게 되겠지. 그럼 당신은 뭐지? 김도경과 같은 ‘사도’인가?”
그녀는 오묘하게 웃었다.
“사도는 아닙니다. 그저 오늘 만나뵐 주인의 은혜를 입고 심부름을 도울 뿐이죠.”
“....”
“그러니 앞으로 저를 편안하게 대해주세요.”
여자가 독이 든 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를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당신 이름은 뭐지?”
“소소라고 부르시면 돼요.”
“....”
누가 봐도 가명 같았다.
여자는 가명인 티를 안 내려는 노력조차 안 했다.
쿠우우-
제트기가 하강하고 있었다.
전용기의 창을 올리자 구름 사이로 황폐화된 땅이 내려다보였다.
북경은 그야말로 마수의 땅이 되어있었다.
미공략 균열을 덮은 피라미드는 이미 부서졌고, 그 틈새로 이계의 덩굴식물이 뻗어나오고 있었다.
‘이런 데 어떻게 착륙을 한다는 거지?’
궁금해하던 순간.
드르르르···
전방의 땅이 좌우로 깔끔하게 갈라졌다.
“!”
지상에 무저갱의 지옥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마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갈라진 땅 사이로 떨어졌다.
슈우우웅-
제트기는 그대로 열린 땅 사이로 들어갔다.
땅속에는 비행기 활주로가 펼쳐져 있었다.
한건우가 뭔가를 보고 진심으로 놀란 건 오랜만이었다.
탓-
쿠우우···.
솜씨 좋은 기장이 제트기를 부드럽게 착륙시켰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한건우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
드르르르···.
일자로 열렸던 땅이 다시 닫히고 있었다.
아래에서 보니, 조명이 달린 격납고 천장처럼 보였다.
‘지하에 공항이 있다고?’
따져 보니 어딘가에 있을 법한 시설이었다.
지상보다 훨씬 안정적일 테니까.
한건우는 침착을 되찾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그는 이번에야말로 놀랐다.
눈앞에 화려한 황금색 성채가 보였다.
세상에 없는 자금성을 그대로 되살려서 지하로 옮겨놓은 듯했다.
한건우는 여자를 지나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갔다.
자금성과 비슷한 성채 앞에는 소리 없이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롱한 광채로 빛나는 수은의 강이었다.
“이건 정말, 놀랍군.”
황금색 지붕과 지붕이 이어져 끝없이 이어졌다.
순수한 감탄이 나왔다.
그러나 관광을 온 게 아니니, 경계를 놓을 수 없었다.
‘혹시?’
한건우는 마력을 운용해보았다.
청와대처럼 각성자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호시설을 해놓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시 몰라서 시스템 창까지 켜보았다.
모든 건 외부와 똑같이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각성자가 얼마든지 힘을 쓸 수 있는 환경이라는 소리다.
오히려 자신감이 느껴졌다.
‘이 궁궐의 주인은, 누가 쳐들어오든 상관 없다는 뜻인가?’
끼이이-
궁궐의 대문이 열렸다.
소소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앞장 서서 길을 안내했다.
‘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건물도 건물이고, 꽃나무와 화초로 가득한 정원이 끝간 데 없이 넓었다.
이걸 유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상주하는 인력도 상당하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이라고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조금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염라대왕의 성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아르고스의 주인이라는 것들은··· 자의식 과잉이 상당히 심한가 보군.’
설마 황제의 복식을 걸치고 보석 왕좌에라도 앉아있는 건 아닐지. 진지하게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근처에 각성자의 기척은 안 느껴지는데···.’
각성자는커녕 사람의 기척조차 없었다.
고송 아래를 지나던 한건우가 제 자리에 멈춰섰다.
웬 구부정한 노인이 고송의 나뭇가지를 손질하고 있었다.
‘이놈이구나.’
무생물에 가까울 정도로 옅은 기척.
자신의 기척을 완벽하게 숨긴다는 건, 반대로 대단히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서걱.
고송의 나뭇가지가 잘려 떨어졌다.
정원 가위라도 들고 있다 했지만, 노인은 맨손이었다.
노인이 천천히 한건우를 돌아보는 순간.
주름진 눈꺼풀 밑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번쩍였다.
“!”
한건우의 온몸에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