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습격 (7) - 빛의 군주
우웅-
김도경에게 빛의 입자가 몰려들었다.
균열이 한층 어둑해져 저녁이 온 듯했다.
김도경이 다루는 빛이 응축되면서, 파괴 광선은 더욱 검어졌다.
그 과정에서 김도경의 신체는 계속 손상되었다.
김도경은 자신의 몸을 빛의 힘에 내어준 것 같았다.
마치 전구의 필라멘트처럼, 자신을 사르는 빛에 소모되었다.
“크아악!”
검은 수포와 외골격으로 뒤덮인 김도경이 짐승처럼 포효했다.
련화가 만든 무시무시한 약물의 부작용일까.
왼손의 상처는 또다른 문제였다.
마창 게이볼그의 날을 맨손으로 잡은 탓이었다.
꿀럭, 꿀럭.
상처에서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계속 검은 물질이 새어나왔다.
‘얼마 버티지 못하겠군.’
한건우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슈웅-
더욱 선명해진 파괴 광선이 허공을 갈랐다.
공간에 일자로 된 검은 선을 긋는 것 같았다.
한건우는 인정했다.
‘정말 강력한 공격이군.’
김도경은 균열의 빛 입자를 있는 대로 흡수했다.
지금의 김도경은 태일제가 아니라, 그 어떤 랭커가 와도 제압하지 못하리라.
‘생각을 바꿔야겠어.’
한건우는 이제까지 꼭 필요한 싸움만 하는 편이었다.
물론 안정을 추구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위험을 감수했지만.
그건 계산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가장 적은 희생으로 최대한 많은 보상을 얻어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건우도 달라져야 할 것 같았다.
‘원소 계열 특성 중에서 가장 강한 건 빛, 그리고 어둠이라고 했지.’
그 무엇보다 빠르고 강한 원소가 빛이었다.
환경의 제약조차 없었다.
<빛의 군주>라는 특성의 극의로, 어둠까지 이르게 된 김도경. 끔찍한 괴물처럼 변해 버린 그였다.
그런 김도경을 쉽게 이기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상성이 맞는 특성이 있다면 꺼내 쓸 텐데.
아무것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문제가 복잡할수록 결론은 단순하게 내야 한다.
한건우는 결심했다.
‘정면으로 부딪친다.’
원소 계열의 특성은 한건우도 있었다.
한건우의 창에는 두 가지 원소의 특성이 중첩되었다.
<아그니의 화염>의 불.
그리고 <인드라의 뇌전>의 전기.
둘 다 한건우가 가장 자신있고 강하게 쓰는 힘이었다.
파지지직···.
한건우의 창 전체에 타오르는 화염과 전격이 튀었다.
이 힘을 다른 무기에 싣는다면, 무기 자체가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버릴 것이다.
신화급 무구인 마창 게이볼그는 중첩된 특성을 든든히 버텨냈다.
화악-
한건우는 타오르는 창과 일체화가 된 듯.
날개를 바짝 붙여 접으며 빠르게 몸을 날렸다.
아까 드래곤이 보여준 동작 그대로였다.
그의 몸이 거대한 하나의 창처럼 쏘아졌았다.
쉬이익-
한건우가 파괴 광선의 궤적을 피하며 나선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는 괴물이 된 김도경의 코앞까지 파고들어갔다.
“!”
한건우는 이성을 잃고 뒤집어진 핏빛 눈을 마주했다.
김도경의 오른팔에서 뻗어나온 파괴 광선이 한건우를 내리치려 했다.
‘빛의 속도는 빠르지만, 파괴 광선은 그렇지 않지.’
파괴 광선은 100미터 길이의 검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위력은 무섭지만, 주인의 움직임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 찰나.
한건우의 창끝을 타고, 신의 분노와 같은 불타는 전격이 떨어졌다.
번쩍!
콰르릉-
콰아아아-
“!”
“크어억.”
치이이익···.
김도경이 입을 벌렸다.
그의 몸통에 시커먼 구멍이 파여 있었다.
휘이이-
김도경이 바람개비처럼 핑그르르 돌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퍼억!
수박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김도경의 손발이 꿈틀거렸다.
놀랍게도 아직 그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검은 수포가 부글거리며 김도경의 온몸을 뒤덮었다.
이제 멀쩡한 피부가 남아있지 않은 지경이었다.
한건우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회귀 전에 본 김도경이 떠올랐다.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마흔이 될 무렵, 특수안보부의 수장까지 올랐던 김도경.
이미 특수안보부가 전면에 나서서 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때의 김도경은 아득하리만큼 강해 보였다.
고개를 들어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높은 산이었다.
깊이를 몰라 건널 수 없는 깊은 바다였다.
약자가 보는 강자는 그랬다.
위엄 있고 신비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한건우는 머리 속에서 과거의 김도경을 지웠다.
알고 보니 그는 유치하고도 비겁한 자였다.
자기의 특별함을 증명하기 위해.
무한한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무고한 이들을 서슴없이 희생시켰다.
특수안보부에 김도경이라는 자가 없었다면, 한건우가 아는 수많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쓰러진 김도경이 한건우를 향해 괴물의 팔을 뻗었다.
파앗-
메테오와 같은 빛의 구체가 쏘아졌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위를 향했다.
그러나 그건 최후의 발악에 불과했다.
빛의 위력은 턱없이 약해져 있었다.
한건우는 김도경의 공격을 피하지도 않았다.
한건우가 마창 게이볼그를 뒤로 당겼다.
투창을 준비하는 자세였다.
허공을 날고 있는 터라, 발을 받칠 땅이 없었다.
그러나 상체의 힘만으로도 충분했다.
한건우의 등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던지는 움직임을 따라 팔 근육에 힘줄이 돋아났다.
피유우우-
어둑해진 균열 속.
푸르게 불타는 창이 아래로 떨어졌다.
한 각성자가 던진 창이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신이 내린 재해 같았다.
콰아-
피할 수 없는 창은 김도경의 몸통을 꿰뚫었다.
파직-
화아아아-
푸른 전류가 튀었다.
그와 함께 열기가 극도에 달해 청백색을 띄는 마력의 화염이 김도경의 전신을 휘감았다.
“크아아악!”
김도경이 창에 뚫린 채로 몸부림쳤다.
그의 몸속을 채운 검은 액체가, 별개의 이성을 가진 괴물처럼 움직이며 용을 썼다.
청백색의 화염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재로 만들었다.
용광로보다 더한 빛과 열기가 한건우에게까지 전해졌다.
슈웅- 탓!
한건우가 땅에 내려갔다.
김도경이 있던 자리.
한 더미의 검은 재가 쌓여있을 뿐이었다.
[악마의 권능(유일) 발동 : 탐식]
- 죽인 자의 특성을 흡수합니다.
- 특성 흡수 중
···
띠링-
전에 없던 알림음이 들렸다.
[(주의) 흡수 중인 특성에 상태이상 존재]
- 인간의 신체로 흡수할 경우 상태이상이 유지됩니다.
- 계속하시겠습니까? (Y / N)
“상태 이상?”
한건우는 새로운 메시지를 보고 당황했다.
위험을 경고해주다니, 시스템이 이토록 친절한 줄은 처음 알았다.
한건우는 시스템 메시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특성에 상태이상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던가.
‘김도경이 그렇게 된 게··· 특성 상태이상 때문이었다는 건가.’
자신의 특성을 감당하지 못해 괴물로 변해버린 모습.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었다.
‘특성에 잡아먹힌 자···.’
특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에 취해버리는 현상.
각성자 본인의 스탯보다 특성이 더 강해질 때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라면, 이건 인공적인 것 같았다.
아마 련화의 짓이겠지.
‘특수안보부의 비밀 연구소에서 죽은 조승재도, 이런 상황이었을까?’
한건우의 시선이 시스템 메시지를 씹어먹을 듯 불타올랐다.
‘인간의 신체로 흡수할 경우 상태이상이 유지된다고···.’
한건우는 스스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지금 자신이 백 퍼센트 인간의 신체냐고 묻는다면 그건 확실히 아니었다.
뇌룡의 심장 조각과 합체되었으니까.
그게 상태이상을 견뎌낼 정도가 될까?
만일 상태이상이 유지된 상태로 흡수된다면.
한건우도 김도경처럼 괴물이 될까?
아니면 이겨낼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안전을 택한다면 김도경의 <빛의 군주> 특성을 포기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아까웠다.
김도경이 전투에서 특성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똑똑히 보았다.
김도경의 광선검, 파괴 광선, 무한의 검.
그리고 메테오처럼 날리는 빛의 구체까지.
그의 특성을 얻는다면 한건우는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한건우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운에 맡겨야 할 판이었다.
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한건우는 뇌리에 불이 환하게 켜진 듯했다.
‘맞아. 그게 있었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럴 때 쓰라고 얻은 특성이 있었으니까.
[특성 발동 : 포르투나의 주사위]
-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주사위를 던진다.
찬란한 여신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제 낯익은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울 지경이었다.
말 없는 행운의 여신이 한건우를 보며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티그르르···.
허공에서 상아색 주사위가 돌아갔다.
한건우가 빠르게 움직이는 주사위를 살펴보았다.
3개의 면에는 Y, 3개의 면에는 N이라고 쓰인 듯했다.
티그르르르···. 탁!
“좋아, 가자.”
멈춘 단면에 적힌 글자는···.
‘Y’
한건우의 마음과 일치했다.
고민이 끝나자, 거칠 것이 없었다.
- 선택하시겠습니까? (Y)
···
- 특성 흡수 완료.
한건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특성 하나를 더 흡수했을 뿐인데.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뜬 느낌이었다.
바로 빛을 다루는 감각이었다.
물속에서 헤엄칠 때 물결의 흐름을 느끼는 것처럼.
빛의 입자와 파동의 흐름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다.
한건우가 주먹 쥔 손을 펴자, 빛의 입자가 모여들었다.
샤아악-
한건우의 손 위에 오로라 같은 광채가 일렁였다.
슈우-
빛을 더 단단하게 모으자, 금세 날카로운 칼날이 만들어졌다.
김도경의 광선검보다 한층 순도가 높아보였다.
일반인이 똑바로 쳐다보면 시신경이 타버릴 정도로 환하고 밝은 순백색이었다.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한건우는 빛의 칼날을 무작정 길게 뽑아보았다.
수백 미터로 늘이자, 빛의 칼날이 실보다 더 가늘어졌다.
더이상 모양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이르렀다.
슈웅!
한건우가 길게 뻗어낸 빛의 칼날을 휘둘렀다.
“....”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곧 건너편의 바위산 한켠이 뭉텅이로 쓸려나갔다.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칼로 케이크를 썰어낸 것 같았다.
스으- 쿠구구···.
터엉! 콰아아-
통째로 잘려나간 산의 일부가 바닥에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졌다. 바윗덩이가 부서지고, 흙먼지가 날렸다.
“하···.”
한건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손 하나 까딱한 것만으로 이렇게 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바윗덩이가 낸 굉음을 듣고, 드래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드래곤이 훌쩍 뛰듯이 다가왔다.
아직도 입에는 뭔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승리의 흥분이 가라앉자, 뒤늦게 당황한 감정이 올라왔다.
“너, 잠깐.”
아까 드래곤이 련화를 산 채로 물고 흔드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씹어 삼키는 장면까지.
[아빠, 왜?]
예전 같으면 드래곤이 적을 깨물든, 씹어먹든 간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겠지만.
드래곤이 어린아이로 변신하는 걸 똑똑히 본 터였다.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드래곤은 기침을 하듯이 쿨럭거렸다.
툭, 튀어나온 것은 사람의 뼛조각이 분명했다.
한건우는 그냥 모른 체하고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은 인간이 아니라 마수다.
마수가 인간을 잡아먹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한건우의 말을 철저히 따르고, 다른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는 게 어딘가.
“그 여자는, 죽였어?”
[응, 여기에.]
드래곤이 앞발로 자기 배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한건우는 쳐다보지 않았다.
“잘 했다.”
한건우는 온통 초토화된 균열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잿더미와 연기로 가득했다.
‘김도경을 없앴어.’
한건우를 내내 찝찝하게 했던 천망의 련화도.
큰 단계를 넘은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은 너희 차례다.’
김도경을 조종하던 아르고스의 주인들을 생각하며, 한건우는 균열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