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습격 (6) - 괴물화
혹등들소의 불뚝 튀어나온 눈에 한건우의 형상만 가득했다.
자신을 보고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는 인간을 보고, 흥분감이 더욱 올라온 것이다.
김도경이 양팔을 뻗었다.
‘무한의 검’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의 최강의 공격기가 더 조여들었다.
마치 한건우를 가두는 감옥의 창살처럼.
콰앙-
“크아악!”
용병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블랙마켓의 용병은 거의 제 명에 못 산다지만, 그들의 최후는 끔찍했다.
큰 돈에 눈이 멀어서 위험도 ‘무제한’의 의뢰를 받아들인 탓이었다.
용병들은 성난 드래곤의 앞발에 밟히고, 김도경의 빛의 칼날에 갈려 속절없이 죽어갔다.
심지어 제풀에 폭발하기도 했다.
그중에 온전한 시신을 건질 수 있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터엉-
혹등들소가 마지막 디딤발을 떨쳤다.
한건우에게 정면 충돌하려는 것이었다.
혹등들소가 돌진해올 동안.
한건우는 눈꺼풀을 한 번 깜빡이지도 않았다.
탱크처럼 돌진하는 혹등들소의 숨소리와 더운 입김,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
자기 몸처럼 동기화하기 위해서였다.
‘할 수 있어.’
아까 와일드 보어에게 연습한 대로 하면 되었다.
‘타이밍만 잡으면!’
2미터.
1미터.
시간이 한없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그만큼 한건우는 집중하고 있었다.
퍼어-
쿠구구···.
쿠과아앙-
바위 같은 혹등들소의 이마에 한건우의 주먹이 충돌했다.
그와 동시에 혹등들소의 눈동자 안쪽에 불길이 피어올랐다.
대폭발이었다.
“!”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김도경의 머리가 휘날렸다.
혹등들소가 돌진하면서 만든 먼지 폭풍으로, 지상은 온통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폭발음이 들렸어.’
혹등들소의 몸이 폭발하면서 회오리를 만들었다.
‘25미터 안에서 맞으면, S급 각성자도 치명상을 입을 거라 했던가.’
폭발의 화력은 생각보다 약한 듯했지만, 한건우는 거의 코앞에서 충격파를 맞았다.
목숨이 붙어 있더라도, 무사할 리 없었다.
‘지금 죽인다!’
정신을 차린 한건우가 포션이라도 꺼내 먹지 못하도록.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접근해야 했다.
파아앗-
김도경이 무한의 검을 거두고, 섬광처럼 다가갔다.
먼지구름 속,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
김도경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혹등들소의 거대한 사체는 안 보였다.
폭발한 용병들이 그런 것처럼, 머리털 하나 안 남기고 산화되어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한건우의 실루엣이 너무 멀쩡했다.
사지가 다 달려있는 건 물론이고, 두 발로 우뚝 서 있었다.
‘이럴 리가···.’
한건우의 신형이 불쑥 다가왔다.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잘 가라.”
한건우는 좀 전에 와일드 보어에게 <역천의 권>을 연습하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특성 발동 : 역천의 권]
- 물리적 대미지를 주먹에 흡수해서 역으로 반사한다.
주먹에 충격을 흡수하고 나서, 흡수한 물리력을 방출하기 전.
몇 초는 족히 보관할 수 있었다.
한건우의 주먹이 김도경의 명치에 훅 들어갔다.
“!”
공격하려는 생각만 가득했던 김도경은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였다.
명치와 같은 핵심적인 급소를 상대방의 맨주먹에 내주다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건우의 주먹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뻗어나왔다.
제대로 터져나오기도 전에 흡수되었던 폭발의 에너지였다.
퍼어어억!
그그그···.
쿠와아앙-!
휘이익-
김도경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마치 타자가 휘두른 야구 배트에 정통으로 맞은 공이 된 듯했다.
“크윽!”
콰아앙-
파스스···.
팔랑개비처럼 돌아가던 그의 몸이 바위 절벽에 부딪치며 멈추었다.
“크윽.”
김도경은 바위 절벽에 거꾸로 박힌 채였다.
발 밑에는 하늘이, 머리 위로는 땅이 보였다.
광선검은 손잡이만 남은 채 지상에 떨구어져 있었다.
파악-
한건우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등에서 화염의 날개가 뻗어나왔다.
한건우의 뒤로 드래곤 역시 날아오르고 있었다.
김도경은 절벽에 무력하게 박힌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붉은 화염의 날개를 달고, 등뒤에 드래곤의 호위를 받는 한건우는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쿨럭.”
김도경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렀다.
골격과 내장이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았다.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오른쪽 무릎도 완전히 부서졌다.
폭발의 에너지가 그쪽으로 직격타를 준 것이다.
온몸 구석구석에 회복 불가능한 적신호가 켜졌다.
특수안보부의 제복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넝마가 된 상태.
방어구의 기능은 상실한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이런....?’
김도경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제야 김도경은 한건우와 자신 사이의 격차를 느꼈다.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깨달았다.
‘상대의 심연을 모르면서 덤볐군. 아주 기초적인 실수를 했어.’
김도경의 머릿속이 울렸다.
뇌도 충격을 받았는지, 사고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슈우우-
한건우가 김도경의 눈앞에 날아왔다.
“목숨이 질기군.”
한건우가 감탄하듯이 말했다.
방금, <역천의 권>이 김도경의 명치에 정통으로 들어갔다.
가까스로 흡수한 폭발이 김도경의 온몸을 강타했다.
즉사하지 않고 버틴 것만 해도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김도경은 다가오는 한건우를 멍하니 보았다.
한건우의 등 뒤로, 드래곤이 어둑한 하늘을 가르며 날고 있었다.
지상은 흙먼지와 피, 그리고 폭격을 맞은 듯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완패다.’
김도경이 언젠가 한 번 느껴본 감각이었다.
<크로노스의 미궁> 균열에서 한건우가 자신을 이겼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당했던 그때, 절망적이면서 수치스러웠던 감각.
그때는 핑계가 있었다.
한건우는 균열에서 전투를 안 하고 체력을 안배했고, 자신은 혼자서 미궁을 훑고 다니면서 매우 지친 상태였다.
지금은···.
물론 예상과 달리 드래곤이 균열에 나타나기는 했다.
그러나 김도경의 이성이 말했다.
드래곤이 없었다 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고.
자신은 도저히 한건우를 이길 수 없다고.
“내가 졌군. 죽여라.”
김도경이 깨끗이 패배를 인정했다.
그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어렸다.
‘천명환이 죽을 때와는 다르군.’
옛 상사와 부하가 비교가 되었다.
천명환이 늘 김도경을 두려워하고 동경해왔던 걸, 한건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격의 차이가 느껴졌다.
천명환은 마지막 순간, 처절하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자신의 내부 정보로 딜을 걸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한건우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지만.
한건우가 창을 들었다.
슈우-
창날이 김도경의 심장을 찌르기 직전.
“크흑!”
“?”
반쯤 체념해 있던 김도경의 몸이 크게 비틀렸다.
투두둑, 툭.
누군가 그의 신체를 억지로 쥐어짜는 듯했다.
김도경의 피부에 어둠이 번지듯 불길한 검은색이 퍼져나갔다.
슈욱!
그러거나 말거나.
마창 게이볼그의 날카로운 창날이 김도경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터억! 우드득···.
김도경이 왼손으로 창날을 막으며 부여잡았다.
그의 손바닥에 있는 뼈가 박살이 났는데도, 김도경의 손이 꿈쩍하지 않았다.
“커억···.”
김도경은 손바닥보다도 다른 곳이 괴로운 듯했다.
그의 얼굴에 있는 실핏줄이 동시에 터지고, 검은 피를 한 바가지 쏟아냈다.
“뭐지?”
한건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김도경에게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이상하다는 것은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당장 그가 운용하는 빛의 색부터 변했으니까.
스스승!
한건우의 등 뒤를 노린 공격이 있었다.
‘그 여자군.’
날아오는 암기를 막는 정도는 숨 쉬는 것처럼 쉬웠다.
[특성 발동 : 염동력]
천명환에게서 두 번 흡수하여 희귀급으로 진화한 특성이었다.
한건우를 중심으로, 광역화된 염동력이 발동했다.
툭! 치잉-
한건우를 향해 날아오던 맹독 암기들이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누군가 방패로 쳐낸 듯, 쉽게 처리되었다.
건너편의 바위 절벽.
천망의 간부급 요원이자 <과학자>라 불리는 련화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표독스러운 인상이 여전했다.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듯, 흰 실험 가운이 바람에 휘날렸다.
“김도경을 어떻게 한 거냐?”
적에게 물어볼 질문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궁금했다.
터엉- 척!
바위 절벽에 거꾸로 박혀있던 김도경이 몸통을 꺼내며 스스로 빠져나왔다.
오른쪽 팔과 다리는 반쯤 소실되어 있었다.
대리석처럼 희고 단단하던 피부에 검은 반점과 울혈이 피어났다.
드러난 피부는 온통 울룩불룩한 검은 혹으로 뒤덮였다.
김도경의 눈동자는 뒤로 넘어가 뒤집혔다.
죽음을 앞두고도 명료하던 이성이 흐려진 듯, 짐승처럼 거친 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으으으···. 파드득.
김도경의 오른팔과 다리가 있던 자리.
몸 속에 있던 뼈가 자라나 새로운 팔다리를 만들었다.
새 팔다리는 검은 외골격으로 뒤덮여 있다.
‘신체 회복이 아니라··· 괴물이 되었군.’
차라리 생체 폭탄이 되는 게 나아보일 지경이었다.
저 괴물이 <광휘의 성기사>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
뜻밖에 련화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를 도와주려고 했을 뿐이야. 먼저 빛의 특성을 운용하는 방법을 새롭게 알려줬지.”
“자기 특성을 쓰다가 저렇게 됐다고?”
“빛을 끝없이 응축하면 어둠이 되기 마련이지.”
련화가 눈을 희번득이며 웃었다.
자신이 만든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보람과 경외감이 묻어났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군. 모든 걸 말한 것도 아니겠지만.’
김도경이 이렇게 변한 원흉이 누군지는, 바보가 아니라면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파아앗!
“크아아악!”
김도경이 마수처럼 울부짖었다.
그의 등에서 빛의 날개가 솟구쳤다.
저걸 빛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련화의 말대로, 그건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 어둠에 가까웠다.
파아아앗!
광선검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새로 얻은 괴물의 팔에서 검은 빛기둥이 솟구쳤다.
길이만 거의 백 미터에 이르는 파괴 광선이었다.
김도경의 생명력을 태워서 만드는 듯.
이전보다 훨씬 강렬했다.
슈우우웅-
김도경이 파괴 광선을 난도질하듯 휘둘렀다.
균열 전체를 부수어버릴 듯 위력이 굉장했다.
한건우는 광선의 난동을 가까스로 피했고, 드래곤도 사정거리 밖으로 훌쩍 날아갔다.
쿠구궁-
파괴 광선이 스치고 지나간 바위 절벽에서 돌덩이가 떨어졌다.
칼로 두부를 자른 듯, 깨끗하게 베어진 단면이 보였다.
쿠우우···.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기 위해 숨을 들이킬 동안.
련화가 드래곤을 향해 수십 발의 암기를 쏘았다.
퍼버버벅!
강한 산과 맹독이 들어간 암기가 드래곤의 피막 날개에 명중했다.
날개는 비늘로 가려지지 않아, 드래곤의 피부 중에서는 비교적 약한 부분이었다.
키이잇!
상처를 입지는 않았으나, 피막에 끼얹어진 강산이 거슬렸다.
드래곤은 하늘로 솟구쳐 날개를 퍼덕이며 액체를 털어내려 했다.
련화는 제자리에서 매캐한 독연을 풀었다.
짙은 회색의 연기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또다시 도망을 가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련화의 목적지가 투명했다.
‘그때 왔던 공간이동 능력자는 아마 죽었거나, 더이상 도와주지 않겠지.’
그러니 그녀가 향할 곳은 뻔했다.
‘균열 입구 쪽.’
한건우는 구태여 연기 속에서 련화를 쫓으려 하지 않았다.
매캐한 독연은 신경쓰지 않고, 균열 입구가 있던 방향을 조준했다.
<아그니의 화염>으로 폭염탄을 조준하는 찰나.
파아악!
드래곤이 먼저 균열 입구 쪽으로 향했다.
상처입은 날개는 접어서 몸에 붙이고, 거대한 체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
콰악!
드래곤이 다친 날개를 접고, 4개의 날개만으로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드래곤의 이빨 사이에 무언가가 요동쳤다.
비명소리도 들렸다.
개가 사냥감을 물고 흔드는 것처럼.
드래곤이 목을 거세게 흔들었다.
까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비명도 멈추었다.
“....”
이성이 없어진 김도경은 련화의 죽음에도 무덤덤했다.
그가 다시 날아오르며 새로 얻은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우우웅-
김도경이 파괴 광선을 내리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