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습격 (5) - 역천의 권
련화의 흰 손이 마수의 뒷목을 짚었다.
그녀는 쓰러진 마수의 위에 올라가 있었다.
바위 계곡이 있는 균열의 왕, 혹등들소였다.
이름처럼 불뚝 솟은 등과, 휘어져 앞을 향하는 뿔이 위협적이었다.
뻣뻣한 갈색의 털로 뒤덮인 혹등들소.
집채만한 몸집과 체중을 이용해서, 상대가 누구든 정면으로 돌진해서 다 부수어 버리는 마수였다.
스윽.
련화가 손가락 굵기의 대침을 빼냈다.
마비독이 묻은 침을 거둔 것이었다.
그 대신, 방금 놓은 주사제가 마수의 혈관을 돌고 있었다.
용병들에게 놓은 주사제와 같은 성분이었다.
마수는 이제 시한부 생체폭탄이 된 셈이었다.
김도경은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균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걸 계획했습니까?”
김도경은 기분이 거슬렸다.
이건 련화의 단독 행동이나 다름없으니까.
련화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웃기만 했다.
김도경도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가 경계심을 담은 눈길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본래 각성자를 연구하던 실험실의 천재 연구원이던 련화.
일반인이어도 위험할 인물이 각성까지 했다.
그것도 맹독을 다루는 고유 특성을 가지고.
“강화 약물이라면 우리 연구소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이런 건 처음이군요. 폭발하는 시점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겁니까?”
“아뇨.”
련화가 딱 잘라 말했다.
“뭐라고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무슨 소립니까. 조절할 수 없다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건데.”
“적과 마주치기 전, 흥분이 극도에 달하는 때에 폭발하게 되어있습니다. 일반적인 생물은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지만, 각성자와 마수들은 다르죠.”
“....”
“몸 속의 마기가 폭발적으로 요동치는 순간. 그때 생체를 매개삼아 폭발이 일어나는 거죠. 이 마수 정도면··· 제 계산으로는 25미터 안에 있으면 S급 각성자라도 치명상을 입을 겁니다.”
련화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내용을 듣고, 김도경은 속이 쓰렸다.
특수안보부 직속 연구소에서는 아직 상상도 못할 기술이었다.
하물며 실험 단계가 아니라 전투에서 쓸 정도라니.
“특수안보부 연구소도 세계적으로 뒤쳐지는 곳이 아닌데··· 천망의 기술이 훨씬 앞서나가고 있군요. 윤리의 제약을 덜 받아서 그런가요?”
“천망의 기술이 아닙니다. 제 기술이죠. 제가 없으면 못 해내니까요.”
련화는 과학자 특유의 호승심을 보였다.
그 말을 들은 김도경은 슬며시 미소지었다.
‘잘 됐군. 이 여자만 제거하면 깔끔하겠어.’
번뜩!
혹등들소가 시뻘개진 눈을 떴다.
실핏줄에 뛰는 맥박이 보일 정도였다.
그르르···.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는 못한 듯.
눈동자가 회까닥 뒤로 돌아갔다.
혹등들소의 온몸 근육이 꿀럭이는 게 보였다.
휘익.
련화는 재빨리 혹등들소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테이머도 아니었고, 정신 조종 능력도 없었다.
혹등들소가 눈을 뜨기 전에, 기척을 지우고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혹등들소가 자신들을 먼저 공격하려 들지도 모른다.
“산 아래, 계곡에서 만나죠.”
몸을 피하려던 김도경이 멈칫했다.
“잠깐.”
“?”
“한건우나 드래곤이 폭발을 피하거나, 우리가 부상을 입을 수도 있을 텐데. 대책은 없습니까?”
김도경이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혹등들소와 드래곤, 한건우 셋을 사이좋게 비좁은 공간에 가두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균열은 꽤 넓었고, 그들의 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련화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김도경, 당신의 능력이 필요했던 거죠.”
“뭐···?”
그녀가 나지막한 말을 남기고, 바위 뒤로 훌쩍 사라졌다.
김도경의 얼굴이 굳었다.
쿠웅···. 쿵···.
혹등들소가 뒷발을 딛고 중심을 잡았다.
비척이던 걸음걸이도 점차 안정적으로 변했다.
혹등들소가 김도경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
김도경의 등에서 빛의 날개가 솟아났다.
길고 날카롭게 뻗은 찬란한 날개였다.
‘한건우만 날 수 있는 게 아냐.’
김도경은 한건우를 떠올렸다.
불이라는 강력한 원소를 다루며, 화염의 날개로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한건우.
그러나 가장 순수하고 강한 원소는 뭐니뭐니 해도 빛이었다.
슈우- 피유웅-
김도경이 산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의 신형이 빛줄기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 사이.
마침내 제정신을 차린 혹등들소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기분나쁜 냄새가 맡아졌다.
혹등들소는 산 아래의 침입자들을 감지했다.
그 중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마수의 냄새도 있었다.
평상시라면 아무리 혹등들소라도 겁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핏속에 도는 힘차고 생생한 기운이 용기를 주었다.
영토를 침입한 자들을 박살내라고, 마수의 본능이 명령했다.
쿵, 까드득···.
혹등들소가 강철처럼 단단한 발굽으로 대지를 짓이겼다.
쿠웅, 쿠우··· 두두두두···.
혹등들소가 절벽처럼 까마득한 바위산을 거침없이 뛰어내려갔다.
*
김도경의 얼굴이 싸늘했다.
‘그 여자의 계획을 따르긴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김도경의 본래 계획보다는 훌륭한 방법 같았다.
먼저 용병들을 보내서 한건우의 주의를 돌리고.
그 사이에 균열의 주인인 거대한 마수를 확보한다.
균열의 주인에게 주사제를 맞힌 후, 한건우와 드래곤에게 덤비게끔 한다.
그리고 적과 접촉하는 순간 폭발.
제아무리 한건우와 드래곤이라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여기에 김도경이 방금 지적한 맹점이 하나 있었다.
‘이 마수는 날 수 없지만, 한건우와 드래곤은 날 수 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멀리서 공격할 수도 있어.’
접촉을 하기도 전에 멀리서 마수를 사냥해 버린다면?
폭발이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을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벌써 생각했다니.’
련화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듯해, 김도경은 기분이 몹시 나빴다.
‘한건우만 죽고 나면, 그 다음은 너다.’
련화는 아르고스의 협조자이긴 하지만.
그녀를 죽이는 건 특수안보부를 위해서도, 더 나아가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닐까.
김도경은 그렇게 합리화했다.
산 위로 날아오른 김도경의 손에 빛무리가 모였다.
그냥 평소처럼 특성을 썼다가는, 지난번처럼 한건우에게 바로 무력화되어 버릴 것이다.
균열의 빛 입자가 김도경의 양손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계의 태양광은 지구의 것보다 강렬했다.
파앗-
충분한 빛을 모은 김도경이 한건우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곧 그의 시야 멀리, 한건우가 들어왔다.
한건우는 산 밑의 계곡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
“이, 이건···.”
팀 리더가 산 채로 폭발하는 걸 본 용병들이 바짝 굳었다.
그들의 멍한 표정이 한 사람처럼 똑같았다.
누구도 도망간다는 생각은 좀처럼 떠올리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그들의 의뢰인을 기다리기만 했다.
의뢰인인 김도경만 나타나면 이 일이 해결될 것처럼.
그건 암시의 효과이기도 했고, 실제로도 비슷했다.
“어?”
당황한 이들도 느낄 정도로 시야가 차츰 어두워졌다.
전등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던 방 안에서 전등을 하나씩 툭툭 끄는 것처럼.
균열에 황혼이 내리는 듯했다.
빛의 방향이 바뀌어 그림자가 돌아갔다.
한건우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어두침침해진 균열의 빛이 한 군데 모여, 작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김도경이 하늘에 떠서 태양신처럼 빛나고 있었다.
“김도경?”
“죽어라.”
피유우우-
한건우가 선 자리를 향해, 유성우 같은 빛의 구체가 쏟아졌다.
슥!
콰아앙-
한건우는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를 타고 빛의 구체를 피했다.
<그림자 맹시>는 은신 특성일 뿐 아니라, 빠른 회피기 역할도 했다.
파스스스···.
빛의 구체가 떨어진 곳.
운석이 떨어진 듯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회심의 공격으로도 한건우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김도경의 눈이 이글거렸다.
한건우는 그런 김도경을 보며 감탄했다.
‘<빛의 군주> 특성으로 이런 것도 가능했나?’
날개만 해도 그랬다.
지난번만 해도 빠르게 이동할 뿐, 직접적으로 날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한건우의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회귀 전의 김도경보다··· 특성이 한 단계 더 개화한 것 같군.’
한건우가 나타나기 전만 해도,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김도경보다 강한 존재는 랭킹 1위인 태일제뿐이었다.
김도경이 태일제에게 고개를 숙인 것도 아니었다.
특수안보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실질적으로 윗사람 행세를 했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김도경은 그전과 달랐다.
하늘에서 뚝 나타난 신성, 한건우의 존재가 긴장감을 준 모양이었다.
독기가 올라 있었고, 절박한 느낌마저 느껴졌다.
그 덕분에 <빛의 군주> 특성도 더 개화된 모양.
어찌 되었든 한건우에겐 반가운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특성은 반드시 흡수하고 싶었으니까.
한건우도 위로 솟아올라 김도경과 높이를 맞추었다.
어둑해진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스스스-
김도경이 광선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광선검은 백색이었지만, 이제는 전에 없이 검은빛으로 빛났다.
련화의 조언을 듣고, 빛의 운용을 바꾼 것이었다.
김도경은 광선검의 빛을 응축시키고 또 응축시켰다.
그러자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이 되었다.
“왜 죽이려 하냐고, 묻지도 않나?”
한건우가 습격을 덤덤하게 받아들이자, 김도경은 의아한 모양이었다.
“전혀. 이유는 궁금하지 않아. 반가울 뿐이지.”
“뭐라고?”
김도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무덤으로 잘 왔다.”
스르릉-
한건우가 마창 게이볼그를 뽑았다.
김도경도 광선검을 겨누었다.
두 사람이 부딫치려는 순간.
분노한 드래곤이 김도경을 덮쳤다.
쿠과아아아-
아까보다 훨씬 거센 브레스가 뿜어졌다.
팟-
김도경은 가공할 만한 속도로 공격을 피했다.
전격이 섞인 브레스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
드래곤의 브레스를 피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라는 말이 어울렸다.
“드래곤을 공격해.”
김도경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용병들에게 명령했다.
용병의 의뢰인이 아니라, 군대를 이끄는 장군처럼 권위적인 태도였다.
그럼에도 거기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꼭 암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 이판사판이다!’
눈치 빠른 용병들이었다.
어차피 김도경이 패하면 자기들도 살아나가기 어렵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타앙-
슈우우-
마력 총기를 다루는 각성자와 법사가 드래곤의 머리를 노리고 공격했다.
화가 난 드래곤이 다시 꼬리를 휘둘렀다.
“안 돼.”
그건 실수였다.
쿠콰아앙!
아까 용병 팀의 리더처럼, 그들의 몸이 폭발했다.
다행히 기운이 약한 각성자들인지, 폭발의 강도는 높지 않았다.
그래도 드래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키이잇!
놀란 드래곤이 뒤로 물러났다.
“이리 와!”
슈웅-
한건우가 드래곤에게 다가갔다.
드래곤이 용병들 옆에 가까이 붙어있어서, 섣불리 건드리기가 어려웠다.
용병들을 죽이려다 언제 폭발이 일어날지 몰랐다.
‘역시 드래곤은 아직 전투 경험이 부족해···.’
직접 타고 조종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김도경이 그걸 방해했다.
“죽어라!”
그의 눈두덩 안이 검은 빛으로 가득 찼다.
슈우우웅!
그의 몸에서 수천 갈래의 검은 광선이 뻗어나왔다.
광선의 끝이 날카로워지며 길다란 장검의 형상이 되었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무한의 검!’
만주의 균열에서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슈우우-
수천 갈래의 검은 광선이 동시에 둥글게 휘어졌다.
한건우와 드래곤이 있는 방향을 둘러싼 것이었다.
‘피할 수가 없어!’
이번에는 <크로노스의 왕홀>도 소용이 없었다.
한건우 혼자서라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드래곤을 데리고 나오기가 어려울 터였다.
‘부상을 입더라도, 정면으로 통과할까?’
‘무한의 검’은 지난번처럼 일점을 향해 바짝 조여들지 않았다.
한건우와 드래곤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만이 목표인 것처럼.
“?”
쿠구구구···.
한건우가 의문을 가지고 계곡을 바라보았다.
아까 와일드 보어 떼가 밀려온 길.
두두두···.
균열의 주인, 거대한 혹등들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발굽에 일어난 흙먼지가 폭풍을 일으킬 정도였다.
한건우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혹등들소에게 받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오히려 창까지 집어넣고 드래곤 앞으로 걸어나갔다.
10미터.
5미터···.
[특성 발동 : 역천의 권]
그의 주먹에 마력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