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습격 (4) - 어그로
“....”
한건우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잠시 굳었다.
‘음, 인질이라···. 그래, 그럴 수 있지.’
용병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아주 황당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오히려 합리적인 접근일 수도 있었다.
김도경은 저 아이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
드래곤에 대한 경험치가 없으니, 폴리모프라는 건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김도경이 모르는데 저 용병들이 알 리가 없었다.
“흐하핫.”
한건우의 침묵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는지.
용병의 입에서 그린 듯이 야비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가늘고 여리게만 보이는 아이의 목에 칼을 겨눈 채였다.
“어리석긴. 균열에 애를 데리고 들어와?”
“친딸이 아닌 줄 알았네.”
비록 비열한 방법을 쓰긴 했지만.
한건우 같은 거물이 꼼짝도 못하는 상황을 만든 게 즐거웠다.
국가적인 영웅이자 국내 3, 4위를 다투는 유력한 길드의 마스터인 S급 한건우.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감히 그들이 쳐다볼 수조차 없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한건우를 잡을 수 있을지도···.’
용병들은 전의를 다졌다.
그게 스스로의 자유 의지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원유선이 암시를 심어놓지 않았다면, 아무리 큰 돈을 준다 해도 이 의뢰를 받지는 않았으리라.
그들이 자신감을 가진 건 인질 때문이 아니었다.
도리어 이건 계획에 없는 보너스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그들의 뒷배에는 랭킹 2위 김도경이 있었다.
그 사실이 용병들을 과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김도경 옆에 있던 그 여자.
실험실 연구원처럼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주사 약물을 권했다.
수상한 주사제를 보고 용병들은 처음에는 경계심을 보였다.
- 이건 뭐요? 스탯 강화 약물?
- 난 이런 거 안 쓰는데···.
블랙마켓의 의뢰인들은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용병들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려는 이들이 많았다.
큰 돈을 줄수록 더욱 그런 편이었다.
블랙마켓에서 연결하는 용병들은 대부분 미등록자라서, 기록에도 남지 않았으니까.
용병 스스로 조심해야 했다.
- 강화 주사 맞습니다. 미리 맞으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일시적인 효과뿐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김도경이 온화하게 웃으며 재차 권했다.
의뢰인의 지시를 따르라는 암시가 무의식에 걸려, 정상적인 판단이 되지 않는 상태.
용병들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하나둘씩 팔을 걷었다.
균열에 들어가기 직전, 용병들은 미리 주사제를 맞았다.
그 효능은 대단했다.
- 온몸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데.
- 버프를 단독으로 빵빵하게 받으면 이런 기분인가?
- 난 강화 약물을 많이 맞아봤지만, 이 정도로 차이를 느낀 건 처음이야.
용병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물론 약물 좀 맞는다고 그들이 한건우를 상대할 수는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용병들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김도경과 련화가 한건우를 공격하기 전, 어그로를 끄는 것.
‘인질을 이용해서 마력 저감장치를 채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용병들은 고개를 들어 한건우를 도전적으로 쏘아보았다.
한건우는 허공에서 날개를 펴고 제자리에 떠 있었다.
어딘가 미묘한 표정이 조금 거슬렸다.
용병 팀의 리더가 외쳤다.
“뭘 가만히 있어. 아이의 목이 뚫리는 걸 보고 싶나?”
“아빠?”
“조용히 해!”
용병이 아이의 목에 댄 칼날을 좀더 바싹 당겼다.
칼날 끝이 목을 누르는데도,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 아저씨들은 나쁜 사람들이야?”
“음···.”
한건우는 그만 픽 웃음이 나왔다.
드래곤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물었다.
“내가 죽여도 돼?”
한건우가 대답했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
용병들은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대화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그들이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우우웅-
공간의 좌표가 휘어지며 비틀렸다.
“으헉!”
“이, 이게 무슨....?”
“뭐야!”
아이를 붙잡고 있던 용병들은 어딕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그들은 아이를 놓아두고, 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서로 부리나케 도망갔다.
크과과과-!
뒤를 돌아본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드···.”
아이가 서 있던 자리.
조그만 어린아이의 형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전설적인 마수의 거체가 나타나 있었다.
악마의 것 같은 피막 날개가 퍼덕였다.
온몸을 뒤덮은 짙은 보라색 비늘이 영롱하게 빛났다.
“드래곤···.”
누군가 그 이름을 불렀다.
짙은 자색의 커다란 드래곤.
바로 모두가 아는 한건우의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의 눈이 그들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축구공만한 안구가 뜨겁게 불타오르는 듯했다.
콰아아- 콰직!
드래곤이 앞발을 내딛었다.
용병들이 던진 마력 저감장치는 한 방에 부수어져 고물이 되었다.
용병들이 밟고 선 땅이 울렸다.
그들의 심장 역시 극한의 공포로 쿵쿵거렸다.
“말도 안 돼···.”
용병들은 모두 드래곤의 사진이나 영상을 본 적 있었다.
드래곤의 등장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화제였으니까.
그들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진이나 영상은 모두 가짜였어.’
이 숨막히는 위압감을 하나도 전하지 못했으니까.
크르르르···.
드래곤이 숨을 들이켰다.
거칠한 잇몸이 들리면서 날카로운 이빨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드래곤이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드래곤의 흡기.
그게 뜻하는 바는 선명했다.
“브, 브레스다!”
“으, 으아, 으아아!”
“도망쳐!”
용병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한 명이라도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 발동했는지.
그들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부우우-
드래곤이 선 채로 긴 꼬리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선명했다.
퍼버벅!
“컥!”
“크억!”
드래곤이 휘두른 꼬리는 무척이나 굵고 단단했다.
그 꼬리에 용병 서넛이 정통으로 맞았다.
그들이 탁구공처럼 허공으로 튀어올랐을 때였다.
쿠과과-
드래곤이 공중에 브레스를 쏘았다.
통상 드래곤의 브레스는 불 속성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한건우의 드래곤은 달랐다.
짙푸른 전격과 냉기가 섞여 만들어진 에너지 폭풍이 균열 안을 휘감았다.
“!”
하늘로 튕겨나간 용병들이 브레스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세 사람이 브레스 속에서 절명했다.
약하게 내뱉었는데도, 브레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전격에 바스러지고 냉기에 얼어붙어, 용병들 셋은 거의 가루가 되었다.
키이잇!
기분이 좋아진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였다.
그로 인해 일어난 돌풍에, 다리에 힘이 빠진 용병들이 뒤로 쓰러졌다.
“크윽···.”
친한 동료는 아니어도, 방금까지 팀을 이루던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단 몇 초 만에 죽어나가자, 살아남은 용병들은 동요했다.
공포는 전염성이 강했다.
누군가가 겁을 먹어버리면 그때부터는 겉잡을 수 없었다.
“대체 여기 왜 드래곤이···.”
“분명히 없다고 했잖아.”
대부분은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야! 어차피 도망 못 가. 자리에 일어서서 싸워!”
한 용병이 떨쳐 일어나서 외쳤다.
임시로 리더를 맡은 용병이었다.
그가 든 검에 마력이 모여 희미한 빛이 났다.
마검사 클래스인 모양이었다.
“그, 그래!”
“조금만··· 버티자!”
뒷걸음질 치던 용병들이 멈춰섰다.
갑자기 리더의 말에 감화받아서는 아니었다.
다른 용병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다가 죽는 모습을 목격한 게 컸다.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은 용병들이었다.
가만히 서서 당하는 것보다는 검이라도 휘둘러보는 게 나았다.
그게 살아날 확률도 더 높았다.
“오.”
한건우는 팔짱을 끼고 감탄했다.
지상에 펼쳐진 그림이 꽤 좋았다.
악의 화신인 고룡에 맞서 싸우는 용사 파티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멍청한데다 악하기까지 한 놈들이지만.’
어린아이를 서슴없이 인질로 잡아 무기를 들이대는 각성자 용병들.
사회에 풀어놓아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크르르릉···.
드래곤도 흥미롭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용병 팀 리더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끄으으···.”
그의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잇새로 불규칙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촤아아-
용병의 온몸 피부에서 김이 났다.
몸 안쪽에서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키잇?
드래곤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눈을 꿈뻑였다.
“끄아아!”
타다다다···.
그 용병이 제 몸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드래곤이 있는 쪽이었다.
“왜 저래!”
“뭐야!”
다른 용병들이 주춤했다
설마 폭탄이라도 갖고 있나 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저 검 한 자루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겨누고 있지도 않았다.
드래곤도 이 상황이 낯설었다.
인간이 자신에게 저렇게 겁없이 뛰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부우우-
드래곤이 아까처럼 긴 꼬리를 휘둘렀다.
대책 없이 뛰어오는 용병을 날려 보내려는 것이었다.
달려가는 용병 팀 리더의 몸이 화로 속의 숯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순간.
퍼억- 콰아앙!
용병의 몸이 폭발했다.
엄청난 양의 마력 에너지가 구름처럼 일어나, 균열의 하늘까지 솟구쳤다.
“!”
키이이잇!
당황한 드래곤의 비늘이 뻣뻣하게 섰다.
치이이···.
드래곤의 꼬리 비늘이 그을리고 갈라져 있었다.
크르릉···. 파앗!
드래곤이 위로 날아올랐다.
드래곤은 잔뜩 화가 난 기색이었다.
한건우도 상당히 놀랐다.
아다만티움을 제외하면, 지상에서 가장 강한 물질 중 하나.
그런 드래곤의 비늘이 손상되다니.
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폭발물 같은 건 없었어.’
인간의 몸 자체가 폭탄으로 변한 것 같았다.
한건우도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각성자 한 명이 낼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닌데?’
한건우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고민하자마자 짚이는 게 있었다.
‘이건 천망의 기술이군.’
한건우는 드래곤과 반대로, 지상으로 내려갔다.
*
김도경은 이를 뿌득 갈았다.
균열 안에 갑자기 불쑥 나타난 드래곤을 보고, 김도경은 가슴이 철렁했다.
‘속았구나!’
작전은 잘못되었다.
어느 단추부터 잘못 꿴 건지 몰라도.
첫 설계부터 완전히 틀려먹은 것이다.
김도경은 철수하려 했다.
손해를 보더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 특수안보부의 방식대로였다.
뼈대가 되는 골조가 잘못된 걸 발견하면, 그 위에 어떤 벽돌도 쌓지 않는다.
김도경은 그렇게 배웠고, 부하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러나 련화가 김도경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다려요.”
“?”
콰아아아-
그때, 균열을 뒤흔드는 굉음이 들렸다.
그들이 있는 산 위까지 쩌렁쩌렁 울리며 메아리칠 정도였다.
련화가 살짝 안타까워했다.
“벌써 넷이나 잃었군요. 셋은 터뜨려 보지도 못하고.”
“···방금, 저건 뭡니까?”
련화는 품 속에서 태연하게 주사제를 꺼냈다.
“말씀드렸잖아요? 저 자들은 살아있는 함정이라고.”
“하지만···.”
물론 듣기야 했다.
그러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드래곤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해보죠. 이건 애초에 한건우가 입은 용갑을 파괴할 용도로 만든 거예요.”
김도경이 마른침을 삼켰다.
‘미친놈이 저기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이쪽에도 있었나?’
련화가 주사제를 들고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발밑에는 이 균열의 주인이 선잠에 들어 있었다.
가벼운 마비독을 써서 잠깐 재운 것이었다.
그르르르···..
집채만한 마수의 거친 숨이 뜨거웠다.
련화가 마수의 정맥에 주사를 놓았다.
‘별볼일 없는 용병 각성자 놈 하나가 폭발한 게 저 정도면, 이만한 마수가 폭발하면 어느 정도지?’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김도경은 생각했다.
김도경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련화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위험해 보이는 여자였다.
‘일이 끝나면 이 여자도 없애 버려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