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습격 (3) - 인질
김도경은 한건우를 잡기 위한 그물을 제법 철저하게 쳤다.
이미 일대일로 붙어서 완패한 전적이 있었으니까.
똑같은 방법으로 공략하는 건 바보 짓이었다.
이전보다 불리한 입장이기도 했다.
한건우를 죽인다는 건, 김도경 개인의 목표였다.
아르고스에서도, 특수안보부에서도 공식 지원은 없었다.
상부의 명령을 받은 게 아니라 김도경의 개인 작전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도경이 누구인가.
그는 특수안보부의 2인자인 서울지부장이자, 한국 2위의 랭커였다.
개인의 인맥과 능력으로도 이 정도 기획은 충분했다.
증빙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자금만 천문학적인 수준인 데다, 상부에 말하지 않고 개인 사병처럼 움직일 수 있는 부하들도 있었다.
중국 천망의 련화와 함께한 건 물론이고, 당연히 태일제와 원유선에게도 컨택을 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태일제 그 놈이 몸을 사릴 줄이야···.”
김도경이 흑색의 광선검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뱉었다.
“손에 피를 안 묻히고 지켜보다가, 최후의 이득을 얻으려 하는군요."
련화가 정곡을 찔렀다.
“항상 그런 식이죠. 그 교활한 노인네.”
김도경이 씹어 뱉듯이 말했다.
뱀처럼 스윽 빠지는 태일제가 원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부터가 첫 번째 관문이다.’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드래곤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한건우의 가장 큰 무기는 자타공인 드래곤.
아무리 생각해도 드래곤을 탄 한건우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김도경은 그동안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한건우가 드래곤과 떨어져서, 단독으로 균열에 들어가는 순간을.
한건우 쪽도 여러 가지 사건이 정신없이 터져서인지.
김도경에게 약속을 이행하라며 보채지는 않았다.
아레스 길드의 소식으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은설아, 임수호, 임진호···.’
만주 원정에 따라갔던 3명이 사이좋게 한 등급씩 올랐다.
자기 손으로 그들을 강화시키는 판을 깔아준 것일까.
김도경의 속에서 천불이 났다.
“드래곤은? 지금 옥상에 보이나?”
[며칠 전에 인공 균열로 들어간 이후,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김도경의 여비서가 대답했다.
드래곤의 행방은 다른 건물에서도 쉽게 감시할 수 있었다.
길드 건물에서 드래곤을 키우는 기행 덕분이었다.
한건우의 드래곤은 평소에 높은 길드 건물의 옥상에서 지냈다.
옥상에 있는 인공 균열로 들어가 쉬거나 잠을 자기도 했다.
식사는 며칠에 한 번 꼴로 했는데, 균열에 데려갈 때도 있었고, 한건우 길드에서 관리하는 미공략 균열로 날아가서 리스폰되는 마수를 먹일 때도 있었다.
마침 지금은 인공 균열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니.
드래곤을 덫에 가두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한건우에게 안겨서 나왔다는 건,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마침 잘 됐군. 지금 덫을 설치하라고 해.”
[네.]
드래곤이 있는 옥상에 접근하는 게 난제였다.
처음에 김도경은 한건우의 길드원을 회유해서 매수하려 했다.
한건우와 가까운 초창기 멤버 말고,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사람으로.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불가능했지.’
대리인을 내세워서 큰 돈과 갖가지 달콤한 약속을 내걸었지만, 아무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길드에 의리 같은 걸 갖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군.’
*
드래곤의 둥지가 있는 길드 옥상.
드래곤은 인공 균열로 쉬러 들어갔는지 안 보였다.
츠르르릉···.
한건우의 길드원들이 검은 사슬을 들고 나타났다.
소재앙급 마수도 꼼짝 못하게 하는 아다만티움 사슬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자세히 보면 동공에 붉은빛이 맴돌고 있었다.
원유선의 <마인드 컨트롤>. 정신 조종 특성을 쓴 것이다.
정신 방어가 약한 각성자들을 노렸다.
처억! 츠르릉···.
그들은 말없이 인공 균열 입구를 사슬로 휘감았다.
사슬로 인공 균열 입구를 가로막는 동안. 아무도 옥상에 접근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건우와 동행하지 않으면 옥상에 얼씬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한건우와 동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드래곤을 마주치는 건 몹시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너무나 강력하고 두려운 탓에, 도리어 김도경에게는 틈을 준 것이었다.
[지금 완료됐습니다.]
“알겠다.”
김도경은 한건우가 들어간 균열로 향했다.
*
균열 입구를 지키던 구조대원들이 김도경을 알아보았다.
고참인 선임 대원이 긴장하며 경례를 올려붙였다.
“이상 없습니다!”
“고생 많으십니다. 이 균열에 누가 공략을 들어갔죠?”
김도경은 온화한 얼굴로 균열 입구로 다가왔다.
아마 시찰을 하러 다니는 모양이다, 하고 마음을 놓은 선임 대원이 답했다.
“한건우 플레이어입니다. 혼자 공략 중이지만, 아시잖습니까. 걱정하실 건 없을 겁니다.”
“그··· 따님도 데려왔습니다.”
옆에서 막내 대원이 정정하려고 한 마디 거들었다가 괜히 눈총을 받았다.
김도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야산 근처.
민가는 보이지 않았고, 차가 지나는 도로도 떨어져 있었다.
하늘이 김도경을 돕는가 보다.
‘더이상 목격자가 없겠어.’
김도경이 타고 온 검은 밴에서 용병들이 내렸다.
이상한 낌새를 챈 선임 대원이 물었다.
“저,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뒷좌석에서 두 여자가 천천히 내렸다.
한쪽은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썼다. 나이를 알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원··· 유선 플레이어?”
“다 알아보네.”
원유선이 인상을 찡그리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모든 대원들이 본능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붉은 빛이 번뜩, 빛났다.
[특성 발동 : 마인드 컨트롤]
“으···.”
선임 대원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항도 잠시뿐, 그의 정신은 원유선의 특성에 휩쓸렸다.
구조대원들의 시선에서 점차 초점이 사라졌다.
멍한 눈동자에 미약한 붉은기가 올라왔다.
원유선이 그들의 정신을 주무를 동안.
딱 한 명, 마인드 컨트롤이 안 걸린 사람이 있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막내 대원이었다.
보기와 다르게 정신 방어벽이 높은 모양이었다.
“도, 돌아가··· 주십시오. 이곳은···.”
막내 대원이 용기를 내서 균열 입구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피어났다.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하나, 더럽게 없다고 해야 하나.”
원유선이 안타깝게 말했다. 그녀가 뒤를 슥 쳐다보았다.
슈욱-
맹독이 묻은 암기가 회전하며 날아갔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련화가 던진 것이었다.
막내 대원의 목에 선홍색의 선이 그어졌다.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많은 피가 쏟아내렸다.
"으아아!"
막내 대원은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 없었다.
암기 여럿이 춤을 추듯이 그를 둘러쌌다.
“흐억···.”
막내 대원이 쓰러져서 온몸을 경련했다.
동료가 죽어가는데도, 정신 조종을 당한 대원들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스르릉-
암기가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아무리 약해도 구조대원은 각성자였다.
손 한 번 휘둘러 각성자를 죽이는 걸 보고, 원유선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
김도경이 그녀의 태도에 의문을 가진 순간.
원유선이 너스레를 떨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일 것 같네요.”
“뭐요?”
김도경의 얼굴이 구겨졌다.
원유선의 <타임 리와인드>로 도움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한건우에게 속도로 완전히 압도당했다. 시간을 돌리는 특성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원유선은 발을 빼려는 모양이었다.
원유선의 눈에서 붉은빛이 요요하게 쏘아졌다.
“이 대원들은 입구를 잘 지키고 있었고, 아무것도 못 본 거예요. 한건우 플레이어는 균열에서 일어난 알 수 없는 사고로 죽은 게 되고. 저 젊은이는, 음... 출근도 하지 않았던 거로 하죠. 이걸로 부족한가요?”
“....”
김도경은 원유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원유선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몇십 년간 따라온 삶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영감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손해는 없어.’
태일제만 따라하면 크게 낭패를 볼 일은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지난번 김도경이 한건우한테 뼈까지 발리는 걸 두 눈으로 봤는걸.’
김도경이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장담했지만.
원유선은 그닥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빠져도 김도경 지부장은 보복도 못 해. 지금 대형 길드에서 자기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데다가, 여기까지 도와준 공로가 있으니. 오히려 보상을 줄 수밖에 없을걸?’
원유선은 거기까지 계산이 끝났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김도경은 원유선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망할 여우 같은 할망구가···.’
김도경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여기까지 와서 시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김도경이 데려온 용병들이 균열 입구 앞에 섰다.
용병들의 행동은 군인처럼 신속했지만, 어딘가 멍한 구석이 있었다.
모두 원유선에게 약한 암시를 당한 상태였다.
‘그래도 저 할망구가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어.'
김도경은 블랙마켓에서 돈만 주면 뭐든지 하겠다는 용병들을 열 명 구했다.
갑자기 사라져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뒤가 구리고 혼자 움직이는 자들로.
지원자 상당수는 면접 단계에서 떨어뜨렸다.
실력을 본 게 아니었다. 정신 방어가 약한 자들을 골랐다.
모든 행동을 컨트롤하는 정신 조종까지는 필요없었다.
원유선을 시켜서 약한 암시를 걸도록 했다.
암시는 정신 조종에 비하면 쉽고 단순했다.
원래 머릿속에 존재하는 생각을, 좀더 깊이 파고들게 만드는 식이라고 했다.
- 의뢰인의 지시를 따라라.
용병이라면 기본적으로 의뢰인의 지시를 따를 생각을 하고 있다. 의뢰인의 지시가 지나치게 위험하거나 과도하면 반항하겠지만.
암시가 걸린 용병들은 김도경이 제안하는 걸 쉽게 받아들였다.
용병들은 한건우의 주의를 집중시킬 미끼였고, 그 자체로 함정이었다.
“한건우를 찾아서 공격해. 어린애가 있는데, 필요하면 죽여도 상관없다.”
용병들은 망설임 없이 균열 입구로 뛰어들어갔다.
*
쿠욱, 후우욱-
와일드 보어가 어금니 사이로 더운김을 뿜었다.
와일드 보어는 멧돼지 형상의 마수로, 흉측하고 거대한 어금니가 특징이었다.
크워어어!
투두두두···..
우두머리 수컷이 포효하자, 그걸 신호로 와일드 보어 떼가 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아찔한 경사의 계곡 사잇길.
와일드 보어 군단이 돌진해 오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한건우는 길 한가운데에 무기도 없이 우뚝 서 있었다.
와일드 보어 떼가 밀려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때를 기다렸다.
10미터, 5미터.
두두두두···.
쿠워어어-
선두를 달리는 우두머리 와일드 보어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온몸을 던져 몸통 박치기를 할 기세였다.
남은 거리는 고작 2미터.
와일드 보어의 어금니가 바로 앞까지 이르렀다.
[특성 발동 : 역천의 권]
- 물리적 대미지를 주먹에 흡수해서 역으로 반사한다.
한건우의 맨주먹에 기운이 심상치 않은 모였다.
몇십 톤은 족히 될 와일드 보어가 한건우의 주먹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
엄청난 굉음이 터져야 할 상황.
사위는 조용했다.
스으으-
무언가가 소리도, 충격도 다 먹어버린 듯했다.
그 직후.
콰아아아앙!
한건우의 주먹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일었다.
뀌에에엑!
쿠워어!
우두머리를 따라 내려오던 와일드 보어 떼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한건우의 주먹에 닿았던 우두머리는 거의 가루가 되었다.
‘이 타이밍이군.’
타이밍을 놓치면 자칫 위험에 처할 수 있는 특성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건우는 그 정도의 제약에 조심할 수준은 아니었다.
파아앗-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드래곤이 한건우의 옆으로 날아 내려왔다.
무슨 말을 기다리는지는 뻔했다.
“먹어도 돼.”
한건우가 미소지으며 말하자, 드래곤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와일드 보어 떼에 달려들었다.
그르르르···.
얼마 후, 식사가 끝난 드래곤은 기분이 좋은지 날개죽지의 긴장을 풀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우우우-
드래곤을 둘러싼 공간과 중력장이 일그러졌다.
거대한 몸집이 한 점으로 축소되었다.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배불러?”
“응, 고기 맛있어!”
아이의 모습을 한 드래곤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바위 계곡 주변은 온통 갈갈이 찢겨 뼈만 남은 와일드 보어의 사체로 가득했다.
위력적인 마수지만, 드래곤 앞에서는 돼지고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먹는 양이 부쩍 늘었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 금방 성체가 될지도 모르겠다.
화아악-
한건우는 날개를 펴고 수직으로 높이 올라갔다.
와일드 보어의 사체가 널린 바위 계곡을 지나, 멀리 산골짜기를 바라보았다.
균열의 규모가 꽤 컸다.
‘균열의 주인을 먼저 찾아볼까?’
김도경이 들어오기만 하릴없이 기다리자니 조금 무료했다.
어차피 균열을 공략해도 바로 닫히는 건 아니니.
몸을 좀 풀어볼까, 싶던 순간.
“흐흐···.”
“...?”
전형적인 악당의 웃음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한건우가 시선을 내렸다.
계곡 아래. 용병 하나가 아이의 목에 칼을 대고 있었다.
다른 놈은 등에 총구를 들이댄 채였다.
“아빠?”
아이가 해맑고 또랑한 눈으로 한건우를 올려다보았다.
용병들이 긴밀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한건우가 방심하는 사이 약점을 잡았다는 듯, 기뻐하는 눈치였다.
“네 딸이 죽는 걸 보고 싶나?”
드래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용병이 기세 좋게 외쳤다.
“당장 내려와서 이걸 차는 게 좋을 거다.”
철컥!
또다른 용병이 마력 저감장치가 달린 수갑을 땅에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