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습격 (1) - 복수의 협조자
드래곤이 있던 자리에 나타난 건 조그만 여자아이였다.
초등학교 막 입학한 저학년 정도나 될까.
하얀 볼이 오동통했다.
아이가 자기의 새로운 몸을 신기한 듯 내려다보았다.
두 손을 눈앞에 들어서 손바닥과 손톱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얼굴은 집중한 듯 무표정했다.
“너···.”
한건우는 말문이 막혔다.
주위를 둘러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바로 드래곤이라고.
한건우를 바라본 아이가 활짝 웃었다.
사막에 온통 꽃이 피는 것처럼 극적인 변화였다.
명화에 나오는 아기 천사가 웃는 모습 같기도 했다.
“아빠!”
아이의 목소리는 쨍하고 맑았다.
머릿속으로 들려오던 소리와 거의 똑같았다.
아이는 우다다 뛰어오더니 폴짝 뛰었다.
점프의 발판으로 쓴 건 수장룡의 사체였다.
한건우가 받아줄 거라고 믿고 의심 없이 허공에 몸을 던진 것이다.
터억!
“윽.”
한건우가 엉겹결에 아이를 받았다.
깃털처럼 가볍게 보였는데, 보기보다 몸이 단단하고 몸무게가 묵직했다.
겨드랑이를 잡힌 아이가 꺄르륵 웃었다.
한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를 안정적으로 고쳐안았다.
여동생의 옛날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귀··· 귀여워.”
한건우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멀리서 지켜보던 임수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가 고개를 돌려 임수호를 홱 돌아보았다.
갑자기 아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동공이 세로로 쫙 찢어지면서, 살기가 거침없이 뿜어졌다.
“감히 어디서!”
아이는 임수호를 공격할 기세였다.
임수호가 제자리에서 주춤했다.
“어허.”
“왜요?”
한건우가 엄격하게 경고했다.
아이가 어깨를 움츠리고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내 동료들을 공격하면 안 돼.”
“하지만 나보고 귀엽다고 하는걸. 난 크고 강한데.”
이걸 제대로 잡아두지 않으면 언젠가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아이는 못내 억울한 기색이었다.
아마 귀엽다는 말을 자신을 무시하는 말로 받아들인 모양.
“조심하라고 할게. 그 대신 약속해. 내 동료들은 절대로 해치거나 위협하면 안 되는 거야.”
“응.”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으로 있을 때보다 훨씬 훈육이 쉬운 느낌이었다.
‘귀엽다.’
해츨링일 때는 아기 같았지만, 아성체로 자라난 후에 잊고 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를 타고 조종하면서 전장에 나갔다니.
약간은 양심의 가책이 밀려올 정도였다.
한건우는 정신을 차리고 궁금한 걸 물었다.
“어떻게··· 인간이 된 거지?”
“이제 몸을 바꿀 수 있을 때가 되어서.”
드래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신비로운 설이 있었다.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한건우이리라.
뇌룡의 심장 조각이 몸에 융합된 덕분에 시간의 차원을 건너왔으니까.
마수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그렇듯, 정확한 근거가 없는 괴담 수준의 이야기도 많았다.
우선 몸을 다른 생물로 바꿀 수 있다는 <폴리모프>.
그 변화가 꽤 정교해서, 사람으로 변해도 감쪽같이 모를 정도라고 했다.
그런 사람을 <용인>이라고 부른다고.
호사가들이 좋아하는 헛소리인 줄 알았던 전설이 진짜였다.
한건우는 품에 안긴 아이의 얼굴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은은하게 보랏빛 반사광이 돌긴 했지만, 그것뿐.
보통 여자아이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내 드래곤은 암컷이었구나.’
인간형으로 변하고 나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저, 아까는 미안···.”
임수호가 호수 위로 얼음 길을 만들며 다가왔다.
그의 걸음거리가 쭈뼛거렸다.
드래곤에게 첫인상부터 미운털이 박힌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흥!”
아이는 콧방귀를 뀌며 도도하게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으로 있을 때도 하던 동작이었다.
그런데 느낌은 전혀 달랐다.
‘정말··· 귀엽다!’
임수호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건방지게 굴어도 봐줄게. 아빠의 동료니까.”
“아, 하하···.”
임수호는 일단 그 정도로 만족했다.
어느새 임진호도 따라와 있었다.
동생이 된통 당하는 걸 본 터였다.
드래곤에게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건우에게 물었다.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
드래곤이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갸웃거리며 한건우를 돌아보았다.
한건우는 아차 싶었다.
‘이제까지 이름도 안 지어줬어.’
사실 이름이 필요 없었다.
아레스 길드의 드래곤은 유일무이한 존재나 다름없었으니까.
단순히 그냥 드래곤, 한 단어면 끝이었다.
굳이 구별해 부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한건우의 입장이었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으로 한건우를 올려다보는 아이를 보니, 자신이 무신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머!”
임수호와 임진호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들어온 아이를 보고, 차은비가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누구 딸이에요?”
길드 회의실까지 들어왔으니, 길드원의 가족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차은비에게 미처 설명할 틈도 없었다.
그녀의 태도가 너무 뜻밖이라, 대처를 못했다는 게 맞았다.
차은비가 아이 앞에 앉아서 눈높이를 맞추었다.
“어머, 볼이 찹쌀떡 같아. 너무 귀엽고 예쁜데요.”
“어, 그게...!”
임수호와 임진호가 흠칫했다.
‘저 드래곤은 귀엽다는 말을 싫어하는데, 미리 말해줄걸!’
아이가 미처 반응하기 전, 차은비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었다.
“자, 간식 먹을 사람?”
“간식?”
아이는 신기한 눈으로 사탕을 관찰했다.
임수호는 조마조마했다.
한순간 무섭게 바뀌는 아이의 모습을 봤던 까닭이었다.
그가 조심히 끼어들려는 참이이었다.
아이가 사탕을 홱 낚아챘다. 사탕을 껍질채 입에 넣으려고 했다.
차은비는 엉뚱한 아이의 모습에 활짝 웃었다.
“이리 줘봐. 이모가 껍질 까줄까?”
차은비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사탕을 까주었다.
아이는 경계심 없이 입을 벌리고 사탕을 받아먹었다.
“...간식 맛있어.”
말 그대로 난생처음 맛보는 달콤한 맛.
아이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모한테 자주 놀러올래? 맛있는 거 많이 줄게.”
“응!”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수호와 임진호 형제는 기적을 일으킨 성녀라도 보는 눈길로 차은비를 바라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은비는 손끝에서 <신의 가호>의 은빛 실선을 뽑아내더니, 허공에서 눈꽃 모양을 만들었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했다.
아이의 천진한 시선이 눈꽃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은빛 빛무리를 날리는 눈꽃은 길드 회의실 구석구석을 나비처럼 날다가 펑 하고 터졌다.
아이가 까르륵 웃었다.
벌써 어색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회의실 안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밝아졌다.
“....”
임수호는 입을 떡 벌렸다.
균열에서 나오기 전, 아이와 친해지려고 해봤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드래곤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변했을 때도, 괜히 어색하기만 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얌전히 등에 얻어타고 돌아왔다.
임진호가 말했다.
“저런 면도 있었네.”
“그러게, 아까 난 귀엽다 한 마디 했다가 죽을 뻔···.”
“아니, 차은비 씨 말야.”
임수호는 이상한 낌새를 채고 형을 돌아보았다.
임진호가 차은비를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에서 열기가 느껴진다는 게 저런 걸까.
그의 옆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아주 뚫어지겠다, 뚫어지겠어.’
임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이 남자답고 멋지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차은비에게는 가망이 없어.’
워낙 콧대가 높아서인지.
차은비는 남자에게 눈길 한 번을 안 주었다.
세간에는 한건우와 사귀었다가 헤어졌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게 헛소문이라는 건 길드원들이 잘 알았다.
상급 각성자는 물론, 유명한 배우와 CEO까지.
차은비에게 대쉬했다가 거절당한 남자만 한 트럭이었다.
심지어 외국의 최상급 랭커들도 다 차였다고 했는데.
자칫하면 그 목록에 자기 형이 이름을 올리게 생겼다.
덜컥, 회의실 문이 열렸다.
차은비와 놀고 있던 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아빠!”
“응? 아빠 왔어?”
문 쪽을 돌아본 차은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유령이 나왔어도 그보다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아··· 아니죠?”
“....”
차은비가 당황을 감추려고 웃다가, 아이를 보고 다시 심각해졌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어딘가 닮았기도···.”
“저, 차은비 씨.”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큰 애가 있다고요? 말이··· 안 되는데.”
차은비는 지금 남이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듯.
혼잣말을 하면서 한건우와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아빠 맞아!”
아이가 불퉁한 말투로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차은비의 표정은 볼만했다.
‘휴.’
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부정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한건우가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차은비 씨. 이 아이는 제 딸이 맞습니다.”
“네?”
“뭐, 알에서 태어나긴 했지만요.”
“...?”
차은비의 눈이 흔들렸다.
한건우의 얼굴에는 농담의 흔적이 없었다.
차은비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아이를 돌아보았다.
“그게, 설마···.”
차은비는 한건우가 준 힌트를 알아들었다.
그제야 아이를 찬찬히 바라보며, 기감의 흐름을 느껴보았다.
‘그냥 어린애인데···?’
그녀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굳이 특이한 점을 찾자면, 보기보다 뼈가 튼튼해 보이는 것 정도?
아이는 뿌듯해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한건우가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를 딸이라고 부른 게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한건우는 차은비의 반응을 보며 안심했다.
‘겉으로 티가 안 나는 건 알았지만. S급 각성자인 차은비가 못 알아볼 정도라니.’
그렇다면 이 아이가 용인이라는 걸 알아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넌 들어가 봐.”
“예, 내일 뵙겠습니다.”
김도경은 비서를 돌려보냈다.
비서는 생긋 웃으면서 물러났다.
‘천명환 그놈보단 훨씬 쓸만하단 말야.’
새 비서는 김도경의 마음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김도경이 안전가옥으로 쓰는 호텔 스위트룸.
한건우가 찾아왔던 그 방에, 위험한 인물이 찾아와 있었다.
표독스러운 인상의 여자였다.
“그자는 언제 치면 되겠습니까?”
여자의 유창한 한국말에 중국 억양이 미미하게 묻어있었다.
“우선 앉아서 얘기하시죠.”
김도경은 여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한건우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군. 잘 됐어.’
그녀는 중국 천망의 간부급 요원, 련화.
일명 <과학자>라 불리는 여자였다.
련화는 천망 내에서도 악명이 높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였다.
‘대대로 독과 암기를 다루는 무인 가문 출신이고··· 각성 전에는 연구원이었다고 했나.’
뒤늦게 각성한 련화는 고유특성도 가문의 핏줄에 맞게 개화했다.
만주 작전은 사실 련화와 김도경이 합작으로 추진한 거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련화의 존재감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련화라는 천재적인 연구원이 없었다면, <아르고스> 쪽에서도 만주 작전은 시도할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
인간의 생명력을 유체 형태로 뽑아내어 에너지로 이용하기 위한 사악한 연구.
그 연구의 총책임자가 련화였으니까.
지금은 둘 다 비슷한 입장.
목적이 같은 두 사람이 만난 셈이었다.
‘그래봤자 이 여자는 아르고스의 협조자일 뿐. <사도>는 나야.’
김도경은 우월감을 가지고 련화를 맞이했다.
련화는 예전에 본 것보다 훨씬 초췌해져 있었다.
눈빛의 독기도 흉흉했다.
련화는 오랜 시간을 함께하던 동료를 한건우에게 잃었다.
자신은 겨우 순간이동 능력을 가진 요원이 도와줘서 목숨을 건졌지만.
그녀 역시 한건우의 창에 찔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창에 찔리지 않았더라도 천망에 의해 거의 죽임당할 뻔했다.
한건우를 향해 발사한 그녀의 맹독 무기가 어쩐 일인지 한순간에 순간이동 능력자를 꿰뚫어 버렸다.
그 때문에 배신자로 의심받아 억울하게 고초를 겪기도 했다.
조직의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고도, 겨우 자리를 보전할 뿐.
련화는 이제 그전처럼 조직 내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이제 련화의 뇌리를 지배하는 건 한 남자의 모습뿐이었다.
‘한건우··· 반드시 고통스럽게 죽인다.’
도무지 한건우를 공격할 빈틈이 없었다.
특히 날이 다르게 자라는 드래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시간을 끌면 점점 더 어려워질 겁니다. 그때 본 드래곤은 아직 아성체였습니다. 점점 더 강해지기만 하겠죠.”
그건 김도경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습니다. 용기사로 전직까지 했으니, 앞으로도 드래곤과 떨어져 다닐 리 없을 테고요.”
여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김도경을 바라보았다.
“그런 소리 할 거면 왜 나를 부른 겁니까?”
김도경은 여유로운 태도를 꾸며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그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여자가 전적으로 도와준다면, 불가능은 아닐 거야.’
김도경이 싱긋 웃었다.
“해결책은 쉽습니다. 아무도 한건우를 돕지 못할 때. 드래곤도 주위에 없을 때 불시에 습격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