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29화 (129/238)

#129토사구팽

‘한쪽 눈이?’

여자의 눈이 이상했다.

여자의 오른쪽 안구가 황금빛으로 변하면서 또렷해졌다.

반대로 평범한 왼쪽 눈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고스의 눈이다.’

맨 처음, 홀로그램으로 보았던 황금색 눈과 같은 빛깔이었다.

아르고스의 눈이 여자의 몸을 빌려 직접 현신한 것이었다.

황금을 녹인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선명한 홍채.

동공이 고양이처럼 커졌다가 쫙 수축되었다.

화악-

여자의 금안이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냈다.

우우웅-

좁은 차 안의 공기가 짙어졌다.

피부를 누르는 공기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듯했다.

“윽.”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한건우는 중력 역가중을 걸어 압박을 버텼다.

아르고스의 금안에 흥미롭다는 빛이 어렸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각성자 한건우.」

기계음처럼 부자연스러운 목소리.

이질감이 느껴졌다.

목소리마저 바뀌어 있었다.

터엉-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압박이 더 강해졌다.

“큭···.”

한건우는 중력을 버티면서 대답했다.

“난 분명히 직접 만나자고 했어. 이렇게 남의 몸을 빌리는 게 아니라.”

여자의 금안에 기분 좋게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붉은 입술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여자의 표정이나 행동이 딴 사람처럼 달라졌다.

아르고스의 주인이 완전히 그녀의 정신을 차지한 것 같았다.

‘지금 이 여자를 죽이면 어떻게 되려나. 여자만 죽는 건가?’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았다.

「네 주인을 바로 알아보다니. 눈치가 빠른 자로군.」

“그래, 선물은 잘 받았나?”

김도경이 원하는 대로 정남준 대통령을 움직이는 것.

그게 아르고스의 주인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었다.

「기대한 것보다 나았다.」

“인사는 됐어. 언제 직접 만날 수 있지?”

한건우는 안달이 난 사람처럼 물었다.

여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직접 만나고 싶다는 건, 사도가 되고 싶다는 건가?」

“그래.”

「재미있군···. 사도가 무슨 의미인지는 아나?」

“김도경 지부장에게 들었어. 주인의 계시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우리의 힘을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충성하고 따르겠다? 왜 갑자기 변했지?」

터엉-

보이지 않는 압박이 한층 심해졌다.

어찌나 압력이 강한지, 호흡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압박을 버티는 한건우의 등에 땀이 배어났다.

한건우는 눈을 똑바로 뜨고 여자의 금안을 마주보았다.

“난··· 변한 적이 없어.”

「그러면?」

“위로 올라가고 싶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가겠어. 다른 각성자들처럼 길드 사업이나 돈벌이 정도로 만족하고 싶지 않아.”

한건우는 힘을 주어 말했다.

반쯤은 본심이었기에 진심이 실렸다.

그리고 한건우가 이제껏 보인 행보와도 맞아 떨어졌다.

「사도에게는 큰 책임이 따르지만, 많은 이들이 그 권력만 보고 부나방처럼 달려들지. 너도 그런 자들 중 하나인가?」

형형하게 빛나는 금안은 예리한 칼날 같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한건우를 해부하듯 파고들었다.

여기서 부정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한건우가 외치듯이 말했다.

“13번째 사도의 자리가 비었다고 하지 않았나? 날 사도로 만들어준다면, 무엇을 시키든지 해내겠어.”

한건우는 간절했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잘하면 아르고스의 주인이라는 놈을 직접 만나서 족칠 수 있어!’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아르고스의 주인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하하하···.」

금안의 여자가 소리내어 웃었다.

기계음을 닮은 목소리가 곧 은근해졌다.

「13번째 사도는 네가 죽이지 않았나?」

“내가, 죽였다고?”

한건우는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그 정도의 거물을 죽인 기억은 없었다.

「13번째 사도는 흑천회의 검귀, 그의 자리였다.」

“...뭐?”

천만 뜻밖의 이름이었다.

일본 대마도에서 죽인 야쿠자의 두목, 검귀.

그에게서 빼앗은 요검 이페탐이 아직도 한건우의 무기들과 함께 잠자고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한건우가 죽이지 않았다면, 검귀는 어마어마한 악행을 저질렀을 것이다.

일본 야쿠자 조직을 통일하고 총재에 오르는 건 물론.

요검 이페탐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이계의 재료로 강력한 마약을 만들어 전세계의 판도를 뒤바꾼다.

‘그 배경에 이놈들이 있었다니.’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뭔가 악행이 일어날 때마다 대충 이놈들을 배경으로 찍어도 맞을 수준 아닌가?

「자격만 증명한다면, 13번째 사도와 9번째 사도를 동시에 맡길 수도 있다.」

“동시에?”

「한국과 일본 서부, 그리고 중국의 동부. 그 지역을 모두 담당하는 거다.」

“....”

공통점이 있었다.

이제까지 한건우가 활약한 지역들이었다.

“그 자격을··· 어떻게 증명하면 되지?”

한건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상당히 어려운 증명일 것 같았다.

현직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말까지 꺼냈던 그들이다.

그것도 고작 주인을 만나는 조건으로.

‘이번에는 얼마나 어려운 걸 내걸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한건우는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잠깐. 일본 서부는 그렇다치고, 한국과 중국 동부?”

누군가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특수안보부의 서울지부장인 김도경.

그는 중국 동부 지방으로 파견을 다녀오기도 했다.

「네가 사도 김도경을 죽인다면, 9번째 사도와 13번째 사도 자리를 동시에 주겠다.」

“....”

그러면 그렇지.

주인이니, 사도니 하는 말로 포장하지만.

서로의 힘을 이용하고 필요없어지면 버리는 관계에 불과한 것이다.

한건우는 <주시자의 뱀>으로 엿들은 말을 되새겼다.

검은 눈의 주인이 김도경을 질책하면서 한 말이었다.

- 자네가 한 가지만 해내면 벌은 없을 거야. 각성자 한건우를 아르고스의 사도로 만들어라.

- 아르고스의 주인 중에서는 자네의 책임을 물어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

- 한국뿐만이 아냐. 자네의 부주의로 중국에 끼친 손해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군.’

이들은 그때부터 이미 김도경을 버렸다.

입장을 바꾸어 보면 단순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김도경은 죽을 죄를 졌다.

김도경이 대체 불가능한 자였다면 계속 살려놨겠지만.

‘내가 김도경보다 강하다고 판단되니, 나를 데려와서 김도경을 대체하려고 했군.’

김도경의 역할은 한건우를 끌어오는 미끼, 그걸로 끝이었다.

한건우가 미끼를 덥썩 무는 것 같으니 김도경을 버린 것 같았다.

한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받아들이겠다.”

이번에는 여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았지만.

김도경에게 들은 대로라면, 사도가 되려면 주인을 꼭 만나게 된다고 했다.

‘그때가 되어야 눈알 말고 진짜 정체를 보겠군.’

슈우우-

금안에서 광채가 사라졌다.

기운을 거두는 것 같았다.

계속 한건우의 온몸을 짓누르던 압박도 서서히 약해졌다.

여자가 서서히 눈을 감았다 뜨자, 흑갈색 눈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 같은 표정을 짓던 얼굴 근육도 풀렸다.

여자는 잠깐 사이에 많이 지친 듯했다.

한건우를 살펴보더니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무사하시네요?”

“...압력에 터져 죽기라도 했을 줄 알았나?”

“뭐, 비슷해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턱!

말없이 사라지려는 그녀의 팔을 한건우가 붙잡았다.

“당신, 정체가 뭐지?”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었다.

스윽-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여자가 너무나 쉽게 팔을 빼낸 것이다.

‘뭐 이런···?’

순간이동 같은 능력을 쓴 건 아니었다.

딱히 힘을 쓰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여자는 그냥 자연스럽게 팔을 빼내 버렸다.

“!”

한건우가 조용히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제껏 이런 상대는 처음이었다.

웬만한 각성자는 어느 정도 능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충돌이나 접촉을 해보면 감이 왔다.

그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전혀 가늠이 안 돼.’

이 여자는 어찌 보면 평범한 각성자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몰랐으면 한건우도 착각했을 것이다.

“곧 뵈어요.”

여자가 태연하게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한건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김도경에게서 <주시자의 뱀>을 거두어 올까.’

이제 저쪽이 훨씬 영양가가 있을 것 같았다.

**

김도경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있었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허망함, 그리고 의아함.

한참을 기다렸다.

아르고스의 주인 중 아무도 자신을 만나주지 않았다.

직접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전과 똑같이, 홀로그램 눈을 통해서 보고하고자 한 것이었다.

“....”

별 일 아닌 우연으로 넘기려 했으나, 마음을 가다듬기가 쉽지 않았다.

‘꺼림칙한데···.’

김도경은 그다지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직감 같은 비합리적인 것을 믿지 않았다.

김도경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최근 아르고스의 주인이 보인 반응을 하나씩 되새겼다.

‘지난번에도··· 조금 이상했어.’

김도경이 큰소리칠 입장은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고도 작전을 말아먹었으니까.

거의 전쟁 하나를 실패한 패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아르고스의 주인은 희망을 주었다.

한건우를 영입해 오면 징벌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그걸 이렇게 빨리 해냈는데···.’

김도경도 자신이 이렇게 쉽게 성공할 줄은 몰랐다.

바로 전까지 죽도록 싸우던 관계인데, 갑자기 영입 설득을 한다는 게 쉬울 리 있나.

‘내가 아니었으면 실패했을 거다.’

김도경은 스스로를 치하했다.

한건우와 같은 자들을 한두 번 다뤄 봤던가.

‘특별한 존재라고 치켜세워 주면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지.’

제아무리 강해도, 20대 초반의 젊은이일 뿐.

게다가 갓 각성해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각성자.

김도경이 각성자 사관학교에서 매일같이 본 부류였다.

‘그리고 남자라면··· 힘과 권력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김도경의 예상은 적중했다.

김도경의 제안에 한건우가 솔깃해하며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다.

그 모습은 김도경의 철학을 더욱 굳혀주었다.

‘아닌 척해도 다 마찬가지야. 자신에게 기회가 안 와서 질투하는 것뿐. 자신에게 사다리가 내려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한다.’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은 둘 중 하나였다.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하거나.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아서 아닌 척하는 것이거나.

그 미묘한 지점을 정확히 건드려서, 김도경은 한건우의 마음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 증거로, 한건우는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만나 협박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상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그리고 보고를 요청해도, 아무도 만나주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대체 무슨 흐름인지.

김도경의 두뇌가 핑핑 돌아갔다.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이런 흐름이 낯설지가 않았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설마.”

얼굴이 벌개진 김도경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노한 나머지 그의 몸 주위로 광선이 번쩍였다.

쩌억!

고급 마호가니 목재로 만든 책상이 두동강났다.

스스로 잘못을 곱씹게 만들며 무력하게 만드는 것.

간혹 작은 희망을 주었다가 빼앗는 것.

바로 김도경 자신이 부하를 관리할 때 쓰는 수법이 아닌가.

그가 필요없는 부하를 정리할 때 쓰는 방식이었다.

입장이 정반대라서 얼른 인식하지 못했다.

빠드득.

김도경이 이를 갈았다.

“···내가 이제껏 어떻게 해왔는데.”

김도경이 욕설을 내뱉었다.

토사구팽, 네 글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뒷방 늙은이 취급이 아닌가.

그의 분노는 당연하게 한건우를 향했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이런 수모를 당할 일은 없었어···.”

김도경이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주 어릴 적 고친 습관이 저절로 나온 것이었다.

김도경의 머릿속에서, 한건우는 몹시 크고 위압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어쩌면 자신이 과민했을지도 모른다.

아르고스의 주인들은 자신을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죽여야 해.”

한건우가 사도로 들어온다면, 금방 김도경을 치고 올라갈 것 같았다.

“그 꼴은 못 보지.”

김도경의 마음이 굳었다.

어차피 했어야 했을 일이었다.

김도경은 한동안 무시하고 있던 연락을 기억해냈다.

중국 천망의 <과학자>, 한건우에게 동료를 잃은 그 여자 요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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