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설득
한건우는 정남준 대통령의 반응을 예상했다.
화를 내거나 딱 잡아뗄 거라고.
그랬다면 조금은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정남준 대통령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너털웃음을 지은 것이다.
“허허··· 제가 한 방 먹었군요. 설마 여기서도 협박을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남준 대통령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김도경은 미인 비서를 통해서 이미 한건우에게 자료를 보냈다.
김도경이 원하는 건 각성자 관리법 개정안이었다.
현재 각성자들을 관리하는 건 각성관리청이었다.
대부분 비각성자인 행정관료가 일하고 있었다.
즉, 어찌 보면 일반인이 각성자를 관리하는 셈이었다.
그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개정되는 법에 따르면, 각성관리청의 고위 공무원은 각성자만이 맡을 수 있었다.
현장을 몰라서 현실성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언뜻 보기에는 별것 아닐 수 있지만.
그건 각성자를 비각성자 위에 두는 정책의 시작이었다.
대통령이 한사코 서명을 반대하고 있어, 통과가 늦어지고 있는 상황.
한건우는 대통령을 설득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정도 말이 안 통한다면, 앞으로도 협력은 어려워.’
“대통령님이 그 법안을 반대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정남준이라는 한 개인이 반대하는 거로 생각하시면 틀렸습니다.”
정남준 대통령은 조금도 지체 없이 청산유수로 답했다.
평소에 깊이 생각해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요?”
“이 법안은 사소해 보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일반인을 각성자의 하위 계층으로 만들려는 흐름 말입니다.”
“....”
“저는 수많은 평범한 일반인, 즉 비각성자를 대표해서 반대하는 겁니다. 누가 이 자리에 앉아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남준 대통령은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
그가 결연하게 말했다.
‘제법 날카로운데?’
한건우는 속으로 감탄했다.
대통령의 시야가 정확한 것 같았다.
회귀 전에도 만주 사태 이후 수많은 법이 줄줄이 바뀌지 않았던가.
“협박을 많이 받았을 텐데요. 아닙니까?”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정남준 대통령은 용기 있는 자 같았다.
한건우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 혼자만 특수안보부, 아르고스와 싸우려는 게 아니었어. 대통령은 대통령의 자리에서 싸우고 있었구나.’
한건우는 정남준 대통령의 눈빛을 보았다.
웬만한 말로는 그를 설득하기 어려워 보였다.
“대통령님은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대통령은 어떨까요?”
“그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방금 누가 그 자리에 있어도 마찬가지일 거라 하셨죠?”
“예.”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당신의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대한민국의 마지막 일반인 대통령이 될지도 모릅니다.”
정남준 대통령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대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한건우가 알던 사실이었다.
회귀 전, 정남준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일반인 대통령이기도 했다.
정남준이 죽은 이후로 비각성자는 대통령에 당선되지도 못했다.
대통령 자리는 각성자 사관학교 출신들이 차지했다.
“자칫하면 앞으로는 일반인을 대표할 목소리 자체가 없겠죠.”
“....”
“그 법안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대통령님은 이 나라의 미래에 중요한 존재니까요. 본인 생각보다 훨씬 더요.”
“지금··· 암살 운운하며 협박하시는 겁니까? 저에게 그런 건 통하지 않습니다.”
정남준 대통령은 얼굴을 굳히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그때, 한건우가 품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종이에는 사람 이름이 몇 개 쓰여 있었다.
모두 청와대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 자들과 함께 일하시죠?”
화르륵···.
정남준이 이름을 막 확인하자마자, 한건우는 허공에서 종이를 불태웠다.
청와대 귀빈실에는 강력한 마력 보호막이 3중으로 둘러쳐 있었다.
한건우는 그 보호막을 무시하고 화염 마법을 쓴 것이다.
“어, 어떻게···?”
한건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남준 대통령이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어 뒤로 물러났다.
한건우는 벽에 달린 비상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그걸 부수었다.
“!”
정남준 대통령은 바깥에 도움을 청하려다 멈췄다.
부서진 수화기 안에는 구식 도청기가 들어있었다.
파직!
한건우가 손으로 도청기를 간단히 파괴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오히려 옛날 방식이 나을 때도 있다더군요. 특히 이렇게 마력 방어가 철저한 데서는 더 그렇고요.”
“...그건···.”
정남준 대통령이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가 도청되었을 거라는 뜻이었다.
대통령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대화를 복기했다.
문제가 될 건 없는지 찾으려는 것이었다.
‘한건우 플레이어가 법안을 통과시키라며 나를 압박하는 내용이었어···.’
만일 특수안보부가 도청을 한 것이라면, 오히려 좋았다.
“도청기를 심은 범인은 방금 그들 중에 있을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특수안보부가 심은 사람이니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제 주위 사람을··· 모함하려는 겁니까?”
정남준 대통령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들은 정남준 대통령이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정남준 대통령이 죽고 나서도 청와대를 떠나지 않았다.
도리어 정권이 여러 번 바뀔 때마다 승승장구해서 요직으로 갔다.
그 뒷배경은 뻔했다.
“그들을 조사해 보시면 알 겁니다.”
한건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남준 대통령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허공에 날리는 잿가루를 바라보던 정남준 대통령이 말했다.
“한건우 플레이어. 나에게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첫째, 지금처럼 특수안보부를 견제하는 것.”
“그리고?”
“둘째, 그러려면 살아남으셔서 대통령직을 유지해야겠죠.”
정남준 대통령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다.
그가 한건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저는 한건우 플레이어를 잘 모릅니다. 반대로 당신이 특수안보부에서 보낸 사람일지도 모르는데요.”
한건우는 피식 웃었다.
그게 본심이 아니란 걸 알았다.
정남준 대통령은 만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 들었다.
한건우가 특수안보부와 적대시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리라.
‘그냥 날 떠보는 거야.’
어차피 곧 정남준은 자신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불태운 종이에 이름이 쓰여 있던 자들을 조사해볼 테니까.
한건우는 다른 말 하지 않고, 정남준 대통령에게 필요한 제안을 했다.
“대통령님이 당장 저를 못 믿는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건 꼭 하셔야 합니다.”
“?”
“그 법안은 선심 쓰는 척 통과시키세요. 대통령님이 살아만 계신다면 법은 되돌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물밑으로는 다른 작업을 하는 겁니다.”
“뭡니까?”
“군 소속, 이능력 특수전단. 그들을 대통령 직속 부대로 변경하십시오.”
정남준 대통령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특수안보부를···.”
“그렇습니다. 이능력 특수전단은 이제껏 특수안보부의 명령을 따랐죠. 하지만 그들이 특수안보부에 충성을 바치는 건 아닙니다.”
한건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친 각성자들로 이뤄진 특수부대, 이능력 특수전단.
그들은 국가의 명령을 따를 뿐이었다.
특수안보부라는 일개 부처를 진심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특수안보부의 반발은 물론이고, 국민들이 보기에도 좋지 않을 겁니다.”
정남준 대통령도 정치인이니, 화력을 갖춘 권력이 욕심나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 봐도 불가능했다.
대통령 직속으로 강력한 각성자 부대를 둔다?
누가 봐도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도리어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당연히 정식으로 직속 부대로 두라는 건 아닙니다. 그대로 군 소속에 두시죠.”
“그러면···?”
“특수안보부처럼 하십시오. 대장을 바꾸고, 대장에게 직접 임무 명령을 내리시죠.”
물론 새 대장이 될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권석진 대장이었다.
부대 내에서 신망이 높은 권석진 대장.
그의 마음속에는 특수안보부에 대한 반감이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특수안보부는 비공식적으로 이능력 특수전단에 장비와 화력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걸 끊을 수 있도록, 대통령님이 직접 지원하시면 됩니다.”
과감한 제안이었다.
대통령이 망설일 때, 한건우는 쐐기를 박았다.
“물론 그 지원은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
[솔직히, 감명받았습니다.]
김도경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평소와 달랐다.
약간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원하던 법안이 통과되어서 기쁜가?”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군요. 별것도 아닌데 골치를 앓았으니까요.]
그뿐일까.
한건우가 자기의 손발처럼 움직였다는 생각에 퍽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김도경은 제대로 오해하고 있을 것이다.
한건우가 정남준 대통령을 협박해서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도청된 내용도 들었다면, 더 그랬겠지.’
청와대 안에서 웬만한 각성자는 마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한건우라고 해도 별 수 없었겠거니, 쉽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 너의 주인에게 주는 선물이다. 성공하면 너의 주인을 직접 만나고 싶다.
김도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주인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연락 드리죠.]
시간을 비워 놓고 기다리라며, 김도경은 전화를 끊었다.
한건우는 자신의 차로 다가가 차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앉기 전.
퍼억!
한건우는 뒷좌석에 전격을 쏘았다.
슈우우···.
“너무하시네요.”
교태가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미리 방어막을 두르고 있던 것 같았다.
‘김도경의 비서인가.’
죽은 천명환의 후임자라는 미인 비서.
그녀는 태연하게 한건우를 마주보고 있었다.
“남의 차 안에서 그러고 있으면 죽기 십상이지.”
“한건우 씨, 기다렸어요.”
한건우는 의아했다.
대통령을 만나고 온 뒤, 한건우는 수시로 김도경을 관찰해 왔다.
도청보다 훨씬 나은 <주시자의 뱀>을 통해서였다.
‘김도경이··· 비서를 불러서 날 찾아가라고 명령한 적이 없을 텐데?’
잠시 시야에서 벗어난 사이에 명령한 것일까.
아니면 비서가 단독 행동을 한 것일까.
여자의 복장 때문에 후자에 무게가 실렸다.
전과 달리 정장 스커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특수안보부 제복도 아니었다.
온몸에 딱 붙는 사제 전투복 차림을 보니, 근무 중이 아닌 것 같았다.
“김도경의 명령을 받고 온 게 아니군.”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마력 방어막을 거두며 웃기만 했다.
한건우는 차에 타서 여자를 돌아보았다.
꽤 실력이 좋은 것 같았다.
“당신, 김도경의 비서잖아.”
“그렇죠.”
“김도경의 지시만 따르는 게 아니었나?”
여자는 빙긋 웃기만 했다.
“한건우 씨를 직접 만나뵙기 전에,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셔서요.”
“?”
여자가 손짓을 하자, 열려있던 차문이 스르륵 닫혔다.
‘염동력?’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간 착각할 뻔했지만, 아니었다.
‘바람 관련 특성이다.’
특성 활용이 지나치게 깔끔했다.
무술로 치면 잔동작이 전혀 없는 셈이었다.
‘누구지?’
이 정도 되면 한건우가 알아볼 법도 한데.
고개를 갸웃하던 한건우는 섬찟해졌다.
여자의 오른쪽 눈에 기이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