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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먹는 플레이어-127화 (127/238)

#127원하는 게 같다

그 전날, 이능력 특수전단의 부대 훈련장.

만주에 다녀와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연일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다.

오늘 훈련을 주관하는 건 권석진 분대장이었다.

부대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리더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대장님···?”

“아, 서킷이 벌써 끝났나. 부상자 없지?’

“예!”

분대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권석진 분대장은 깊은 눈으로 자기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한 명 한 명, 제 목숨처럼 아끼는 부하들이었다.

부관이 조용히 곁으로 다가왔다.

“분대장님, 마무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들어가서 쉬시죠. 요새 피로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 괜찮네.”

권석진은 만주 작전 이후로 가끔 딴 생각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원래 철두철미하고 빈틈 없는 그였다.

훈련이 끝나고, 걱정이 된 부하들이 의견을 나눴다.

“분대장님 조금 이상하네.”

“그때 임무 실패 이후로 타격이 크신 것 같은데.”

“알파스의 박이경을 제압하라던 그 임무 말이지?”

“응.”

“그게 분대장님 잘못인가? 임무 지시 미스지. 막말로 특수안보부 김도경 지부장도 실패한 걸.”

“아냐, 내가 보기엔 저번 연구소 폭파 사건 때 박 중사 죽은 일··· 그 이후로 쭉 저러셨다고.”

“하··· 그래도 오늘은 좀 더 다운되셨는데.”

부하들은 저마다 이유를 추측했다.

아무도 진짜 이유는 짐작하지 못했다.

권석진은 혼자서 부대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침상 옆을 서성이며 거울을 보자 까칠해진 얼굴이 비쳤다.

‘특수안보부, 김도경···.’

그가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김도경 지부장이 직접 건네주었던 알약 형태의 강화 포션.

그 안에 들어있던 붉은 가루였다.

- 최근에 개발된 신제품입니다. 안전 검증은 끝났으니 걱정 마십시오.

김도경 지부장은 그걸 부하들에게 먹이면 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권석진은 감사하다며 알약을 받아왔다.

한건우의 경고를 듣지 못했다면, 그 지시를 따랐을 것이다.

- 절대로··· 이 약을 부하들에게 먹이지 마십시오.

한건우의 얼굴이 전에 없이 무섭게 변했다.

그가 그렇게 분노한 건 처음이었다.

- 지시를 안 따르면 의심을 받겠죠. 제 말대로 하시면 됩니다.

한건우의 제안은 단순했다. 순서만 바꾸는 것이었다.

부하들에게 미리 알약을 먹게 하지 말고, 한건우를 만난 직후에 먹으라고 할 것.

‘그게 무슨 차이지?’

권석진은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한건우가 염동력으로 알약을 뺏은 덕분에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어갈 수 있었다.

권석진은 이 약의 진실을 꼭 풀어내야만 했다.

의구심을 품고 살 수는 없으니까.

미리 알약을 뜯어서 안에 있는 가루 성분을 조금씩 모아놓길 다행이었다.

한국에 귀국한 후, 권석진은 사설 연구소를 찾았다.

친한 연구원 동생에게 가루 일부를 건네주고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절대 극비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한 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훈련 직전. 분석이 끝났다는 문자가 왔다.

전화만 하면 그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권석진은 먼저 주위를 살폈다.

저번에 한건우에게 기습당한 적이 있어, 신중하게 기감을 돌려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위성전화 칩을 바꿔 끼웠다.

이것도 마찬가지. 혹시 모를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석진 형님! 이거 대체 어디서 났어요?]

연구원 동생은 몹시 흥분한 눈치였다.

인삿말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왜. 안 좋은 거야? 잘못 먹으면··· 안 좋은가?”

권석진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 침착한 척 물었다.

[와, 어디서 이런 걸 만들었지? 아무리 요새 강화 시술이다 뭐다 화제가 됐다지만··· 간도 크네요]

“뭔데? 난 문외한이니 쉽게 설명해 줘.”

[이계 식물에서 나온 성분 같은데···. 이렇게 혼합한 걸 먹으면 1~2년 안에 제 명에 못 살고 죽을걸요?]

“...너, 그거 정말이야?”

[혹시나 해서 실험용 생쥐한테 먹여봤더니 하루만에 이렇게 됐어요.]

연구원은 동영상을 하나 보냈다. 흰 실험용 생쥐였다.

드러난 살갗이 온통 붉은 반점으로 뒤덮이고, 한 자리에서 기이한 자세로 빙빙 돌고 있었다.

권석진은 순간 아찔한 기분이었다.

[쥐는 사람보다 몸 크기가 작고 신진대사가 빠르니, 효과가 빨리 나온다고 봐야죠. 이거 어디서 압수한 거예요? 완전 악질이네요.]

권석진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연구원 동생은 그 약을 범죄조직에서 빼온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권석진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알고 있는 게 나으니까.

“...이건 꼭 너만 알고 있어라. 말 나가면 너도 위험해지니까.”

[당연하죠, 석진 형님 일인데. 부탁할 거 있으면 또 연락하시고요.]

전화를 끊고 나서, 권석진은 계속 멍한 상태였다.

‘한건우의 말이 진짜였어.’

이제껏 품고 있던 의혹도 점점 짙어졌다.

‘죽은 박 중사의 머리에 있던 그 상처···.’

범죄자 조승재의 난동으로 화마에 휩싸인 연구소.

그 장소에 있던 박 중사는 분명히 멀쩡했다.

기절만 했을 뿐,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중사의 시신을 살펴보다가, 권석진은 분명히 보았다.

박 중사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흰색의 긴 상처를.

‘상처 주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모근에서 잘려있었지.’

매우 예리한 무기를 썼고, 최근에 난 상처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상처는 흔치 않은 흰색이었다.

김도경의 <빛의 군주> 특성이 만들어낸 상처라고, 권석진은 직감했다.

확신이 없어서 묻으려 했지만 점점 심증이 굳었다.

‘박 중사를 죽인 것도 김도경 지부장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합리적으로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수안보부의 고위 간부가 이능력 특수전단의 일개 대원을 왜 죽인단 말인가.

혹시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던 걸까, 애써 상상해보기도 했다.

박 중사가 적국의 스파이가 아닌 이상, 몰래 즉결처분할 일은 없었다.

물론 박 중사는 하늘에 맹세코 스파이 따위가 아니었다.

‘그 자에겐 이능력 특수전단은··· 인간이 아니라 장기말 같은 존재인가?’

쉽게 가져다 쓰고, 아무렇지 않게 폐기하는 장기말.

흔한 표현이지만 이렇게 생생히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온몸 관절이 뒤틀린 채로 빙빙 돌던 생쥐의 모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올라왔다.

그때 전자음이 들렸다. 집중하고 있던 권석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위성전화의 벨소리였다.

‘대통령 각하?’

정남준 대통령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권석진은 호흡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각하, 권석진입니다.”

[권 분대장님. 타지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정남준 대통령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권석진은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고 말했다.

“걱정해주신 덕분입니다.”

[권 분대장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어제 보고를 듣고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권석진은 이미 만주에서 있었던 일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핵심은 언데드 균열, <심연의 부름>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특수안보부의 김도경과 한건우의 의견이 정면으로 부딪친 것.

김도경은 국경 뒤로 퇴각하자고 했고, 한건우 측은 현장에서 맞서자고 했다.

결국 한건우의 활약으로 사태를 막아냈고, 특수안보부 측은 조금도 돕지 않았다는 것도.

마치 원정대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특수부 쪽은··· 마치 일을 키우려는 것 같더군요.]

“....”

대통령은 똑똑했다.

현장에 없었는데도 금방 사건의 본질을 깨달았다.

정치에 어두운 권석진보다는 훨씬 빨랐다.

[한 가지 부탁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곧 만주 원정에서 공을 세운 공로자를 치하하는 행사가 열릴 겁니다. 그전에 꼭 한건우 플레이어를 단둘이 만나고 싶습니다.]

“네.”

매우 쉬운 부탁이었다.

왜 따로 시키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권 분대장님께서 직접 초대장을 들고 가주세요. 직접 보고 와달라고 전해주시면, 그쪽에서도 제 뜻을 알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권석진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무슨 소리지? 무슨 뜻을 안다는 거지?’

열심히 추측해봐도 답이 안 나왔다.

권석진은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히 따를 뿐이었다.

대통령의 초대장을 들고 첫 방문을 했다.

한건우와는 길이 엇갈려서 보지 못했다.

대신에 그 유명한 아레스 길드의 매니저를 만났다.

‘이 자가 그 유명한 금해준이군.’

굴지의 LK그룹 3세.

그 배경은 물론, 우월한 경영 능력으로 유명했다.

‘재벌 회장인 할아버지 못지 않은 일 중독자라고 하던가.’

금해준은 한건우의 길드를 엄청나게 빨리 대형 길드로 키워내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들었다.

예전에는 얼치기 각성자 흉내를 내며 돌아다녔다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소문이 파다했다.

‘각성자 세계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조사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하던가? 그러다 낚은 대어가 한건우라고···.’

“청와대의 오찬 초대라고요, 잘 알겠습니다. 공식적인 행사입니까?”

금해준은 소년처럼 어려 보였지만, 초대장을 살펴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권석진은 어쩌면 그 뜬소문들이 진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건 한건우 플레이어를 직접 만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청와대 직원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권석진은 대답을 피했다.

“일단 일정 확정이 급하니··· 초대장만 전해 주십시오. 제가 따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며칠간이나 한건우를 만날 수 없었다.

권석진은 혀를 내둘렀다.

‘뭐 이렇게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지?’

한건우의 길드가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레스의 길드원들은 포털을 타고 전국구로 출동했고, 한건우 역시 그랬다.

권석진은 초대장에 적힌 당일이 되어서야 겨우 한건우를 만날 수 있었다.

한건우는 청와대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딜 가든지 같은 복장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드래곤 아머를 입고 전투화를 신었다.

“굳이 데리러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대통령님의 뜻은 잘 이해했습니다.”

“예?”

“좋습니다, 저와 함께하시죠. 대통령님도, 그리고 권석진 분대장님도요.”

“...?”

권석진은 얼이 빠졌다.

자기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텔레파시라도 보내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때 말했잖아요, 우리는 원하는 게 같다고.”

“....”

*

청와대 귀빈실로 향하는 복도 앞.

정남준 대통령은 최소한의 경호마저 물리고, 한건우와 단둘이 걸었다.

“저번에도 보셨겠지만, 청와대라는 곳이 생각보다 낡았죠? 하하··· 저도 처음에는 조금 실망할 뻔했습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좋습니다.”

정남준 대통령이 스스럼없이 한건우를 맞았다.

“그래도 우리 요리사들이 식사 하나는 맛있게 한답니다. 드시죠.”

귀빈실에는 정갈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한건우가 예상한 대로, 초대받은 사람은 한건우뿐이었다.

며칠 전 김도경과의 만찬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엔 모든 게 다르지만.’

지난번에는 한건우가 제안을 받는 쪽이었지만, 이번에는 제안을 할 것이다.

정남준 대통령이 속에 있는 말을 꺼내기 전.

한건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통령님, 지금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맞죠?”

“예?”

정남준 대통령이 처음으로 당황한 낯을 했다.

“저에 대해 많은 걸 들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으니까요.”

“하하···.”

“제가 한 가지만 요구해도 되겠습니까?”

“한건우 플레이어는 전장의 영웅 아니십니까? 정부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적극 검토하죠.”

정남준 대통령이 호기롭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 그의 안색이 바뀌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 정책을 통과시켜 주십시오.”

“?”

“지금 통과시키라는 협박을 받고 있을, 그 정책 말입니다.”

정남준 대통령의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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