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천외천
한건우는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가자마자 습관적인 행동을 했다.
밀폐된 공간에 갈 때마다 하는 루틴이었다.
[특성 발동 : 진동 감지]
극도로 예민해진 진동 감지 특성.
사람의 목소리나 기척은 물론, 똑딱거리는 시계의 초침, 전자제품의 미세한 진동까지 다 잡혔다.
‘은신한 요원은 없고. CCTV 같은 것도 없군.’
몸 밖에 마력을 흘려서, 주변의 마력장도 유심히 감지했다.
‘트랩 같은 것도 없어.’
어차피 물리적 트랩은 한건우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으니.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하하, 조심성이 많으시군요.”
“바보가 아니라면.”
“걱정 마시죠. 저도 편하게 얘기해야 하니 녹음 같은 건 없습니다.”
김도경이 뼈 있는 말을 했다.
한건우가 뭘 했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여러 개의 방을 터놓은 스위트룸은 매우 넓었다.
넓은 거실과 응접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외국의 대통령이 올 때 머무는 곳이니, 모든 자재가 고급스러웠다.
창밖으로는 남산의 전경이 훤히 내다보였다.
‘기억한 그대로군.’
이능력 특수전단 시절에 두어 번 스위트룸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경호를 위해, 한 번은 암살을 위해.
임무 없이 온 건 처음이었다.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앉으시죠.”
한건우는 큼직한 대리석 식탁에 앉았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갓 올린 음식이 가득했다.
한건우는 음식이 아닌 김도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방비해 보였다.
항상 입던 제복 코트도 걸치지 않고, 편안한 차림이었다.
특수안보부의 제복은 그 자체로 뛰어난 방어구인데도.
아무런 방어 대책도 없이 한건우와 단둘이 만나다니.
무슨 자신감인가 싶었다.
김도경이 먼저 수저를 들고 은근하게 웃었다.
“새로 뽑은 제 비서는 어땠습니까?”
“그래. 수행을 잘 하더군.”
“뭐든지 잘 하죠. 마음에 드시면 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 별로. 정부 요원을 가까이 두고 싶진 않아서.”
한건우가 방으로 올라오는 잠깐 사이에, 김도경의 비서는 차에서 나눈 대화를 모조리 보고한 것 같았다.
“왜요. 차은비 플레이어도 똑같이 빌려가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나요?”
“그렇게 됐지.”
김도경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한건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한건우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차은비의 마음이 바뀌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드시죠. 약 같은 건 안 탔으니까요.”
김도경은 보란 듯이 먼저 음식을 먹었다.
한건우도 <아이기스의 보호> 특성으로 해독 능력이 있으니, 독이나 약물을 탔더라도 큰 걱정은 없었다.
품위있는 태도로 조용히 식사를 하던 김도경이 말했다.
“한건우 씨, 당신 같은 플레이어는 처음 봅니다.”
“그런가.”
“비슷한 말을 많이 들었겠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당신이 얼마나 독보적인지를요.”
“?”
태도가 너무 바뀌어서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균열 발생 이후에 세상이 완전히 변했다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당신 같은 위치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
“헌데 당신은 아직도 목마르죠.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지?”
“더 많은 힘,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정보.... 이런 것들에요.”
한건우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었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도경의 눈에 번뜩이는 빛이 어렸다.
드디어 말이 통한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속한 특수안보부라는 조직을 잘 아시죠? 이곳만 해도 엄청난 권력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실이었죠.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계는 있었습니다.”
“?”
김도경의 눈빛은 권력에 대한 갈증으로 불타고 있었다.
“특수안보부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세상의 질서가 그냥 유지되는 줄 알았죠.”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
한건우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했다.
김도경은 <아르고스>의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 같았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천외천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하늘 밖에 또다른 하늘이 있더라는 겁니다.”
“특수안보부 위에 상위 조직이라도 있다는 건가?”
“비슷합니다. 저처럼 각 나라의 지도층에서 특별히 선택된 ‘사도’가 모시는 ‘주인’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성을 ‘계시’라고 믿고 따르고 있죠.”
“난 그런 사이비 같은 조직에 별로 끼고 싶지 않은데?”
한건우가 한껏 빈정거렸지만, 김도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속한 조직에 대해 자신감이 대단해 보였다.
“개인은 아무리 강해도 뜻대로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글쎄.”
“간단합니다. 주위 환경 때문이죠. 법과 제도, 정치와 경제, 그리고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들···. 그걸 어떻게 예측하고 통제할까요?”
“신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지. 너희는 할 수 있다는 건가?”
김도경의 말이 낯설지 않았다.
주위의 환경을 예측하고 통제한다는 것.
강력한 힘을 가지고 과거로 회귀한 한건우가 이제까지 해왔던 일이었다.
“예, 바로 그렇습니다.”
김도경은 자신있게 말했다.
“각국 정부, 길드, 기업···. 대부분은 우리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의 흐름을 통제하고, 질서를 만들고 있죠.”
“....”
“한건우 씨, 우리와 함께하시죠.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김도경은 담백하게 제안했다.
한건우는 잠시 생각에 잠긴 척했다.
“아까 ‘사도’와 ‘주인’이 있다고 했나?”
“맞습니다.”
“그렇다면 난 ‘사도’가 아닌 ‘주인’이 되겠어.”
김도경의 입이 벌어졌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금세 은은한 미소를 되찾았다.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로서 충실히 일하면, 주인이 될 수도 있죠.”
“됐어. 개처럼 남의 명령을 따르는 건 별로라서.”
김도경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해졌다.
포크와 나이프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건우 씨, 당신이나 태일제, 원유선···. 우리가 보기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
“굉장히 강하지만, 그냥 길드 마스터에 불과하죠.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지 몰라도, 거기까집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각성자의 역할을 잘못 알고 있어요.”
“무슨 소리지.”
“각성자는 균열 안에서 마수와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들 하죠. 하지만 진짜 각성자가 지배해야 할 건 인간입니다.”
“!”
이건 또 뭔가.
신선한 발언이었다.
한건우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에 탄력받은 김도경이 열렬히 연설하기 시작했다.
“각성자라는 게 뭡니까? 인간 진화의 단계를 뛰어넘은 신인류입니다. 당신도, 나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그런···.”
균열 발생 초기. 딱 저런 발언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사회에서 인정을 못 받던 부적응자나 양아치가 각성한 경우, 저런 논리에 푹 빠져서 일반인을 괴롭히곤 했다.
그들은 모두 각성자 감옥이나 무덤으로 갔지만···.
한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경멸하는 눈빛을 드러낼 뻔했다.
‘아, 아니지.’
김도경에게 설득되는 척을 해야 했다.
한건우는 일단 반론을 펼쳤다.
“하지만 특수안보부의 정책만 봐도, 오히려 각성자를 제어하고 탄압하는 것 같던데?”
“새로운 세계에 모두를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요. 자격이 안 되는 자는 쳐낼 수밖에 없습니다.”
“음···.”
“고민이 되시면 조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사도가 되라는 걸 거절하면? 날 죽이려 들겠지?”
“아마도요.”
한건우는 식기를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옆에 놓인 얼음 잔에 고급 위스키를 콸콸 따랐다.
한건우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독한 술을 한번에 들이켰다.
한건우가 잔을 탁 내려놓고 호기롭게 말했다.
“만약 원한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김도경은 선선히 대답했다.
“한 가지 테스트를 거쳐야 합니다.”
“뭘 하면 되는데?”
“이 자를 죽이면 됩니다.”
김도경이 큰 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열어보니 한 남자의 사진이 나왔다.
“미쳤나?”
한건우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사진에 나온 사람은 현직 대통령 정남준이었다.
40대 초반에 호감형 외모, 시원시원한 언변.
정남준 대통령은 원래도 국민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게다가 국경 근처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며, 한건우와 함께 주가가 오르고 있었다.
“사고로 위장하면, 범인을 알기 어려울 겁니다.”
한건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이걸 터트리면 어쩔 거지? 비밀 조직 얘기는 몰라도··· 대통령 암살은 다른 얘긴데.”
“그러실 겁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할 말이 있죠.”
“?”
김도경은 태연했다.
“당신은 제 부하들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모두 정부 소속 요원들입니다. 정식으로 문제를 삼을 수도 있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한건우는 계속 잡아뗐다.
‘천망의 여자 요원이 날 알아봤군.’
한건우가 모른 척해도, 김도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대체 왜 죽였습니까?”
“....”
한건우가 입을 열지 않자, 김도경은 픽 웃으며 넘어갔다.
부하들이 죽은 걸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뭐, 괜찮습니다. 특수안보부 요원은 국가에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니.”
“너희는 대통령을 죽이라며. 죽이고 싶은 이유는 뭐지?”
“대답해야 합니까?”
서로 패를 다 까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잠깐, 정남준 대통령은 얼마 후에 사고로 죽었다···. 역시 이놈들 짓이었나?’
특수안보부가 아니라 <아르고스>지만, 어쨌든 김도경의 손을 빌렸을 것이다.
“대통령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불만이라면, 조종만 하면 되는 것 아냐?”
“그게 통하는 인물이 아니라서요.”
대통령쯤 되면 정신 조종에는 방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놈들이라면 은근한 협박도 해봤을텐데.
정남준 대통령은 생각보다 강직한 인물인 것 같았다.
“괜히 죽이는 것보다 조종하는 게 나을텐데? 지금 대통령에게 원하는 걸 말해 봐. 그걸 대통령이 따른다면 증명이 되겠지.”
김도경은 흥미로워하는 듯했다.
한건우가 대통령과 무슨 접점이라도 있나, 훑는 눈초리였다.
“지금 대통령이 서명을 반대하고 있는 법안이 있습니다. 그걸 서명하게 할 수 있나요?”
“좋아.”
어떤 법인지도 물어보지 않고 바로 수락했다.
도리어 김도경 쪽이 당황했다.
“그, 법의 내용은···.”
“됐어. 자료는 따로 보내줘.”
“...좋습니다. 그 법안에 대통령이 서명을 하게 만드는 것. 이게 조건입니다.”
김도경의 태도를 보니, 대통령을 당장 죽이라는 건 페이크였던 것 같았다.
무리한 요구를 들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정식으로 입단한 후의 첫 임무일지도 모른다.
“조건··· 조건이라면, 따르지 않겠어.”
“뭐라고요?”
김도경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해졌다.
“강자는 협상하는 법이 없거든.”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김도경이 분노했다.
그의 몸 주변에 마력이 들끓었다.
“너희 조직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너의 주인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선물?”
“성공하면, 너의 주인을 직접 만나고 싶다.”
김도경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경계심이 잔뜩 담긴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사뭇 결이 달랐다.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경계하는 건가?’
“좋습니다. 어차피 사도가 되려면 주인을 뵙기 마련이니까요.”
“....”
“마침 13번째 사도의 자리가 공석입니다. 당신이 들어오면 좋을 것 같군요.”
**
밤늦게 길드로 돌아온 한건우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금해준을 마주쳤다.
“왜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어?”
“이걸 직접 전해드리고 싶어서요.”
금해준은 들떠 있었다.
한건우는 금박이 박힌 초대장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 귀하를 모시고 오찬을 함께하고자 하오니,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정남준>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