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안전가옥
명백한 도발이었다.
김도경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
수화기 너머로 김도경의 분노가 전해졌다.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김도경이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는 게 느껴졌다.
‘옛날이라면 두려웠을지도 모르겠군.’
한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보였던 김도경이었다.
그를 한 번 꺾었더니 완전히 달라보였다.
각성자의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특히 전투력 랭킹이 나오지 않는 100위권 밖은 더했다.
각성자끼리 싸워서 서열이 한번 결정되고 나면, 승자와 패자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걸 뒤집으려면 다시 덤벼서 이겨야 한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았다.
마음속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자라난 이상, 패배할 가능성은 더 높아지는 법.
김도경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게 손에 잡힐 듯 보였다.
한건우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우리가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닌데?”
왜 전화했는지는 대충 알 만했다.
지난번 <주시자의 뱀>으로 확인했으니까.
‘날 떠보려고 하는 거겠지.’
김도경은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명령을 받았다.
한건우를 아르고스의 사도로 섭외하라고.
‘명령을 그토록 거부하더니, 충실하게 수행하는군.’
한건우는 그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건 어려울 게 없었다.
[한지윤 양도 잘 지내신 것 같더군요. 그렇죠?]
“...감히 누구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거지?”
한건우가 낮고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주변에서 얘기를 나누던 금해준과 길드원들이 흠칫 놀라 이쪽을 바라보았다.
한건우는 고개를 젓고 간단히 손짓을 했다.
지윤이를 데리고 먼저 들어가라는 표시였다.
“오빠랑 오랜만에 인사하려고 했는데···.”
한건우와 제대로 인사도 못해본 지윤이 섭섭해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금해준이 다른 길드원들을 인솔해서 데려가는 게 보였다.
한건우는 김도경에게 경고했다.
“내 동생 이름을 한 번만 더 입에 올리면, 넌 그날로 죽은 목숨이야.”
그건 진심이었다.
또 가족을 건드리려 한다면 한시도 참을 수 없었다.
아르고스고 뭐고 김도경부터 잡아 족치려 했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는지, 김도경이 멈칫했다.
그가 낮게 웃었다.
[이해합니다. 비록 한건우 씨는 제 부하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지만···.]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군.”
천명환과 부하들을 죽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한건우는 당연히 딱 잡아뗐다.
[한건우 씨를 탓하려 하는 건 아닙니다만··· 여기서 드릴 말씀은 아니군요.]
“?”
[제 직위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뵙고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내일 시간 되시는지요?]
드디어 김도경이 미끼를 던졌다.
김도경은 약속을 거절당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지, 당연히 만나줄 거라 생각하고 거침없이 물었다.
한건우는 잠깐 고민하는 척했다.
너무 덥썩 물면 도리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낮에는 길드에서 정리할 일이 있어서. 모레쯤이면 좋겠군.”
[좋습니다. 저녁 6시에 차를 보내겠습니다.]
**
아침 일찍 출근한 길드.
하루종일 금해준이 달라붙어 성화였다.
“마스터가 안 계실 동안에 하필 법적으로 처리할 건 얼마나 많은지, 제가 대리인 자격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고생했다.”
“게다가 지난번 길드원을 늘렸잖습니까. LH 기획팀에서 전문가 불러서 인사, 성과 관리 시스템도 만들었는데요-”
“그래? 잘 했네.”
금해준의 무용담을 듣고 칭찬해주느라 하루가 꼬박 갔다.
만주에서 얻은 보상은 채 풀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최상층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인공 균열이 있는 곳이었다.
사실 금해준이 해놓은 일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건 따로 있었다.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금해준이 뿌듯하게 웃었다.
“자, 보시죠!”
멀쩡했던 건물 최상층의 천장이 반쯤 사라져 있었다.
인공 균열 입구는 야외에 드러나 있었다.
“옥상이 됐네.”
“그냥 옥상이 아니라구요.”
한가운데 평지에 한건우의 드래곤이 앉아있었다.
보란 듯이 햇볕을 쐬는 모습이었다.
꽤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 같군.”
한쪽에는 거대한 물건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개나 고양이가 타고 노는 장난감을 수백 배 확대한 것처럼 생겼다.
“우리 장인이 특별히 제작했습니다.”
천재 아이템 제작자가 만든 드래곤 장난감이라.
어디서 구경 못 할 물건이었다.
쿠우우우···.
드래곤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봐도 우리 건물 옥상에 드래곤이 앉은 모습이 보일 겁니다.”
“그렇겠군.”
한건우는 고층 빌딩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드의 건물이 워낙 높아 시야를 방해하는 물건은 없었다.
어차피 드래곤을 위협할 적은 없었다.
파앗!
드래곤이 마침 여섯 개의 날개를 활짝 폈다.
자신의 위용을 뽐내는 듯했다.
드래곤의 그림자가 건물 아래까지 뻗었다.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 같았다.
“인공 균열 안에는 마수들을 산 채로 잡아서 좀 풀어놨습니다. 설아가 조금 슬퍼했지만··· 드래곤 먹이를 주려면 어쩔 수 없죠.”
“좋아, 잘했어.”
한건우가 연신 칭찬하자, 금해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한건우는 바닥을 두드렸다.
“그런데 바닥재를 조금 보강하자.”
“네? 드래곤의 몸무게는 충분히 버틸 텐데요.”
“아직 아성체야. 성체로 진화하면 여기서 얼마나 더 커질지 모르거든.”
“헉··· 알겠습니다.”
금해준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한건우가 시간을 확인했다.
“곧 18시군.”
“저녁 같이 드실까요?”
“약속이 있어.”
“넵, 이비현 씨랑 드시는군요.
“아니. 다른 사람.”
“예?”
금해준이 방금보다 더 크게 반응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동생분인가요? 아니라면 이비현 씨 말고 다른 여성분을 개인적으로···.”
“다 틀렸어. 특수안보부의 김도경이다.”
금해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예? 혼자 가도 괜찮으신가요.”
금해준도 이미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아직 깊은 속사정까지 말하지는 못했지만.
금해준이 알아야 할 것은 뚜렷이 강조했다.
특수안보부와 적대관계가 되었다는 사실.
김도경과는 이미 한 번 무기를 부딪쳤다는 것도.
그것만 말했는데도 금해준은 사색이 되었다.
‘형님이 아무리 강해도··· 운이 따랐던 걸수도 있어. 광휘의 성기사 김도경을 상대로 과연 또 이길 수 있을까?’
금해준이 머리가 빠지도록 걱정하는 게 보였다.
“오늘은 괜찮을 거야.”
“저··· 알겠습니다.”
한건우가 장담하는 걸 보니 별 일은 없을 거라고.
금해준의 이성은 그렇게 말했지만, 감정적으로는 겁이 났다.
‘아레스 길드의 덩치가 많이 커졌다 해도, 아무리 시스템을 만들어도··· 형님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야.’
한건우가 없어진다면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금해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내가 못 돌아오면 어때. 네가 길드 잘 운영하면 되지.”
“으아악!”
정확히 6시 정각.
아레스 길드의 입구 앞에 차가 한 대 멈췄다.
검은색의 각진 클래식카였다.
‘차 취향 하고는.’
척 봐도 천명환이 몰고 왔던 차보다 훨씬 비싸 보였다.
한건우는 옥상에서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내려갔다.
*
운전석에는 깔끔한 수트를 입은 미녀가 앉아있었다.
뒷좌석을 봐도 김도경은 안 보였다.
여자가 한건우를 발견하고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자동차 광고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여배우인가?’
한건우는 이성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목석 같은 편이었다.
이비현이나 차은비를 매일 봐서 자연스럽게 눈이 높아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미모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냐. 각성자로군.’
여자는 기운을 감추고 있었다.
정확한 등급을 추측하기 어려웠지만, 하급 각성자는 아닌 듯했다.
‘특수안보부 요원이군.’
한건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단 김도경이 보냈으니 보통 사람은 아닌 게 당연했다.
“한건우 씨죠? 안녕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구슬처럼 매끄러웠다.
이런 요원이라면 말로만 들어본 미인계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건우는 아무 말 없이 뒷좌석에 탔다.
여자는 차를 운전하면서 능숙하게 말을 걸었다.
“워낙 유명인이시라··· 언론에서 많이 봤는데. 실물이 훨씬 미남이세요.”
“감사합니다. 특수안보부에 당신 같은 요원도 있었군요.”
여자는 당황한 듯 웃었다.
“뭘요. 전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전 그냥 심부름 온 걸요.”
“심부름이라. 당신이 천명환의 후임입니까?”
백미러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눈빛에 잠깐 긴장이 스쳤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순순히 인정했다.
“...맞아요.”
그녀가 민망한 듯 미소지었다.
‘저것도 연기군.’
한건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긴장한 척하는 것부터 다 연기였다.
죽은 천명환의 후임이라면, 적어도 천명환과 비슷한 실력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천명환은 100위권 랭커에는 못 들었지만, 어쨌든 A급 각성자였다.
‘못해도 B급 수준은 된다는 거야.’
한건우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천명환이 하던 일은 김도경의 비서 업무만이 아니었다.
아레스 길드와 한건우를 감시하는 업무도 있었다.
여자는 그 감시 업무까지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한건우에게 눈웃음 치는 척하며 유심히 관찰하는 눈빛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특수안보부가 완전히 태도를 바꿨군.’
그전 천명환과는 딴판이었다.
거만하고 고압적인 천명환은 비호감 그 자체였는데.
이 여자는 달랐다.
웬만한 남자는 맘만 먹으면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넘어간 척 해볼까.’
한건우는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김도경 지부장의 비서 일은 어떻습니까?”
“아직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지만··· 워낙 잘 해주시죠.”
“제 비서로 옮길 생각은 없습니까?”
“어머, 불러 주시는 거예요?”
여자는 다시 매혹적인 웃음을 띠었다.
한건우가 자기 전임자인 천명환을 죽였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을텐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밝게 웃는 게 인상적이었다.
차는 남산 근처의 고급 호텔로 향했다.
여자는 호텔 발렛파킹 부스 옆에 차를 세우고 먼저 내렸다.
그녀가 뒷좌석의 차문을 열어주었다.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운 자세였다.
그녀는 누군가를 수행하는 업무를 오래 해온 사람 같았다.
“스위트룸으로 올라가시죠. 저녁 식사도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
여자가 한건우에게 카드 키를 건네주었다.
한건우는 호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데 안전가옥을 갖고 있었군.’
희귀한 차, 아름다운 여자, 고급 호텔.
마치 사업차 접대라도 하는 것처럼, 김도경은 오늘따라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한건우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약속장소를 굳이 여기로 정했다는 거지.’
한건우는 예전의 업무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곳의 스위트룸은 특수했다.
‘서울의 호텔 스위트룸 중에서 상급 각성자의 공격에 버틸 수 있는 최상급 방벽을 가진 데는 여기뿐.’
그래서 외국의 VIP가 한국에 오면 이 호텔에 머물고는 했다.
‘외부 공격을 버틴다는 건··· 내부의 타격도 버틴다는 얘기지.’
의미심장한 약속 장소.
제 실력을 숨긴 여자 요원.
다 파악하고 있는 만큼, 두려울 것은 없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제안을 할까?’
한건우는 김도경이 기다리는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