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영웅의 탄생
「자네가 한 가지만 해내면, 벌은 없을 거다.」
「예? 뭐든지 좋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김도경의 눈빛이 바뀌었다.
하마터면 지방의 한직으로 발령 나거나, 계급이 강등될 위기였다.
특수안보부에서 밀려나서 다른 기관이나 민간 길드로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돈이야 많이 벌겠지만.
한없이 위를 바라보는 김도경에게는 끔찍한 일이었다.
그걸 취소할 수도 있다니.
‘본론은 이거구나!’
김도경은 오히려 희망에 찼다.
좌천이니 강등이니 하는 건 그냥 협박일 뿐.
뭔가를 시키려는 것이겠지.
무슨 일을 시키든지 성공해 보이겠다고, 김도경은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한순간에 박살났다.
주인의 황당한 명령 때문이었다.
「각성자 한건우를 아르고스의 사도로 만들어라.」
「예··· 예?」
‘뭐가 어째?’
듣고 있던 한건우는 기가 찼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건우와 김도경의 마음이 처음으로 통했다고 할까.
김도경도 할 말을 잃었다.
그가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주··· 주인이시여.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김도경이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잘못 들었겠지, 설마···.’
김도경은 방금 들은 명령을 믿을 수 없었다.
아르고스의 사도로 선택받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김도경도 아르고스의 사도가 되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게다가 한건우는 그들의 적이 아닌가.
어제까지는 죽이라고 했던 한건우였다.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이, 사도로 데려오라니?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감히 결정에 반항하는가?」
새카만 눈동자에서 노기가 쏟아졌다.
김도경이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김도경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나? 아니야. 날 시험하려고 하는 말씀일 거야.’
김도경이 열심히 머리를 굴릴 동안.
한건우는 홀로그램으로 떠 있는 안구를 관찰했다.
그전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저번에는 황금색 눈이었는데?’
이번에는 홍채가 짙은 흑색이었다.
변조된 목소리지만 음색과 말투도 달랐다.
다른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한건우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르고스의 주인이라 불리는 게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구나.’
‘사도’인 김도경은 모든 ‘주인’들을 똑같이 모시는 것 같았다.
자존심 강한 김도경이 넙죽 엎드리는 걸 보면, 상대는 모두 강한 능력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국내 랭킹 2위인 김도경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 세계를 통틀어도 몇 명 안 될 텐데.’
어쩌면 순수한 전투력이 아니라 다른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한건우는 김도경의 시야를 통해 그 눈을 노려보았다.
깊고 검은 눈동자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공간을 넘어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김도경은 무릎을 꿇은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떨리는 목소리로 진언을 올렸다.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한건우··· 그자는 우리와 뜻을 같이할 만한 자가 아닙니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김도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김도경은 용기를 냈다.
「딱 한 번만, 한 번만 더 믿어 주십시오. 다음 균열이 열리면 반드시 한건우를 죽이겠습니다.」
검은 눈의 눈빛이 바뀌었다.
딱하다는 반응이었다.
「다음 균열?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었나 보군.」
「예?」
「이번 작전은 여기서 종료한다.」
김도경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작전을 접다뇨? 실패··· 라는 겁니까?」
아르고스의 작전은 보류된 적은 있어도, 실패한 적은 없었다.
아르고스는 무적, 무패의 작전을 이끄는 조직이었다.
그 역사가 자신 때문에 바뀌다니···.
김도경의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특수안보부도 마찬가지였다.
작전을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얻은 건 하나도 없었다.
인명 피해에 불명예까지.
특수안보부는 큰 손해만 입었다.
‘안 돼, 절대로 여기서 멈출 수 없어. 이제 시작인데···. 위에서 조금만 밀어주면 되는데.’
김도경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손등 위에 땀방울이 떨어졌다.
「사도 김도경. 」
「...예.」
검은 눈동자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아르고스의 주인 중에서는 자네의 책임을 물어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
‘...!’
김도경의 몸이 굳었다.
「한국뿐만이 아냐. 자네의 부주의로 중국에 끼친 손해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그 말이 나오자, 김도경은 할 말이 없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그렇다. 특수안보부만 손해를 본 게 아니었다.
중국의 천망도 중요한 요원들을 잃었다.
희귀한 텔레포트 능력자도 죽었다고 들었다.
천망에서 죄수 수백 명의 목숨을 투입해 줬는데.
이제 그런 협조를 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천명환 그 멍청한 새끼가···.’
다 천명환 그놈이 부주의한 탓이었다.
타국의 요원을 만나는 자리에 한건우를 미행으로 달고 가다니.
한건우에게 죽지 않았다면 김도경이 죽여 버렸을 것이다.
「자네 정말 모르겠나? 여기서 더 끌고 갈수록 각성자 한건우의 세력만 커진다는 걸.」
「....」
김도경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인력과 노력을 들여서 한건우만 더 강하게 만들어준 꼴이었다.
생각하기 싫었지만, 이 판에서 이득을 본 건 한건우밖에 없었다.
단순히 스탯이나 보상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기 오기 전만 해도 신흥 길드를 이끄는 젊은 길드장, 그 정도 느낌이었는데.’
단숨에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
마지막 전투로 쐐기를 찍었다.
민간 길드원이나 군인 할 것 없이, 한건우를 지지하게 되어버렸다.
원정대의 각성자들이 귀국해서 제자리로 돌아가면 더 심해지리라.
그들의 입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작전 실패, 작전 실패.
그 단어만 김도경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잘··· 알겠습니다. 해내겠습니다.」
김도경은 고개 숙여 다짐했다.
그의 머릿속은 열패감으로 까맣게 타버릴 듯했다.
‘한건우 그 새끼가 대체 뭐라고?’
세계를 움직이는 아르고스의 주인들마저 그를 주목한다니.
이 상황이 싫을 수밖에.
어찌 되었든 지금은 바짝 엎드릴 때였다.
다음 기회가 올 것이었다, 반드시.
*
“어이가 없군.”
한건우는 코웃음을 쳤다.
죽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손바닥 뒤집듯 같은 편으로 만들라니.
사람을 장난감으로 아는 그들다웠다.
한건우가 길드의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가 짙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건우가 스톰브링거로 폭풍을 불러오고 나서, 하늘이 티없이 깨끗해졌다.
스멀스멀 희뿌옇게 깔려있던 균열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김도경도 눈치없는 놈이군. 작전이 끝날 걸 정말 몰랐나?’
한건우를 죽이고 싶은 일념에 눈이 팔려서일까.
김도경은 상황 판단이 잘 안된 것 같았다.
한건우가 막사 밖을 거닐자, 삼삼오오 모여 쉬던 각성자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다들 지치고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한건우를 보자 저절로 눈이 빛나고 웃음을 띠었다.
“한건우 플레이어! 아깐 대단했습니다.”
“우리 길드를 대신해서 감사 드려야겠네요.”
2열 종대로 지나던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건우를 보고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원래 군인들은 직속 상급자가 아니면 인사를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만은 예외라는 분위기였다.
진한 경외의 눈초리가 쏟아졌다.
심지어 일성이나 환인의 길드원들마저, 한건우를 보고 깍듯이 인사하기도 했다.
한건우는 말없이 고개를 까닥이며 눈 인사를 했다.
‘완전히 전쟁 영웅 취급이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겪으니 꽤 부담스러웠다.
‘난 내 자리에서 싸웠을 뿐인데.’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 노력했을 뿐, 딱히 이 자들을 구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비극적인 사태는 막았다.
그대로 놔두면 수많은 민간인이 죽고, 특수안보부가 큰 세력을 얻었을 것이다.
회귀 전에는 까맣게 몰랐지만, 알고 보니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특수안보부가 기획했다는 사실을 알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러니 이건 한건우와 특수안보부의 첫 전면전이기도 했다.
결과는 자명했다.
‘이건, 나의 승리. 우리편의 승리다.’
한건우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걸렸다.
그의 옆에 이비현이 다가왔다.
“이제 귀국인가요?”
“응.”
원정을 오는 길에는 급박한 상황이라고 밤도둑처럼 출발했지만.
들어가는 길은 다를 것 같았다.
“너희를 좀 더 빨리 전면에 내보낼걸.”
“아녜요. 마지막 전투 정도가 딱 좋았어요.”
이비현도 이제 한건우의 뜻을 이해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건우는 미등록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 것 같았다.
- 지금도 딱히 불편할 건 없는데요?
음지에 묻혀 사는 게 편하다며, 이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건우는 진지하게 이비현을 설득했다.
- 특수안보부의 적이 되는 건 상관없어. 사람들의 적이 되지는 마.
그리고 한건우는 알 수 없는 소릴 했다.
국민의 적으로 취급받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고.
실제로 스스로도 그렇게 변하게 된다고.
“정부가 부른 것도 아니고 아무런 보상을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미등록자들이 참전해서 활약했다고 하면, 아마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거야.”
“이야기요? 누구한테요?”
한건우는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
원정대가 귀국하기로 한 정부의 포털 앞 입국장.
기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이 참. 밀지 좀 마!”
“앞으로 마이크 전달 좀 해주세요!”
몇 시간이나 죽치고 기다렸지만 기자들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
“으악! 본문 써 놓은 거 날아갔다.”
“이 바보야, 클라우드에 올렸어야지!”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출발했을 때랑은 딴판이었다.
언론은 오랜만에 기삿거리를 잔뜩 물어서 신이 샀다.
국경 밖 황무지에서 일어난 위험 상황.
최상급 각성자들이 드림팀을 이루어 목숨을 걸고 위기를 막아냈다···.
기본 스토리의 뼈대는 이런 식이었다.
기자들은 각자 인맥을 동원해서 사정을 알아봤다.
거의 모든 원정대원이 앞다투어 하나의 이름을 얘기했다.
- 가장 공이 큰 사람? 한건우 플레이어지.
- 태일제, 김도경? 참 나. 다 죽어가는데 구경만 하던 놈들이 무슨.
- 기자 양반, 까놓고 말해서 한건우가 없었으면 우리들 절반은 무덤으로 갔어.
기자들이 어리둥절해질 정도였다.
‘영웅의 탄생!’
두근거리는 특종.
이보다 핫한 소재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구도가 좋았다.
원정의 결과가 좋으니 국민들이 좋아할 거고.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또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들렸다.
김도경과의 알력 다툼이라던지, 불화설 등.
차차 정부 눈치를 봐서 후속기사로 풀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떡밥이 많아서인지, 막내 기자가 아닌 간판급 기자들 얼굴도 여럿 보였다.
“저기 봐. PBS의 문철민도 직접 왔네.”
“이번에도 거물급 단독 인터뷰 따겠지?”
“어쩔 수 없지. 우린 피라미라도 건지자고.”
“이번 원정대에 피라미가 어디 있어?”
PBS의 문철민 기자도 일치감치 좋은 자리를 맡아놓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차악!
포털과 연결된 입국장의 문이 열렸다.
문 건너편의 각성자만 수십 명.
정부 소속 각성자와 군인들은 따로 비밀리에 이동했기에, 이번에 온 사람들은 민간 길드의 각성자뿐이었다.
발소리와 함께 공기가 묵직해졌다.
강한 각성자들 특유의 숨막히는 위압감에, 모여든 기자들이 흠칫했다.
침묵도 잠시였다.
마이크를 든 기자들이 용감하게 뛰어갔다.
앞 사람은 뒷 사람에게 등 떠밀려 갔다는 게 정확했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사람이 보였다.
기자들이 쨍한 목소리로 질문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한건우 플레이어! 소감이 어떠십니까?”
“원정대의 승리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던데 사실인가요?”
“이번에 연인이 생기셨다는데 공개 연애하실 계획입니까?”
“드래곤을 타고 싸우는 영상이 입수되었는데요-”
중간에 조금 이상한 질문이 끼어 있긴 했지만.
한건우는 기자단을 쭉 둘러보았다.
프레스라인 바깥쪽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금해준!”
“형님!”
금해준은 해외여행 마중이라도 나온 것처럼, 플래카드를 흔들고 있었다.
한건우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