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언데드 (5) - 태양
마검 스톰브링거의 예리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리 날카로운 무기도 날의 단면이 보이기 마련인데.
단면의 두께가 0에 수렴했다.
검의 날카로움만 믿을 수는 없었다.
아크 리치의 본체인 이 보석 반지는 무척 견고했으니까.
아무래도 무기 파괴술을 써야 할 것 같았다.
[특성 발동 : 검풍]
검귀에게서 얻은 특성을 검끝에 실었다.
<검풍> 특성은 스톰브링거와 만나 강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쐐애애-
촤아아악!
“!”
칼바람이 이는 소리가 맹렬했다.
이비현이 놀라 이쪽을 바라보았다.
특성과 무구에도 상성이 있었다.
검에 바람을 일으키는 이 특성.
다른 무기보다 스톰브링거와 상성이 좋은 게 당연했다.
그러나 쓰러진 아크 리치는 아직 여유만만했다.
「크크큭···.」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크 리치는 묘하게 확신하는 듯했다.
한건우가 보석 반지를 못 부술 거라고.
한건우는 마지막으로 보석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깊고 영롱한 붉은 보석이 보였다.
-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줄 수 있어.
한건우의 뇌리에 또렷한 목소리가 전달되었다.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 영원한 생명도, 부와 명예도.
별 관심이 안 생겼다.
한건우가 무심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 네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끝없는 힘을 주겠다!
반지의 목소리가 좀더 크고 빨라진 것 같았다.
“....”
- 모두 네 뜻대로 이뤄질 것이다.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을 이루고, 네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심판하도록.
반지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러나 한건우는 가차 없었다.
“레퍼토리 끝났나?”
한건우는 스톰브링거를 아래로 내리찍었다.
깔끔한 동작이었다.
콰직!
한건우의 칼끝이 보석 정중앙을 찔렀다.
보석이 산산이 쪼개졌다.
「안돼!」
쓰러진 아크 리치가 소리쳤다.
깊고 처절한 비명이었다.
「어떻게!」
아크 리치는 다른 마수와 달랐다.
그는 과거 높은 지능을 가진 지적 생명체였고, 한 세계의 왕이었다.
영원한 생명, 그리고 강대한 흑마법의 힘.
그걸 위해 모든 걸 희생했건만.
이제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우웅···.
아크 리치의 손끝에서 다시 흑마법의 구체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검은 기운이 채 모이지도 못했다.
파스스···.
벌판에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아크 리치의 눈을 대신하던 푸른 안광이 서서히 꺼졌다.
상아처럼 희던 해골이 점점 회색으로 바랬다.
투둑, 툭···.
거구를 이루던 골격이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그가 입던 망토마저 바스락거리며 삭아 없어졌다.
아크 리치가 있던 자리에 남은 건,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관뿐이었다.
‘심연의 부름이라.’
다시 보니 균열의 이름부터 의미심장했다.
한건우는 보석이 부서지고 알만 남은 반지를 보았다.
이제 아무런 힘이 남지 않은 평범한 반지였다.
‘힘이 그렇게 강하면 이겼어야지.’
솨아아아···.
황무지 벌판에 한 차례 바람이 일었다.
‘<심연의 부름> 균열도 이걸로 끝이군.’
일반적인 미공략 균열보다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균열의 핵을 파괴해도 리스폰만 안 되지 마수는 살아있는데.
언데드를 부리는 아크 리치가 사라지니.
언데드 역시 한 번에 해결이었다.
쿠워어어···.
본 드래곤도 마찬가지였다.
쿠르릉···.
뼈만 남아있던 드래곤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폭삭 주저앉았다.
뼈 무더기가 화석처럼 쌓였다.
드래곤 뼈는 빛이 바랬지만 멀쩡했다.
‘오.’
생각지도 못하게 드래곤 뼈를 한 무더기 얻게 됐다.
냉동 보존된 빙룡의 뼈보다는 질이 떨어져 보였지만.
‘균열 부산물은 길드 거라고 했지?’
저 많은 군인들과 정부의 각성자들 중에서 숟가락 올릴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한건우는 이비현을 돌아보았다.
“고마웠어.”
스톰브링거를 돌려주려 하자, 이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한건우 씨가 가지세요.”
“이걸?”
이비현은 마검 스톰브링거를 든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원래 주인이던 유영원에게는 미안하지만.
드디어 진짜 주인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임 대장님이 그러셨어요. 진짜 주인을 찾을 때까지 맡아뒀을 뿐이라고.”
“...고마워.”
한건우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스톰브링거의 검신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드래곤 뼈 무더기를 보며 말했다.
“저건 너희 솜브라도 지분이 있는 것 같군. 일단 한국으로 가져갈까.”
“네···?”
“아마 곧 귀국하게 될걸.”
한건우가 맑게 갠 하늘을 가리켰다.
이비현도 하늘을 보았지만, 한건우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
한건우가 마지막으로 아크 리치와 대적하고 있을 때.
장벽에서 데스 나이트 듀라한에 맞선 이는 박이경이었다.
“으아아!”
거인화한 박이경이 장벽에서 뛰어내렸다.
콰아앙!
박이경의 주먹이 듀라한의 갑옷과 충돌했다.
듀라한의 가슴 갑주가 찌그러졌다.
트드드드···.
착지한 박이경이 자세를 잡을 동안.
찌그러진 갑주가 금세 원 상태로 돌아왔다.
너클에 성수를 콸콸 붓긴 했지만,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에는 약한 모양이었다.
“아니, 무식하게!”
장벽 위에서 차은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박이경의 공격에 신성력을 실어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직접 접촉하고 있으면 모를까, 멀리서는 힘들어.’
차은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힐러로서 서포트해줄 뿐이었다.
임수호를 도와 스켈레톤 병사를 잡으랴, 박이경에게 실시간 힐을 해주랴.
그녀의 눈이 바삐 움직였다.
콰직!
듀라한의 낫이 박이경의 어깨를 찍었다.
“크윽!”
박이경이 짐승처럼 신음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신체 강화>를 하면 피부가 강철보다 단단해졌다.
그러나 흑마법이 깃든 듀라한의 낫은 그걸 무력화했다.
박이경의 어깨에 듀라한의 낫이 깊이 박혀 들어갔다.
낫이 박힌 부분이 순식간에 어둡게 물들었다.
차은비는 최선을 다해 박이경에게 힐을 넣었지만, 보통의 상처와는 달랐다.
쉽사리 피가 그치지 않았다.
박이경은 어깨를 꾹 누르며 거리를 벌렸다.
흑마법이 깃든 상처였다.
죽을 듯한 고통에 박이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다닥-
스응-
듀라한과 전투마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러니 거인화한 박이경과 크기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듀라한은 긴 낫으로 박이경을 농락하다시피 했다.
피잉- 피유우-
장벽 위에서 궁수와 법사들이 듀라한을 공격했다.
시야가 어두운 걸 감안하면 명중률은 높았다.
그러나 명중해도 그때뿐.
대부분의 공격은 듀라한과 전투마의 전신 갑주를 뚫지도 못했다.
공격이 먹혀 들어가도, 금세 복구되었다.
그야말로 무적의 기사 같았다.
“아···.”
차은비는 안타까움에 주먹을 꽉 쥐었다.
딴 생각을 안 하려 했지만.
그녀는 원망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친정부 각성자들에 대한 원망이었다.
‘뭐야. 다들 구경만 하는 거야?’
저 듀라한은 누가 봐도 태일제나 김도경이 상대해야 할 사이즈였다.
그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장벽 전방에서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막아도 데스 필드는 없어지지 않았다.
팍! 파악!
비온 뒤에 사방에서 싹이 움트듯.
온 땅에서 언데드의 손이 뻗어올라왔다.
스켈레톤 병사만이 아니라, 구울과 스펙터, 뱀파이어까지.
더 많은 언데드가 스멀스멀 땅속에서 기어나왔다.
<가디언>이나 <홍염> 등, 한건우를 따라 언데드 균열을 끝까지 상대하기로 했던 길드들.
그들만 장벽 전방을 수비하며 언데드와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군부대의 각성자 군인들도 의문을 품었다.
“특수안보부나 이능력 특수전단··· 걔네들은 뭘 하는 건데?”
“그쪽이 나서야 하는 것 아냐? 우리가 인간 방패냐?”
누군가 불평을 시작하자, 물꼬가 터진 듯했다.
원색적인 욕설도 터져나왔다.
평소라면 터져나올 수 없는 하극상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생사를 가르는 전장.
상황이 상황이라, 예의를 갖추는 사람은 없었다.
이 군인들은 동료의 시체를 직접 태운 자들이었다.
방금은 언데드가 된 동료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까지 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그제야 김도경이 장벽 위로 등장했다.
흰 성기사의 갑주를 갖춰입은 위풍당당한 태도였다.
평소 같으면 그 모습이 멋지게 보였을텐데.
지친 군인들은 도리어 본능적인 반감이 들었다.
김도경은 장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는 박이경과 듀라한이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박이경은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승산은 없어보였다.
“뭐해요, 죽을 때까지 기다릴 건가요!”
차은비가 김도경에게 소리질렀다.
앙칼진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물론 차은비도 잘 알고 있었다.
김도경은 박이경이 죽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곳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이었다.
‘다들 보는데 티를 낼 순 없겠지.’
김도경이 차은비를 흘깃 마주보았다.
그 시선에 순간적으로 얼음 같은 냉기가 흘렀다.
그걸 눈치챈 사람은 얼마 없었다.
김도경은 평소의 차분하고 엄숙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럴 리가.”
김도경이 광선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 위로 빛의 검신이 만들어졌다.
타앗!
김도경이 장벽 아래로 착지했을 때.
솨아아아-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냥 바람이 아닌 허리케인 수준의 폭풍이었다.
“?”
바람의 근원지는 저 가운데, 한건우가 있는 곳이었다.
김도경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쪽을 노려보았다.
하늘을 가린 짙은 먹구름이 걷혔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광이 들판 가운데로 내리꽂혔다.
“...!”
전장의 모든 이가 잠시 숨을 죽였다.
악다귀처럼 달려들던 언데드마저.
모두 햇빛을 보고 조각상처럼 굳었다.
온통 어두운 무대 가운데, 핀 조명이 떨어진 듯.
눈부신 빛은 한건우와 드래곤을 비추고 있었다.
김도경의 커진 동공에 밝은 햇빛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아니야, 아직···. 작전은 끝나지 않았어.’
김도경의 눈빛이 사정없이 떨렸다.
두근, 두근.
분노로 거세진 맥박을 이기지 못하고, 안구의 모세혈관이 터졌다.
그가 시뻘개진 눈으로 한건우를 노려보았다.
김도경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성을 누르는 직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실패했어.’
**
김도경은 납작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는 한건우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놈만 없었어도···.’
뭐든지 한건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말았다.
아르고스의 주인이 명령한 일을 실패했다.
중국의 천망에도 큰 손해를 끼쳤고, 특수안보부 요원들도 여럿 잃었다.
돌이켜보니 처음부터 수상했다.
한건우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이제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당장 혀 깨물고 죽으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하지만 김도경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나를 대체할 사람은 없어!’
강한 건 두말할 나위도 없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각계의 인맥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무장이 되어 있었다.
자신은 모든 일에 진심으로 임했다.
아르고스의 주인이 원하는 세상은, 곧 자신이 원하는 세상이니까.
‘난 권력을 얻기 위해 협조하는 어중이떠중이 놈들과는 달라.’
이미 김도경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특수안보부의 간부였다.
대단히 높은 지위와 권력이 있었지만, 그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서울지부장··· 곧 특수안보부의 수장이 될 거고, 아르고스의 본부로 올라갈 거다.’
그의 뜻을 펼치기에 대한민국 땅은 좁았다.
‘잠깐의 실패로 좌절하지 말자. 극복한다면 실패가 아니지.’
아직 기회는 있었다.
아르고스의 주인이 한번 시작한 작전을 접는 일은 없으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목표는 꼭 이루었다.
‘좀더 제대로 지원을 받아서, 한건우를 여기서 죽이고 간다.’
김도경은 스스로 멘탈이 센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멘탈은 곧 와르르 무너졌다.
“예?”
김도경은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 악몽을 꾸는 것인가.
“좌··· 좌천 말씀이십니까?”
*
‘좌천?’
한건우가 픽 웃었다.
고작 좌천.
한건우가 보기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했나?’
김도경이 끔찍하게 절망하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어서 더 그런 모양이었다.
‘고작 그걸로 이렇게 절망한다면, 지금부터는 더 견디기 힘들텐데?’
한건우가 <주시자의 뱀>에서 빠져나와 눈을 뜨려던 참이었다.
황당한 말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