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언데드 (3) - 듀라한
크르르···.
한건우가 탄 드래곤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한건우는 드래곤과 감정적으로 깊이 연결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상대를 두려워하는 거야.’
한건우의 드래곤은 자신보다 큰 적이 낯설었다.
게다가 상대는 본 드래곤.
사람으로 치면 백골 시체를 적으로 만난 셈이었다.
드래곤은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낀 듯했다.
바짝 긴장한 채 비늘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건우가 고개를 숙였다.
드래곤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툭툭 치며 격려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드래곤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 안정되었다.
한건우는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본 드래곤을 탄 아크 리치.
‘언데드의 제왕답군.’
악몽에 나올 것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본 드래곤이 입을 크게 벌렸다.
「키롸라라락!」
본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온 벌판을 울렸다.
“으윽!”
많은 각성자가 괴로워하며 귀를 막았다.
일종의 <피어>였다.
본 드래곤의 피어는 유난히 소름끼쳤다.
수백 명이 죽어가며 내지르는 비명을 한데 모은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피어 때문에 힐러들의 집중이 깨진 사이.
아크 리치의 <데스 필드>가 다시 힘을 얻었다.
두드드드···.
장벽을 타고 죽음의 손이 돋아났다.
쉬이익!
빈사의 상태로 뱀파이어가 몇 마리 남아있었다.
<데스 필드>로 버프를 받은 뱀파이어가 장벽 위를 급습했다.
뱀파이어가 군인 하나의 발목을 잡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크아아악!”
군인은 공중에 붙잡힌 채, 여러 뱀파이어에게 동시에 피를 빨렸다.
불행한 군인은 순식간에 피와 에너지가 빨려 젖은 종이처럼 쪼그라들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으아아···.”
“조심해! 장벽에서 떨어져!”
김도경 지부장은 심드렁했다.
각성자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도 본체만체했다.
‘뭐지? 지부장님이 마음만 먹으면··· 뱀파이어 두엇 정도는 쉽게 없앨 수 있을 텐데.’
주위의 군인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김도경의 태도를 보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늘었다.
김도경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태일제와 원유선, 그리고 일성과 환인의 강한 각성자들.
모두 뭔가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소극적이었다.
아레스와 알파스 길드 쪽은 달랐다.
먼저 차은비가 나섰다.
“임수호 씨.”
“네?”
“저걸 막아야죠. <빙정난류>를 써봐요.”
“네? 하지만···.”
차은비는 <데스 필드>의 영향권을 가리켰다.
데스 필드는 장벽 건너편 땅에서 시작되어, 깨끗한 물에 먹물이 번지듯 스멀스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파악! 팍!
곳곳에서 하늘을 향한 손이 솟아났다.
솨아아···. 끼긱!
백골의 손은 곧 땅을 박차고 빠져나왔다.
스켈레톤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투둑. 삐걱.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려 죽은 각성자의 시체들.
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이한 방향으로 관절을 꺾은 채였다.
“으아아!”
“태워, 태워라!”
군부대의 궁수들이 일제히 화염 화살을 꺼냈다.
언데드가 된 동료의 시체를 태워버리려는 것이었다.
임수호가 머뭇거렸다.
자신의 빙결 특성은 냉기와 물리 공격이 전부였다.
둘 다 언데드에게 잘 먹히는 건 아니었다.
‘언데드는 원래 찬 속성이라 냉기에 타격도 없고. 물리적 공격을 당해도 금방 일어나는데?’
차은비가 광역 보호막을 거둔 사이.
쉬이익-
임수호의 근처까지 뱀파이어가 날아왔다.
퍼억!
장벽 위에 버티고 선 박이경이 공중에 주먹을 날렸다.
뱀파이어는 야구 배트에 맞은 공처럼 멀리 날아갔다.
박이경이 너클을 매만지며 임수호에게 충고했다.
“힐러 말대로 해.”
“예?”
“빨리.”
[특성 발동 : 빙정난류]
‘에라 모르겠다.’
임수호가 빙결 공격을 만들었다.
차은비가 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특성 중첩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각성자 간 특성 중첩은 흔하게 쓰이는 게 아니었다.
차은비도 개념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관심도 없었다.
이제는 차은비도 생각이 달라졌다.
천망의 요원들 때문이었다.
2개의 특성을 자유자재로 한 사람의 것처럼 중첩하는 걸 봤다. 그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방금 연습도 해보지 않았나.
무려 드래곤의 브레스에 첫 실전 연습을 했다.
‘아무래도 드래곤보다는 사람 쪽이 쉽겠지?’
샤아악-
치지지직-
임수호의 손끝을 타고 얼음 결정이 자라났다.
그는 마력을 증폭해 주는 전륜성왕의 구슬을 꼭 쥐고 있었다.
[특성 중첩 : 신의 가호]
[특성 중첩 : 빙정난류]
파아앗!
‘됐어!’
‘헉!’
평소보다 훨씬 강력한 빙결이었다.
임수호도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어깨에 닿은 차은비의 손에서 신성력이 전해져 왔다.
신성력이 임수호의 특성과 하나가 된 것처럼 완전히 배어들었다.
‘···이게 뭐야?’
임수호는 속으로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그래, 지금 공격할 사람이 나밖에 없구나.’
현재 아레스 길드원 중에서 원거리에 마법 공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임수호뿐이었다.
임수호가 책임감을 느끼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임수호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공기 중 빙정의 움직임이 자신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치지지징- 파바박-
데스 필드에 잠식당한 땅에 수십 개의 얼음 창을 박았다.
치징- 끼기기!
땅에서 기어올라오는 스켈레톤 병사들도 쓸어버렸다.
“오오!”
옆에서 싸우던 각성자들이 환호했다.
언데드에게 얼음 특성을 왜 쓰는지 의아해하던 자들이었다.
순식간에 장벽 쪽 전세가 뒤집혔다.
데스 필드의 위력이 약해졌다.
땅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안개도 얼음 결정에 막혔다.
새 스켈레톤도 자라나질 못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라고 느낀 순간.
「우우우-」
「흐윽- 흐으으-」
멀리 균열 쪽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여자··· 우는 소리 아냐?”
“멍청한 놈. 밴시 소리야.”
장벽 위에서 싸우던 군인과 각성자들이 멈칫했다.
언데드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각성자가 면박을 주었지만, 누가 들어도 여자 우는 소리 같았다.
균열 입구 근처.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 여럿이 유령처럼 떠다녔다.
인간형 마수인 밴시였다.
비통에 찬 곡성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밴시가 울면 사람이 죽는다던데···.”
“전투에서 죽고 다치는 거야 당연지사지.”
「흐윽, 으으···.」
밴시는 공격성이 없는 마수였다.
그러나 심리적인 효과는 굉장했다.
이쪽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몇몇은 밴시에게 원거리 공격을 날렸지만, 큰 의지는 없어보였다.
밴시를 죽이면 자신이 죽는다는 미신 때문인 듯했다.
밴시의 울음은 서곡일 뿐이었다.
다그닥, 타닥···.
균열 입구에서 말을 탄 기사가 나왔다.
기사는 긴 낫을 들고 있었다.
아크 리치가 왕이라면, 이 기사는 품위 있는 귀족 같았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목이 제대로 달려있고, 해골에 살이 붙어있었다면.
기사가 탄 전투마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투구 장식을 쓰고 있었지만, 뼈밖에 없었다.
솨아아···.
검은 망토가 휘날리고, 죽음의 바람이 풍겨왔다.
“저건 뭡니까?”
“데스 나이트, 듀라한이에요.”
임진호가 묻자, 차은비가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어렸다.
‘이 균열, 뭐 이렇게 까다로워?’
대마법사인 아크 리치가 있어서일까.
언데드란 언데드는 모두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균열에 들어갔더라면 뼈도 못 추릴 뻔했잖아.’
*
한건우도 데스 나이트가 등장하는 걸 보았다.
그러나 지상의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저건 다른 동료들에게 맡길 수밖에.’
아크 리치와 본 드래곤을 상대해야 했다.
김도경과 태일제, 원유선이 미적거리는 게 괘씸했다.
그들의 속셈은 알 만했다.
‘언데드를 해치우는 게 아니라, 적당히 상대한 다음 철수하는 게 목적이라 이거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언데드가 민간인이 사는 도시를 덮치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뿐이었다.
‘저 보석 반지만 파괴하면 끝인데.’
아크 리치의 흑마법 탓에, 좀처럼 가까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저 반지는 쉽사리 파괴되지도 않았다.
인드라의 뇌전을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좀 더 가까이서 부숴야 해.’
한건우가 고전하던 그때.
지상에서는 다른 싸움이 벌어졌다.
파아악!
듀라한의 긴 망토 뒤에 숨어있던 유령종 마수들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섀도우 스펙터.
형체 없는 유령종 언데드였다.
슈우우-
반투명한 데다 빠르기까지 했다.
손쓸 틈이 없었다.
힐러들이 방어막을 치고 있었지만, 장벽을 전부 커버하는 건 아니었다.
원정대 사이사이로 섀도우 스펙터가 스며들었다.
“크아악!”
“으윽!”
제자리에서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장벽 뒤도 더이상 안전하지 않아!’
공포심이 번졌다.
시야가 어두워서 더욱 속수무책이었다.
혼자 서 있다가는 섀도우 스펙터에게 에너지를 빨리기 십상.
일단 살기 위해 힐러 주위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솜브라>가 나섰다.
이비현이 최정예로 골라온 부하들.
모두 이비현처럼 회색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대부분이 암살자 클래스였고, 실제 암살자로 활동했던 솜브라.
그들은 섀도우 스펙터보다 더 빠르고, 더 은밀했다.
쉬이익?
섀도우 스펙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항상 어둠 속에서 다른 이의 목숨을 노려왔다.
거꾸로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
섀도우 스펙터만 놀란 게 아니었다.
원정대 대부분이 혼이 속 빠졌다.
“저 자들은 뭐지?”
아군을 도와주니 고맙긴 한데, 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얼떨떨했다.
솜브라 조직원들은 처음부터 만주 원정에 함께했다.
워낙 은밀하게 숨어 다녀서,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솜브라의 공격은 놀랍도록 효과적이었다.
눈이 밝은 이들은 알아보았다.
‘무기가 달라!’
솜브라의 무기는 성수를 뿌려 급조한 게 아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신성력이 깃든 희귀한 아이템을 들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아이템들이···?’
오랫동안 희귀 아이템을 모아온 솜브라의 무기 창고가 빛을 발한 것이었다.
타닥, 타닥!
데스 나이트, 듀라한이 분노했다.
해골 전투마의 말발굽이 땅을 박찼다.
두두두두···.
듀라한이 거대한 낫을 들고 돌격했다.
전투마 주위에 삿된 암흑의 기운이 일어났다.
‘장벽이 뚫린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한건우가 구해주지는 않을까.
구세주처럼 바라본 것이다.
슈우우- 콰과-
크와아-
어두운 하늘 위, 한건우와 드래곤은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크 리치와 본 드래곤.
그리고 한건우와 아성체 드래곤.
막상막하의 대결이었다.
이쪽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보였다.
이비현은 장벽 위에 서서 숨을 돌리며, 긴장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게···?’
자신을 여기로 보내면서, 전임 대장 유영원이 맡긴 물건이 있었다.
‘대장님···.’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 알 것 같았다.
‘왜 이제 와서 깨달았지!’
이비현은 스스로를 탓했다.
예지 능력이 없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설아야, 부탁해.”
“응? 알겠어!”
은설아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이비현은 장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비현은 장벽 아래를 날던 그리핀의 등 위로 훌쩍 올라탔다.
펄럭-
흰 그리핀이 거침없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비현의 회색 망토 사이로 긴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콰아아아-
그때, 데스 나이트 듀라한이 장벽에 충돌했다.
듀라한이 긴 낫을 휘둘렀다.
장벽이 기우뚱 흔들렸다.
충격 속에서도 은설아는 테이밍을 놓지 않았다.
멀어지는 그리핀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