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독과 모래
쿨럭.
쓰러진 천명환이 기침했다.
폐까지 흙먼지가 들어찬 것 같았다.
“흡···.”
그는 훈련받은 대로 숨을 참았다.
폭발 이후에는 호흡을 조심하는 게 좋다.
화기나 유해한 물질이 공기 중에 떠다닐 수도 있으니까.
‘기습당했어··· 누구지?’
중국 천망의 요원들이 배신한 것일까?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퍽.
천명환은 부하의 시체를 발로 차 밀쳐냈다.
부하는 자신을 덮고 쓰러져 있었다.
폭발의 순간.
천명환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보호 스킬을 풀 가동했지만 그걸로는 모자랐다.
그때 천명환의 기지가 빛을 발했다.
바로 옆에 있던 부하를 붙잡아 방패로 삼은 것이다.
부하의 시체는 온통 새카맣게 타 있었다.
벼락을 맞은 듯했다.
“쯧.”
천명환은 제복에 묻은 먼지를 털며 혀를 찼다.
그는 부하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다.
‘상사가 위험에 처했으면, 어련히 몸으로라도 막아야지.’
천명환은 소매로 코와 입을 덮고 조심히 호흡했다.
‘그 폭발음··· 익숙했는데.’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하지만 생각에 잠길 겨를은 없었다.
천명환은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어두운 밤인데다, 폭발의 여파로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정신 차려, 일어나라!”
천명환은 다른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어···?’
천명환은 총 3명의 부하를 데려왔다.
방패로 삼은 부하는 죽었지만, 2명은 남아있어야 했다.
그러고보니 바로 곁에 있던 부하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나 빼고 다 죽은 건가?’
천명환 같은 상급 각성자는 아니어도, 부하들은 꽤 쓸만했다.
습격 한 방에 전부 목숨을 잃은 것인가.
천명환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부하들이 죽은 게 슬퍼서는 아니었다.
‘나 혼자서 고립된 거야?’
워낙 비밀스러운 작전이었다.
부하들이 죽은 이상, 자기가 여기 와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아무도 몰랐다.
천명환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직속 상사인 김도경뿐.
주민도 없는 유령 도시.
사방에서 살기가 섞인 기운이 횡행했다.
천명환의 털끝이 바짝 섰다.
‘지원 요청을 해야 해.’
삐빅-
그가 손목시계의 다이얼을 조정했다.
김도경 지부장에게 보고하려는 것이었다.
스스스···.
천명환은 어둠 속에서 닥쳐오는 위협을 감지했다.
‘뭐야!’
치잉!
천명환은 창술사였다.
그가 반사적으로 창을 뽑아 휘둘렀다.
끝이 두 갈래로 나뉘어진 단창이었다.
파앗-
그림자 같은 적이 재빨리 물러났다.
적의 움직임이 전광석화와 같았다.
“누구냐!”
마침 보름달을 가린 구름이 옅어졌다.
멀어지는 적의 형상이 보였다.
회색 망토 사이로 새하얀 얼굴이 보였고,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나부꼈다.
‘여자?’
천명환은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손목시계를 보았다.
“어···!”
천명환은 얼이 빠졌다.
통신용 손목시계가 온데간데 없었다.
방금 그 여자가 빼간 것 같았다.
‘다른 부하들! 어디 있어.’
부하들의 시체를 찾아야 했다.
통신용 손목시계가 하나쯤은 멀쩡하게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티, 팀장··· 님.”
조금 떨어진 곳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천명환의 부하였다.
충격으로 멀리까지 튕겨져 간 모양이었다.
‘한 명은 살아 있었군. 그렇다면···.’
목숨이 붙어있는 걸 보니, 통신용 장치가 멀쩡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천명환은 반가워하며 급히 그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스윽-
“끄으윽···.”
엎드린 부하의 목에 일자로 선이 그어졌다.
울컥, 울컥.
걷잡을 수 없는 출혈이 일어났다.
부하의 동공이 힘없이 풀렸다.
콱!
부하의 손목에 둘러진 통신용 손목시계.
금이 가 있긴 했지만, 저절로 박살났다.
천명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보이지 않는 유령의 손이 나타난 듯했다.
‘은신 특성인가···.’
아까 그 회색 망토를 입은 여자의 짓이라고.
천명환은 직감했다.
천명환이 허공에 단창을 겨누었다.
펄럭- 퍼억-
그때 위에서 천막이 펄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날갯짓 같기도 했다.
천명환은 정신없이 고개를 돌려 위를 쳐다보았다.
“?”
천명환은 보았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두 눈동자를.
그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파충류의 눈이었다.
드래곤이 천명환을 노려보며 수직 강하하고 있었다.
“으앗!”
천명환이 비명을 지르며 구르듯이 몸을 피했다.
아무리 담이 큰 사람이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슈우우웅-
드래곤이 천명환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가, 방향을 급전환하며 상공으로 올라갔다.
드래곤은 여느 비행 마수와는 달랐다.
여섯 개의 날개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방향도 쉽게 바꾸었다.
“아까··· 괜찮았겠죠?”
한건우의 등 뒤에서 차은비가 물었다.
한건우는 이비현과 차은비만 태우고 이곳으로 왔다.
물론 천명환이 괜찮냐고 묻는 건 아니었다.
차은비가 걱정하는 건 이비현이었다.
한건우가 픽 웃었다.
“이 정도 높이는 문제 없을 겁니다.”
“네....”
차은비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좀 전에 이비현이 드래곤의 등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을 때, 차은비는 내심 깜짝 놀랐다.
이비현이 땅으로 추락하는 줄 알았다.
벌써 이비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달밤의 그림자 속 어딘가로 완전히 스며들었다.
슈우우- 펄럭!
후우욱!
드래곤이 콧김을 뿜었다.
여섯 개의 피막 날개가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차은비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처참한 광경이 보였다.
‘드래곤의 브레스란 건 정말···.’
눈으로 보아도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버려진 도시 한 구석은 드래곤의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았다.
그야말로 융단 폭격을 맞은 듯했다.
“꽉 잡아요.”
“네···!”
한건우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꽉 안 잡으면 떨어질 거야.’
차은비는 단단히 각오했다.
드래곤의 등에는 뿔처럼 비죽 솟은 가시가 많아, 손잡이 역할을 해 주었다.
위이잉-
파아아악!
“!”
폐허 속에서 모래 폭풍이 용오름쳤다.
수십 미터나 되는 높이였다.
모래 회오리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회오리가 드래곤의 발을 움켜잡으려 하는 듯했다.
한건우가 모래 회오리를 향해 손바닥을 폈다.
[특성 발동 : 쇼크웨이브]
콰앙-!
총성 같은 파공음이 들렸다.
3차 개화가 이뤄진 쇼크웨이브.
강렬한 파동이 모래 폭풍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파스스스!
모래 회오리가 순식간에 분진처럼 흩어졌다.
쇼크웨이브 특성의 원리는 단순했다.
마력 파동으로 충격파를 만드는 것.
처음 개화되었을 때는 잔잔한 파동을 만드는 정도였다.
2차 개화가 되면서 바위를 부술 정도의 파괴력이 생겼다.
3차 개화 이후에는 웬만한 공격 특성을 압도하는 무기가 되었다.
슈우웅- 펄럭!
한건우가 드래곤을 공중에서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모래 회오리가 가라앉은 가운데.
우뚝 선 두 명이 보였다.
여자 하나, 남자 하나.
놀랍게도 그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엉망이 된 폐허 위에 사뿐히 서 있었다.
“!”
방공호 안에서 피한 것도 아니었다.
브레스를 쏘기 전, 방공호에서 나오는 걸 분명히 보았으니까.
방공호도 드래곤의 공격에 대비하는 수준은 아닌 듯.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안의 포털도 고장이 났으리라.
아성체 드래곤의 브레스를 정통으로 버틴 것이다.
한건우는 긴장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저들이 천망의 상급 각성자들인가.’
한 명이 모래를 다루는 특성을 갖고 있는 듯했다.
방금 보았듯, 능력의 범위나 위력이 대단했다.
호락호락할 것 같지는 않았다.
‘상황이 좋지는 않군.’
각성자는 환경을 타기 마련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물질을 다루는 각성자가 더했다.
재료가 되는 물질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니까.
이곳은 황무지 한가운데 버려진 소도시.
오랫동안 방치되어 모래와 흙먼지로 덮여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여자 각성자가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배신한 건가요? 미행을 달고 온 건가요? 어느 쪽이라도 한국을 용서하기 어렵군요.”
여자의 목소리에서 은은한 분노가 느껴졌다.
여자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전체적으로 표독스러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흰 실험 가운을 입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천명환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설마··· <과학자>가 온 건가?’
<과학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천망의 간부급 각성자.
각성 전에는 천재 연구원이었다고 했다.
실상 매드 사이언티스트에 가깝다고 하지만.
말로만 들어본 거물이었다.
천명환이 그들에게 다가가려 할 때.
치리리링-
여자의 주위로 작은 암기가 줄을 지어 돌아갔다.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암기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는 듯.
불길한 반사광이 반짝였다.
“아···.”
천명환도 염동력 특성을 가진 각성자였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이는 암기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옆에 선 남자는 키가 작고 몸이 다부졌다.
남자의 눈은 사나워 보였다.
코와 입은 두건으로 가리고 있었다.
남자가 손가락을 들어 한건우와 드래곤을 가리켰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죽여도 됩니다.”
여자의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남자의 손가락을 타고 다시 모래바람이 회오리쳤다.
위이이이-
아까와 같은 모래 회오리인가 싶었다.
거기에 여자가 한 가지를 더했다.
스으으···.
여자의 몸 전체에서 검붉은 기운이 배어나왔다. 맹독이었다.
모래 사이사이에 치명적인 맹독이 스며들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한건우는 상대방의 능력을 파악했다.
‘남자 쪽은 모래··· 여자는 독과 암기를 다루는군.’
휘이잉-
모래바람의 색 자체가 검붉게 변했다.
키에에엑!
드래곤은 거부감이 드는지, 뒤쪽으로 날갯짓을 했다.
“왜 그래?”
드래곤의 비늘은 기본적으로 독 저항이 있었다.
한건우와 차은비가 입은 방어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부하는 걸까.
드래곤은 겁이 없는 생물이었다.
동시에 현명한 생물이기도 했다.
상대가 낯설다는 것만으로 이상 행동을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파아아앗!
모래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물대포처럼 쏘아졌다.
드래곤을 직격으로 노린 것이었다.
치이이이···.
“헉!”
차은비가 비명을 삼켰다.
독의 부식력이 엄청나게 강했다.
독이 스며든 모래바람은 드래곤의 비늘과 피막으로 된 날개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격은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드래곤의 비늘 틈에 작은 생채기가 생기자, 그쪽을 적극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한건우는 급히 공간 특성으로 방어했다.
[특성 발동 : 공간 왜곡]
한건우는 드래곤의 주변 공간을 차단했다.
그러나 이미 타이밍이 늦었다.
드래곤의 비늘 사이사이로 스며든 독 모래를 빼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드래곤의 몸 크기가 워낙 커서, 공간의 벽이 두껍지 못했다.
트드드드드···.
모래 폭풍이 공간의 벽을 쉴새없이 두드렸다.
“안 돼.”
차은비가 급히 드래곤의 상한 껍질을 치유했다.
하지만 치유에 그칠 뿐,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녀의 보호 능력은 마법이나 저주를 이용한 공격을 막는 데는 뛰어났지만, 이렇게 단순한 물리적 공격에는 취약했다.
키이잇!
드래곤이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드래곤이 처음으로 적 앞에서 물러섰다.
‘이런.’
한건우는 신음을 삼켰다.
한건우의 드래곤은 아직 어리고 경험이 많지 않았다.
통증을 느껴본 것도 처음이었다.
한건우는 결심했다.
그는 드래곤을 탄 채로 두 손을 놓고 일어섰다.
“하, 한건우 씨?”
차은비가 놀랐다.
파아아-!
한건우의 등에 화염 날개가 솟구쳤다.
“조금 위로 올라가 있어.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드래곤이 너무 멀어지면 차은비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으니까.
드래곤은 말귀를 알아들은 듯 눈을 굴렸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날개가 처진 기색이었다.
한건우가 드래곤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엇, 잠깐···!”
차은비가 경악했다.
한건우가 내려 버리면 드래곤을 조종할 사람이 없었다.
펄럭!
드래곤은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며 상공으로 올라갔다.
파다다다-
드래곤은 여섯 개의 날개를 선풍기 날개처럼 휘두르며 독 모래를 털어냈다.
“꺅!”
등 뒤에 차은비가 타고 있다는 건 아예 잊어버린 것 같았다.
슈우우-
한건우는 화염의 날개를 접었다.
번개가 땅으로 꽂히듯이 땅에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