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어떤 적이 오든
“어쨌든 의문 하나는 풀렸네요.”
“!”
말 없이 보고만 있던 임수호가 입을 열었다.
다들 고개를 들었다.
“그렇네.”
원래 <심연의 부름> 균열의 공략 시간은 넉넉했다.
갑자기 균열이 열리고 구울 떼가 나온 것이다.
거기에 맞서 싸우느라, 궁금해할 시간조차 없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되었는지.
이비현이 가져온 영상에는 그 해답이 담겨있었다.
“균열··· 등급 변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전 그런 건가 했는데···.”
차은비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균열의 등급이 올라가는 경우도 본 적 있으니.
공략 시간이 변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천명환 선배가 얄밉기는 했지만, 저렇게까지 할 줄은···.’
아니, 정말로 몰랐던가?
차은비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출세를 위해서 뭐든지 할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었잖아.’
각성자 사관학교의 많은 동문들이 그랬다.
그게 무슨 뜻인지.
눈앞에서 본 적만 없었을 뿐.
자신은 그냥 마음 편하게 눈을 감았던 것일까?
“특수안보부 놈들, 원래 저랬어.”
“....”
알파스의 박이경이 팔짱을 꼈다.
굵은 팔뚝이 터질 듯했다.
박이경 뒤에는 알파스의 길드원들이 서 있었다.
박이경이 특수안보부의 공격을 받은 이후.
그들 길드는 완전히 한건우의 편으로 돌아섰다.
알파스와 아레스 길드의 분위기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한 가지는 통했다.
회사보다는 가족 공동체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까놓고 말할까? 그 놈들이 보기엔 각성자 말고는 인간도 아니야. 그뿐인 줄 알아? 각성자 중에서도 자기네 소속이나 사관학교 출신 아니면 사람 취급 안 한다고.”
“그건···.”
차은비는 부정할 수 없었다.
‘사람 취급을 안 한다’는 말.
그건 그냥 비유가 아니었다.
방금 생생한 영상으로 보았다.
“이해가 안 돼요.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요? 잘못되면 자기들까지 죽을 수도 있는데···.”
은설아가 물었다.
다들 복잡한 생각에 빠진 가운데, 임진호가 대답했다.
“균열이 열리는 게 이득이니까, 그렇게 한 거겠죠? 왜인지는 몰라도.”
임진호의 단순한 대답이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한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 나라가 위험에 처하는 게 특수안보부에게는 호재인 것 같아.”
“...?”
임진호와 임수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차은비가 조용히 속삭였다.
“호재란 건··· 좋은 기회라는 뜻이에요.”
“아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모두 당연하다는 듯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한건우도 방향을 결정하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이건 새로운 정보니까.’
만주 사태는 그냥 미스터리한 재앙이 아니었다.
고의적으로 계획된 인재였다.
그 방법은 분명히, 영상에서 본 대로겠지.
‘원래 일어날 일인데, 시간만 앞당긴 거라고 했던가.’
무슨 소린가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갔다.
균열이 발생하는 장소는 완전히 랜덤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균열이 한 번 생긴 곳은 나중에 또다른 균열이 터질 확률이 높았다.
많은 이들이 믿고 있었다.
균열에는 무언가 정해진 법칙이 있을 거라고.
전세계의 학자들이 그걸 밝혀내기 위해 연구하고 있었다.
만주 땅에 동시다발적으로 S급, A급 균열들.
언젠가는 이 땅에 터질 균열이었을 것이다.
몇 년이나 몇십 년의 간격을 두고 천천히 생길 균열들.
억지로 한 번에 터트렸다.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그래, 어찌 보면··· 아주 특이한 일은 아니야.’
생각을 끝낸 한건우가 입을 열었다.
“특수안보부에서 굳이 작전상 철수하자고 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
“방금 말씀드린 내용과 같습니다. 인명 피해를 더 많이 내기 위해서죠.”
“네? 그렇게까지···.”
반문하던 차은비의 말끝이 흐려졌다.
한건우는 역사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전쟁사에 대해서는 조금 알았다.
어떤 계기로 갈등이 쌓이면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으로 이득을 얻는 집단이 생긴다.
그런 일이 반복되고, 언젠가부터 주객이 전도된다.
그 집단이 이득을 얻기 위해 계기를 만든다.
때로는 진짜 있었던 사건을 과장하고, 때로는 없었던 사건을 조작하면서···.
“그럼 왜 철수하자고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양보했을까요? 게다가 굳이 내일까지 시간을 끈 게 이상해요.”
임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 사전지식이 없는데도 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박이경이 대답했다.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놈들은 <크로노스의 미궁> 균열에서 날 처리하려고 했지. 그러다 우리 건우 형님께 가로막혀 실패했지만.”
“예에?”
임수호 형제는 도깨비라도 본 듯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놈들 생각은 변한 게 없어. 좋은 기회지. 보는 눈도 없는 이 땅에서, 자기 맘에 안 드는 각성자들··· 싸그리 없애려고 하는 걸껄?”
한건우는 속으로 감탄했다.
‘박이경, 직감이 꽤 좋네.’
근거는 하나도 없지만, 직감만으로 정답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도리어 더 힘들 텐데요? 저희도 모두 함께 있는데··· 뭔가 다른 수라도 생긴 걸까요?”
임수호가 물었다.
한건우는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사실 회의 때 김도경 지부장이 이미 언급했죠.”
“?”
“새 균열이 생기면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중국에 도움을 청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아마 그들은 오늘 밤 사이에 새로운 균열을 터트릴 겁니다. 그리고 균열에 들어가기 전에 지원군이 도착하는 시나리오죠.”
“....”
“오늘 밤, 모든 걸 막아야 합니다.”
김도경에게 <주시자의 뱀>을 심어놓았다던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근거를 대지 않으니 과감한 주장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까앙-
박이경이 너클을 부딪치며 물었다.
그는 몹시 흥분한 눈치였다.
이유는 필요 없고, 특수안보부에 맞선다는 사실에 신이 난 것 같기도 했다.
박이경의 이가 짐승처럼 빛났다.
**
“명환아.”
“예, 지부장님.”
천명환이 김도경이 앉은 의자로 바짝 다가섰다.
“내가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전처럼 한 번 더 다녀와.”
“저··· 지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천명환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뭔데?”
“사실 지난번 천망에서 온 자들이···.”
천명환은 자신이 당한 수모를 설명했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제물을 산 채로 놓고 가려는 듯 쇼를 해서, 자신이 거의 무릎을 꿇을 뻔하지 않았던가.
김도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 알겠다.”
“지부장님께서 한번 그 쪽에 경고를 해주시면 그런 일이-.”
김도경은 한숨을 쉬고, 천명환의 걱정을 일축했다.
“이번엔 그런 일 없을 거야.”
“예.”
천명환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괜한 요청을 했다고 후회하는 듯했다.
“오늘밤 도착하는 손님들은 그런 장난질을 할 급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사실 김도경은 다 알고 있었다.
천명환이 천망 조직원에게 한 방 먹었다는 걸.
그 이유까지도 이미 들었다.
천명환이 특유의 건방진 태도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다.
아마 상대 요원의 계급이 낮아서 그랬겠지.
‘한심한 놈.’
중국 천망의 요원들이 얼마나 콧대가 높은데.
최하위 계급만 되어도 수백의 목숨을 주무르는 자들이었다.
‘계속 데리고 있기에는 경솔한 놈이군···. 돌아가면 교체해야겠어.’
김도경은 차가운 눈으로 천명환을 바라보았다.
“예의를 갖춰서 잘 모셔와라. 오늘 밤 자정에 2명. 비공식 포털로 도착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천명환이 돌아가고 나서, 김도경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왜 이렇게 답답하지?’
김도경은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그러나 묘한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S급 각성자의 신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튼튼했다.
전투 능력뿐 아니라 면역력도 그랬다.
잔병치레는 일반인이나 앓는 것이었다.
몸이 사소하게 결리거나 불편한 감각도 못 느껴본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꼭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는 것 같았다.
심장을 조이는 답답함도 함께였다.
김도경의 신경이 절로 예민해졌다.
돌이켜보니 <크로노스의 미궁> 균열에서 나온 이후로 그런 것 같았다.
‘심리적인 이유일까?’
한건우에게 보기 좋게 패배해서 그런 걸까.
‘그때의 승부는 공평하지 않았어.’
전투에 공평이라는 개념이 어디 있겠냐만.
완전히 승복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한건우는 체력을 아낀 상태였고, 김도경은 무척 지쳐 있었으니까.
‘...설마 두려움 때문은 아니겠지?’
그것만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해진 김도경이 책상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
번쩍.
한건우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제 됐어.”
한건우가 이비현을 불렀다.
그가 <주시자의 뱀>으로 김도경의 몸 속에 들어갔다 올 동안.
그녀는 한건우의 침상 옆에 서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한건우 씨는 대체 뭘 하는 걸까?’
이비현은 호기심을 억눌렀다.
그녀는 일단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한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색의 드래곤 갑주를 입은 채였다.
그는 여기 온 이후로 항상 용갑을 입고 지냈다.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천망의 실력자들이라···.’
정확히 어떤 자들인지는 모른다.
김도경의 말에 따르면 높은 계급일 것이다.
천망의 관습대로 2인 1조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추측뿐.
‘천망, 하늘의 그물....’
그 조직의 이름은 공포의 상징이었다.
천망의 요원을 건드리면 무조건 복수를 당한다고도 했다.
한건우는 두렵지 않았다.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 자신감을 주었다.
그가 패배한 적이 있던가?
한건우가 쓰러뜨린 균열의 마수들은 셀 수조차 없었다.
블랙 타란튤라, 고대신 히드라, 대장 그리핀, 기갑 매머드, 맹독 바실리스크, 서리거인의 왕까지···.
마수들의 모습과 움직임, 취약점까지.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마수들은 막대한 경험치로 바뀌어 그의 스탯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악명 높은 미등록자가 되었을 이비현.
사악한 미등록자, 염제 신광우.
알파스의 길드 마스터 박이경.
일본 야쿠자, 흑천회의 두목 검귀.
그 밖에 이름조차 모르고 무기를 맞댄 많은 적들.
국내 랭킹 2위의 김도경까지.
많은 적과 싸웠고, 모두 이겼다.
일부는 동료가 되었고, 일부는 죽여서 특성을 흡수했다.
이제는 드래곤까지 얻었다.
심지어 아직 성장 중인 드래곤이었다.
‘어떤 적이 오든 상관없어.’
한건우는 자리에서 떨쳐 일어났다.
*
자정이 되기 전, 만주 지방의 소도시.
사람이 다 떠난 폐허였다.
까마귀와 들개 떼만 분주히 오갔다.
천명환은 이번에도 먼저 도착했다.
중국 천망의 요원들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전과는 태도가 달랐다.
흠잡을 데 없이 바른 자세였다.
부하들에게도 경고했다.
“고위 계급이 직접 온다고 했다. 행동에 주의해라.”
“예!”
이런 버려진 도시에 비공식 포털을 유지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와보니 더 놀라웠다.
분명 여기가 포털이라고 해서 왔는데.
도착한 좌표는 낡은 방공호였다.
아무런 일도 생길 것 같지 않았다.
까악- 까아-
까마귀 우는 소리만 불길하게 울렸다.
‘설마 바람 맞는 건 아니겠지?’
천명환이 슬쩍 손목시계를 보았다.
11시 59분.
초침이 한 바퀴 돌아 0초를 가리킬 때였다.
우우우웅-
“!”
방공호 안이 울렸다.
포털이 작동되는 소리였다.
덜컥.
방공호의 문이 열렸다.
어둠을 뚫고 어슴푸레하게 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천명환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
그 때였다.
쿠콰과과과-!
엄청난 폭발음이 터졌다.
순간 천명환의 시야가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