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제물
김도경은 자신이 모시는 <아르고스의 주인>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 천망에서 강한 각성자들을 함께 보내겠다. 함께 계시를 이루라.
주인의 말을 듣자마자, 거의 즉시.
중국의 <천망>에서 연락이 왔다.
오늘 밤 사람을 보내겠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결정이었다.
‘하긴 그쪽도, 손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하면 안 되지.’
만주 사태로 이익을 얻는 건 특수안보부뿐만이 아니었다.
천망도 비슷한 이득을 볼 텐데.
그쪽에서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저쪽에서는 장소를 제공해주기는 했다.
‘제대로 통치도 못 하던 그깟 황무지··· 빈 땅 좀 제공한 거로 생색은.’
김도경은 천망 측에 불만이 있었지만,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았다.
‘한건우만 깔끔하게 치워 주고 가라. 그러면 더 바랄 게 없지.’
김도경은 <아르고스의 주인>이 알려준 계시를 믿었다.
그걸 이루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한건우만 없어지면, 그 다음 단계는 김도경의 힘만으로 가능했다.
1만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의 주인은 어느 나라여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한국이어야겠지.’
국내에서 발생한 일이어야, 국내 정세를 뒤바꿀 수 있으니까.
그러려면 무대를 만주에서 한반도 쪽으로 옮겨야 했다.
원정대를 잠시 철수하고, 민간인 희생자가 어느 정도 나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각성자들의 세력도 재편할 것이다.
상급 각성자 중에서 반항적인 세력을 도려내고, 협조적인 자들로 그 안을 채우면 된다.
물론, 몰래 각성자들을 선별해서 죽음으로 몰아넣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해야 하고, 실패할 확률도 높았다.
목격자가 없는 만주 땅과 달리, 한국으로 퇴각하고 나면 더 조심해야 했다.
‘차라리 잘 됐어.’
김도경은 웃었다.
한건우가 반항해준 덕분에, 일이 더 편하게 되었다.
죽여야 할 자들과 살려야 할 자들이 반으로 깔끔하게 나눠질 것 같았다.
일단 한건우를 지지하는 이들은 여기 남는다고 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구심점인 한건우만 없애면 돼. 그러면 일사천리다.’
김도경은 비서인 천명환을 불렀다.
**
“비현아.”
한건우가 막사 안의 허공에 대고 이비현을 불렀다.
이비현이 유령처럼 스르륵 나타났다.
“네 부하들은 어딜 그렇게 다녀?”
한건우가 물었다.
한건우가 이비현에게 요청했었다.
솜브라의 정예 인원을 함께 만주에 데리고 와달라고.
미등록자인 그들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군대는 물론, 이능력 특수전단과 특수안보부까지 있는 곳이었다.
한건우는 솜브라의 안전을 위해 은신처로 쓸 아공간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그 안에 숨어있지 않았다.
이비현처럼 그림자에 숨어드는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들 몸을 숨기고 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요.”
이비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암살자 조직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한건우가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봤다는 제물이라는 거, 그게 뭔지 자세히 말해봐.”
한건우가 김도경의 눈과 귀로 알아낸 정보.
거기에 퍼즐을 맞춰봐야 했다.
‘<아르고스의 주인>이라는 자가 분명히 제물을 언급했어.’
정확히는 ‘천망에서 마지막 제물을 보낼 것이다’라고 했다.
이비현은 기다렸다는 듯, 품 속에서 작은 태블릿 화면을 꺼냈다.
혼자 쓰는 물건인데도, 몇 중으로 된 암호를 걸어놓았다.
한 번 봐서는 도저히 기억하지 못할 복잡한 암호와 생체인식이 훅훅 지나갔다.
‘사진이라도 찍어 온 건가?’
이비현이 보여준 것은 영상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찍은 것처럼 생생했다.
한건우의 눈이 커졌다.
기껏해야 목격담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거요.”
이비현이 이마에 쓰고 있는 고글을 톡톡 쳤다.
“음....”
이제까지 그게 야간 투시경 아이템인 줄만 알았다.
자세히 보니 고글 양옆에 조그만 렌즈 구멍이 보였다.
한건우가 다시 이비현이 가져온 영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 자리에서 영상을 다 보고, 한건우는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길드원들 전부 불러줘. 박이경까지.”
*
“이··· 이게 대체 뭐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차은비였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릴 듯했다.
“개같은 새끼들이구만.”
박이경이 으르렁거렸다.
그는 벌써 영상 내용이 잔뜩 이입한 것 같았다.
두 사람 외에 다른 이들은 충격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혹시 영상이 조작되기라도 한 건···?”
차은비가 급히 물었지만, 이비현이 고개를 저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본 겁니다. 영상은 보조적인 거고요. 누구처럼 못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
여전히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비현이 까칠하게 나오는데도, 차은비는 반응하지 못했다.
방금 본 영상이 워낙 충격적이었다.
*
때는 한밤중, 모래밭 언덕이 이어지는 사막 같은 황무지였다.
야간 투시경 렌즈가 한 바퀴 돌며 주변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조명이 없는 버려진 땅.
보이는 건 한정적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 거대하게 솟은 균열 입구가 2개.
야간 투시경으로 보는 균열 입구는 조금 특별했다.
밤하늘보다 더 검은 공간의 틈.
그 가장자리로 이계의 빛무리가 오로라처럼 새어나오고 있었다.
더 멀리, 언덕 틈으로는 군용 막사가 줄지어 있는 게 보였다.
마력으로 밝히는 희미한 조명도 보였다.
그 풍경만으로도, 사람들은 알아챌 수 있었다.
‘얼마 전 닫힌 2개의 균열!’
바로 <크로노스의 미궁>과 <지옥 광산>.
최강의 각성자들이 2개로 파티를 나누어 공략한 2개의 S급 균열이었다.
렌즈는 곧바로 뒤로 돌았다.
바로 근처에도 균열 입구가 있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균열.
언데드가 나오는 <심연의 부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직 공략 전인 균열이지만, 적어도 주위를 지키고 있는 군인들은 있어야 했다.
주위에 군인들이라고는 한 명도 안 보였다.
대신 제복을 입은 자들 몇이 말없이 서 있었다.
‘특수안보부 제복···.’
모래바람이 날리는 황무지에서도 제복의 각을 잡고 다니는 그들이었다.
「왜 이렇게 늦지?」
신경질적인 천명환의 목소리.
「곧 올 겁니다.」
다른 요원이 천명환을 살살 달래듯 말했다.
그 말이 들리자마자 소리없이 화물차가 도착했다.
「!」
차체에 소음기를 달고 있던 듯.
낡은 화물차는 겉보기와 달리 조용히 멈추었다.
천명환이 팔짱을 낀 채 손목시계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상대편은 중국 비밀조직 천망의 요원들.
그리 계급이 높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천명환은 이미 상대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늦으셨군요. 시간 맞춰 오라고 했잖습니까.」
천명환은 유창한 중국어로 짜증을 냈다.
한쪽 귓가에 자동 통역이 되는 헤드셋을 끼우고 있었지만, 그걸 쓰지 않아도 되는 실력이었다.
화물차 안에 탄 자들은 그런 천명환과 눈이 마주쳤다.
천망 소속의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고개조차 까딱이지 않고, 소 닭 보듯 하면서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처컥!
짐칸의 뒷문이 저절로 열렸다.
위이이이-
화물차 짐칸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안에 들어있던 화물이 쏟아졌다.
마치 이비현이 가져온 고철을 쏟아내는 듯했다.
그러나 짐칸에 실린 것은 고철도, 화물도 아니었다.
손발이 묶이고, 재갈이 물려 있는 수십 명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눈까지 단단히 가려져 있었다.
각성자라면 마력 저감장치로 묶여있을 텐데.
평범한 구속구를 보니 모두 일반인인 듯했다.
「아니, 이게···.」
천명환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천명환이 화물차 운전석으로 다가가서 차문을 항의하듯 두드렸다.
창문이 아주 찔끔 내려갔다.
「저기요, 이렇게··· 이 상태로 가져오시면 어떡합니까? 들은 말과 다릅니다만.」
운전석에 앉은 천망의 요원이 냉랭하게 답했다.
그도 통역 헤드셋을 끼우고 있었다.
「우리도 들은 말과는 달랐어. 이 밤중에 급하게 필요하다며 갑자기 불러냈잖아?」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이러시면 상부에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 천망 소속의 요원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마주보며 껄껄대며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하하하, 소국의 상부라니 무섭군. 마음껏 보고해라. 우린 부탁한 대로 처리했어.」
「맞다. 너희들 요청대로 제물을 이렇게 많이 준비해 줬어. 이제 한국이 알아서 해라.」
천명환의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졌다.
차르르르···.
그때, 땅바닥에서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화물칸에서 쏟아진 사람들 소리였다.
그들은 눈이 안 보이는 채로 기어서라도 도망가려 했다.
서로 단단히 묶인 쇠사슬이 쩔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으···.”
천명환은 골치가 아팠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이 자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제물을 산 채로 가져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천명환은 당연히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몰랐다.
천명환은 그들을 노려보았다.
‘천망 놈들이 날 길들이려고 하는구나.’
이들도 이번 일이 실패하면 문책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배짱을 부리는 것뿐이다.
그런 줄 알지만, 마음이 급했고 다른 수가 없었다.
천명환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한 번만··· 협조해 주십시오.」
중국 요원들은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오히려 차량을 출발하려는 듯 시동을 걸었다.
천명환의 뒤에서 다른 특수안보부 요원들이 바짝 굳은 채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잠시만요···!」
천명환은 다급히 차를 가로막았다.
차마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천명환이 화물차를 붙잡고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
중국 요원들이 서로 고개를 마주보았다.
그들이 동시에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요원이 품 속에서 작은 아이템을 꺼냈다.
실험실에서 쓸 것 같은 작은 플라스크였다.
펑-
중국 요원은 플라스크 뚜껑을 열었다.
「-」
중국 요원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진언 같은 시동어를 외었다.
그리고 벌어진 일은 놀라웠다.
바닥에 묶여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물 밖으로 건져진 물고기처럼 크게 요동쳤다.
재갈이 물려있어 소리를 못 지르지만,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게 느껴졌다.
스으으으···.
사람들의 피부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트드드드···.
관절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기도 했다.
생명력을 흡수당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미라처럼 말라붙어갔다.
사람들에게서 모인 생명력은 진하게 압축되어 손가락만한 플라스크 안으로 모였다.
그 색은 타르처럼 검은 칠흑이었다.
인간에게 나왔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빛깔이었다.
「하···.」
천명환은 그 끔찍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생전에 원한이 많은 자들이라, 기운의 질이 좋아.」
중국 요원은 검은 플라스크의 뚜껑을 힘겹게 닫았다.
그는 예고도 없이, 그 플라스크를 <심연의 부름> 균열 입구 앞에 수류탄처럼 내던졌다.
파아앗-!
수류탄이 터지는 듯, 마기가 폭발했다.
「악!」
특수안보부 요원들은 급히 바닥으로 엎드리며 보호 스킬을 펼쳤다.
그때 렌즈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비현도 다급히 충격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은신한 모양이었다.
중국 요원들은 우산처럼 생긴 아이템을 펴고 유유하게 서 있었다.
「크윽···.」
엉망이 된 천명환이 엎드린 채로 분노를 삼켰다.
그가 고개를 들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치지지지지···.
[S급 균열 - 심연의 부##]
-공략 조건 : ###
-잔여 ### : ####
지지직···.
「!」
천명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균열 입구의 상태창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걸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충격이었다.
중국 요원이 비웃음을 흘렸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인가? 놀랄 것 없어. 제물을 바쳐도 없는 일을 창조해내지는 못하니까.」
「....」
「만주에 균열이 나타나는 시간을 당긴 것처럼, 균열이 닫힐 시간을 당긴 것뿐이야. 행운을 빌지.」
중국 요원이 올라탄 차가 출발했다.
렌즈는 다시 안정된 균열의 상태창을 비추었다.
[S급 균열 - 심연의 부름]
요원의 말대로였다.
균열의 등급, 이름, 공략 조건은 똑같았다.
- 잔여 시간 : 6시간 26분 1초
「!」
4일이 넘게 남아있던 잔여 시간이 엄청나게 줄어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