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심연의 부름 (5) - 목적
회의가 끝나고, 각성자 군인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군인들은 군용 막사를 다시 세우고 있었다.
구울의 습격으로 상당수의 막사가 부서졌다.
모두 며칠씩 더 있게 되었으니, 잘 곳이 필요하긴 했다.
“와, 군대에 말뚝 안 박길 천만 다행이야. 쟤들은 맨날 저런 거 하겠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염> 길드 소속의 각성자가 잡담을 했다.
“불쌍할 거 없어. 여기 온 애들은 연봉도 많이 받는 애들이야.”
“연봉이 대수야? 군대 들어가면 균열 부산물을 하나도 못 먹는데.”
말을 받은 것은 라이벌 길드인 <기사단> 소속 각성자였다.
<거울의 숲>에서 죽을 뻔한 공통점으로, 두 사람은 친해져 있었다.
“그렇긴 하지. 그나마 우리는 60%는 먹잖아.”
“뭐 60%라고? 그거 뻥 아니고 진짜냐?”
홍염 길드원이 무심코 계약 조건을 발설했다.
기사단 길드원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해졌다.
“어? 다 이 정도 아닌가.”
“하 씨···. 계약서 잘못 썼나. 난 50%인데.”
기사단 길드원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연봉이 비슷하다는 사실은 저번에 확인했으니, 연봉 탓은 아니었다.
“그럼 만주에서도 50% 먹는 거야? 아까운데?”
“똑같지 뭐··· 와, 나도 홍염으로 옮길까.”
균열에 들어갔다 나오면, 마정석이나 아이템 같은 값비싼 부산물이 생긴다.
솔로 플레이라면 모를까.
길드에 소속된 각성자들은 각자 계약 비율이 있었다.
균열 부산물을 100% 가져갈 수는 없고, 길드와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순수하게 다 먹을 수 있는 건 경험치와 보상 스킬뿐이었다.
“그래도 뭐···. 쟤네들보단 낫잖아?”
홍염 길드원이 군인들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참 나. 공무원이랑 비교하면.”
기사단 길드원이 툴툴거렸지만, 사실이긴 했다.
군인이나 구조대로 일하면 균열 부산물은 그림의 떡이었다.
균열의 수익은 모조리 국고로 들어갔다.
개인은 한 푼도 못 가져간다는 소리였다.
“하긴 공무원이면 우리처럼 생쇼를 할 필요는 없겠지?”
“아무래도···.”
길드는 경쟁 문화가 심했다.
최상급은 어디서나 우대를 받으니 5년 계약을 맺기도 했지만, 중하급 각성자들은 대부분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야 했다.
성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잘릴 수도 있었다.
“난 진심으로 후방으로 빠졌으면 했는데. 우리 사장님들이 또 용감하게 손을 들고 말야.”
“그러게 말이다. 와이프가 둘째 임신만 안 했어도 당장 때려쳤다.”
둘은 동시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홍염 길드원이 투박한 응원을 건넸다.
“목숨 잘 챙기고 돈도 많이 챙겨서 무사히 돌아가자고.”
“그래. 저 꼴은 안 나야지.”
기사단 길드원이 들판에 타오르는 연기를 가리켰다.
멀리서 군인들이 구울에게 당한 시신 몇 구를 모아서 불에 태우고 있었다.
화염 계열 각성자 군인들이 나선 모양이었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죽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었고, 죽을 뻔한 적도 많았지만.
누구나 숙연해지는 광경이었다.
한참 후, 홍염 길드원이 물었다.
“시체를 안 태우면 진짜로 언데드가 될까?”
“어, 밤을 넘기면 안 돼. 옛날에 용병 생활할 때 실제로 봤어. 다는 아니고 서넛 중 하나 정도?”
덜컹, 부르르릉···.
들판 쪽으로 웬 대형 트럭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건 뭐야?”
“글쎄··· 군용 트럭은 아닌데?”
기사단 길드원이 미심쩍게 고개를 갸웃했다.
둘다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만약의 상황에 뛰쳐나갈 대비를 했다.
대형 트럭의 짐칸에 가득 실린 것은 고철이었다.
건축 폐기물처럼 보이는 쇠파이프와 금속 자재가 가득 실려 있었다.
고철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딱 봐도 안전 기준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덜컹!
고철 더미가 아슬아슬하게 흔들거렸다.
“?”
트럭 쪽을 주목한 건 둘만이 아니었다.
의문에 찬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고철을 실은 대형 트럭은 태일제가 만든 장벽 뒤로 돌아갔다.
<심연의 부름> 균열 입구가 있는 곳이었다.
*
위이이이-
5톤 트럭의 짐칸이 기울어졌다.
콰르르르륵!
고철 더미가 땅으로 쏟아졌다.
“주문하신 고철 25톤입니다.”
트럭 운전사에게 대금을 건넨 사람은 이비현이었다.
한건우의 지시로, 중국의 정보원들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고철을 구해 오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만주 땅의 주민들은 거의 떠났지만, 건물의 폐자재 등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건우와 태일제가 그 옆에 서 있었다.
태일제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었다.
“고철치고는 순도가 꽤 높은 걸로 구해왔군.”
태일제는 금속을 살펴보기만 해도 성분을 구별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한건우는 태일제에게 따로 부탁한 게 있었다.
균열 입구를 덮는 구조물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노력하지. LK그룹의 <피라미드>에는 못 미치겠지만.”
태일제가 한건우에게 뼈 있는 농담을 했다.
태일제는 한건우가 LK그룹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슷할 겁니다. S급 균열 앞에서는요.”
그들은 균열 입구에 가까이 다가갔다.
공간이 찢어진 듯한 검은 틈 위로, 메시지가 보였다.
[S급 균열 - 심연의 부름]
-공략 실패.
미공략 균열에서만 볼 수 있는 메시지였다.
언제든지 2차 몬스터 웨이브가 닥쳐올 수 있는 상황.
이 근처에는 원래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을 잠시 장벽 뒤쪽으로 보냈다.
태일제는 한건우에게도 손짓했다.
“뒤로 물러나시오.”
한건우와 이비현은 약간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태일제는 고철더미에 다가가서 신중하게 손바닥을 갖다댔다.
금속의 성분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듯했다.
[특성 발동 : 금속 조작]
그으으으으-
끼기기긱.
고철 더미가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
한건우는 태일제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새기듯이 눈에 담았다.
태일제는 그야말로 장난감을 갖고 노는 듯했다.
흙 속의 금속 광물을 움직여서 장벽을 만드는 그였다.
그보다 훨씬 순도가 높은 고철이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수십 톤의 고철 더미가 꿀럭거리며 움직이더니, 허공에서 천천히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용광로에 넣고 녹인 것마냥 금속이 한데 뭉쳐졌다.
놀랍게도 공기의 온도는 그대로였다.
금속의 성질 자체가 자유자재로 바뀌고 있었다.
치르르르···.
쓸모없는 고철 더미였던 것이 한데 녹아 철괴가 되었다.
수십 톤의 철괴가 공중에 떠서 빙빙 돌아가다가, 점점 완전한 구형에 가깝게 변했다.
태일제의 꼿꼿한 뒷모습에서 고도로 집중한 기운이 풍겨졌다.
그는 의식만으로 수십 톤의 금속을 찰흙 주무르듯 했다.
터엉! 텅! 터엉!
대장장이가 망치로 녹인 쇠를 펴듯이, 보이지 않는 기운에 의해 철괴가 변형되었다.
거대한 주사위 같은 정육면체 모양이었다.
틀에서 빼낸 듯 깔끔했다.
‘저게 뭐야?’
이비현이 놀라기도 전.
쩌억!
철괴가 수천 개의 벽돌로 갈라졌다.
타다다다···.
철괴로 만들어진 벽돌이 균열 주위에 쌓아지기 시작했다.
태일제의 머릿속에는 모든 설계도가 들어있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원하는 모양이 완성되자, 태일제가 손을 뻗었다.
스으으···.
구조물이 아주 살짝 녹았다가 다시 굳었다.
그러자 벽돌의 틈새가 완전히 사라졌다.
압정 끄트머리 하나 들어갈 틈도 안 보였다.
‘세상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비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비현은 스스로가 꽤 강하다고 생각했다.
미등록자이니 정확한 등급은 알 수 없지만.
이제까지의 전투 경험상 최소 A급 수준은 될 거라고 자신했다.
게다가 한건우와 같이 다니면서 눈도 꽤 높아졌다.
웬만큼 강하다는 각성자를 봐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런 그녀도 태일제의 압도적인 특성 앞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바로 국내 랭킹 1위 태일제···.’
심지어 태일제가 싸우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니었다.
방금 보여준 능력만 봐도, 그가 얼마나 강한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건우는 태일제가 만든 구조물을 보고 있었다.
그는 꽤 만족했다.
한건우가 주문한 대로, 출입구가 있는 이글루 같은 모양이었다.
그제야 의문이 든 이비현이 물었다.
“사람이 드나들어야 하니, 통로를 아예 안 만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출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게 낫지 않나요?”
그녀의 맑은 목소리를 듣고, 태일제가 고개를 돌렸다.
“?”
이비현은 큼직한 회색 망토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태일제는 이제껏 그녀를 남자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
태일제는 이비현 쪽을 바라볼 뿐, 굳이 누구냐고 묻지는 않았다.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한건우가 설명했다.
“아니, 그러면 안 돼.”
“어째서죠?”
“어차피 이걸로 몬스터 웨이브를 완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어.”
“그럼요?”
“출입구를 한 방향으로 일원화하는 게 목적이야. 그것만 해도 바깥에서 수비하기가 훨씬 수월해지지.”
“아··· 그렇겠군요.”
출입 자체가 어려워지게 막아버린다면, 결과는 뻔했다.
마수들은 당연히 구조물을 부수고 나오려 할 것이다.
오히려 눈에 띄는 넓은 통로가 보이는 게 나았다.
그쪽으로 나가려 하지, 굳이 구조물에 충돌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건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용했다.
적이 나오는 통로를 일원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단단한 진형을 짤 수 있다.
미리 트랩을 깔아놓을 수 있는 건 물론이었다.
‘머리가 돌아가긴 하는군.’
태일제는 한건우에게 속으로 감탄했다.
구조물을 지어서 미공략 균열을 막겠다는 아이디어는 쉽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 미공략 균열을 막는 돔이나 피라미드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곳은 어디까지나 중국 땅이었다.
임시로든 뭐든 건축을 할 시간도 없었다.
한건우는 태일제의 능력을 제 것처럼 활용해서, 방어용 구조물을 만든 것이다.
태일제는 한 가지 궁금증이 들었다.
‘한건우··· 뭘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지? 그저 공명심인가?’
태일제는 한건우의 행동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적극적인 젊은 각성자들은 대부분 목표가 비슷했다.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고, 유명해지는 것.
그건 인간의 본능과 일치하니까.
충분히 공감할 만한 목표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S급의 능력을 가지고도 플레이어 활동을 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은둔하는 자들도 있었다.
한건우도 처음엔 성공을 쫓는 부류로 보였다.
그리고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벌써 돈도 많이 벌었고,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여.’
특수안보부와 맞서다니.
태일제는 시도해보지도 않은 일이었다.
만주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태일제는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관심 없었다.
인생은 각자도생, 적자생존이 아닌가.
자신과 일성 길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었다.
태일제는 철저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상상력이 빈약한 편이었다.
태일제로서는 도저히 한건우의 목적을 추측할 수 없었다.
‘음··· 그러니까··· 정치를 하려는 건가?’
그 정도가 한계였다.
*
“잠깐만요. 당연히 저녁이 오기 전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나요? 굳이 기다릴 이유는 뭐요?”
가디언의 길드 마스터가 목소리를 높였다.
“....”
김도경의 온화한 얼굴에 잠깐 노기가 스쳤다.
가디언의 길드 마스터는 S급이었고, 다혈질의 성격이었다.
예전에도 회의에서 김도경에게 대놓고 날을 세운 적이 있었다.
“어차피 공략 기한도 없는 미공략 균열 아닙니까. 내일까지만 좀더 정비하죠.”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요. 마수가 무한으로 리스폰되서 나오는 걸 옆에 두고 잠이 오나요?”
김도경은 잠깐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는 각성자 인생을 특수안보부 소속으로만 살아왔다.
군이나 정부 인사들도 특수안보부라고 하면 벌벌 떨며 한 수 접어주고, 민간 길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성의 태일제, 환인의 원유선 같은 이들이 좋은 예였다.
그들은 특수안보부의 가장 훌륭한 협조자였다.
김도경의 말을 거스른 적도 없었다.
김도경은 이곳에서 점점 특수안보부의 입지가 좁아지는 걸 느꼈다.
‘통제권을 뺏겼어···.’
모든 게 한건우 때문이었다.
작전회의에 길드 대표들을 참석시킨 것부터 시작해서.
회의에서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실적이 없으면 모를까.
누구보다 크게 활약하니 묵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건우에게 덤볐다가 죽기 직전까지 내몰린 이후.
김도경도 심리적으로 위축된 게 사실이었다.
‘오늘 밤이면 다 해결된다.’
김도경은 <천망>의 실력자들이 도착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