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심연의 부름 (4) - 아르고스
<주시자의 뱀>이 무슨 특성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한건우가 직접 써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절한 김도경에게 보이지 않는 뱀을 심었다.
제거했다면 반응이 왔을 것이다.
아직 눈치를 못 채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시야를 공유한다는 것.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김도경이 그냥 쉬러 간 게 아니면 좋겠군.’
한건우는 이비현에게 주변 경계를 부탁하고, 조용히 특성을 발동했다.
[특성 발동 : 주시자의 뱀]
“!”
시미터를 뽑고 돌아서려던 이비현이 흠칫 했다.
분명히 본 것 같았다.
한건우가 두 눈을 감기 전에, 파충류처럼 세로로 째진 금빛 눈을···.
스스스스···.
한건우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앞이 보였다.
‘이게 김도경의 시야···?’
김도경은 혼자서 특수안보부의 막사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의 구둣발 소리도 들렸다.
이곳은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구울의 피해를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꿈과는 전혀 다르게 생생한 감각이었다.
마치 김도경의 머릿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김도경이 느끼는 감정까지도 약간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분노와 혼란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도경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아무도 들이지 마. 우리 소속이 아닌 자가 들어오려 한다면, 바로 죽여라.」
「예, 알겠습니다.」
한건우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들었다.
‘천명환···.’
천명환은 김도경의 비서로 여기까지 따라왔다.
김도경은 자신의 비서 천명환을 싫어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별로 탐탁치 않아 하는군.’
거슬려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왜 비서로 데리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김도경은 가벽으로 만든 좁은 방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불조차 없는 간소한 침상이 보였다.
좁고 높은 원탁이 방 한가운데에 놓아져 있었다.
‘설마 낮잠이나 자려던 건 아니겠지?’
한건우는 실망할 뻔했다.
김도경은 침상 위에 정좌하고 기도하듯이 손을 모았다.
「아르고스의 주인을 뵙니다.」
우우웅-
검은 원탁이 반응했다.
‘저건 또 뭐야.’
검은 원탁 위에 홀로그램으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건 사람의 안구였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홍채가 선명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동공이 커졌다가 수축되는 게 훤히 보였다.
‘저런 건 듣도보도 못했는데?’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김도경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야말로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김도경이 바짝 긴장했다.
김도경 안에 있는 한건우까지 보는 것은 아닌가 하고.
순간 한건우도 굳을 정도였다.
형형한 시선의 압박감이 상당했다.
「사도 김도경. 계시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들었다. 왜인가?」
기계음처럼 부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눈알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김도경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성자 박이경은 죽었어야 한다. 비록 각성자라고 하나, 올바른 세계 질서와 어긋나는 자다.」
「알고 있습니다···. 방해가 있었습니다.」
황금색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김도경을 질책하는 듯했다.
「사도 김도경, 변명하지 마라. 계시에 방해가 없는 적이 있었던가?」
「...이번에도 같은 자입니다. 각성자 한건우입니다.」
한건우는 픽 웃음이 나왔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었군.’
이런 음침한 명령이라면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었다.
「....」
허공에 뜬 눈의 동공이 커졌다.
오직 눈뿐인데도, 타오르는 듯한 분노가 느껴졌다.
「사도 김도경. 자네는 계시를 이루는 데 실패한 적이 없었다.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인가?」
김도경이 울컥, 억울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더 조아렸다.
「...절대로 아닙니다. 계획을 3년 앞당기는 바람에··· 차질이 있던 듯 합니다.」
‘계획? 3년을 앞당겼다고?’
한건우의 머리가 서늘해졌다.
이번 만주 사태는 회귀 전보다 3년 앞서 일어났다.
이비현의 말대로인 걸까.
「곧 천망에서 마지막 제물을 보낼 것이다. 계시대로 하라.」
‘제물?’
한건우는 기묘한 단어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르고스의 주인이시여, 송구한 말씀이오나···.」
김도경은 오늘 있던 일을 낱낱이 고했다.
한건우가 아성체 드래곤을 타고 구울을 물리쳤으며, 철수하지 말고 맞서 싸우자고 선동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모두 그들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일이었다.
「선택받지 못한 자가 최소한 1만 명은 죽어야 한다.」
「물론입니다···.」
‘뭐라고?’
한건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1만 명.
마수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니.
‘민간인 1만이 죽어야 한다는 건가?’
한건우는 과거를 돌이켜보았다.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었다.
만주 사태에서 각성자 부대가 후퇴하고, 국경이 뚫렸다.
1만 7천 명.
그때 사망자의 추정치였다.
가족을 잃은 자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부상자는 물론 훨씬 더 많았다.
‘대체 왜 그런 짓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자신의 이름이 들렸다.
「각성자 한건우도 박이경과 함께 제거하라..」
김도경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는 자존심과 이성 사이에게 한참을 고민했다.
「....」
몹시 자존심이 상했지만, 김도경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제가 한건우를 이길 수가··· 제압하기가 어렵습니다.」
김도경은 참담한 기분이었다.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각오했다.
뜻밖에 그의 주인은 너그러웠다.
「천망에서 강한 각성자들을 함께 보내겠다. 함께 계시를 이루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도경의 마음속에 희열이 번졌다.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비굴함보다, 한건우를 찍어누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눈알 형상의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김도경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옷 매무새를 정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났다.
스스스스···.
한건우도 <주시자의 뱀>에서 벗어났다.
“비현아,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네?”
이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 ‘제물’이라는 걸 본 거야?”
“헉, 그건 대체 어떻게···.”
이비현이 사색이 되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알아낸 걸, 한건우는 몇 분 동안 눈을 감았다 뜨더니 깨우친 모양이었다.
“맞군.”
“네···.”
이비현은 빠른 포기를 했다.
그녀도 나름대로 정보 조직을 이끌고 있었지만.
한건우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너무 많았다.
‘알면 알수록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이제는 탐구하기를 포기했다.
한건우가 해내는 일은 일종의 마술쇼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자.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듣고.”
“네.”
김도경이 말한 10분의 휴식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김도경과 한건우, 두 사람이 없는 한 회의는 시작되지 않을 거니까.
파아악!
멀리 위쪽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건우의 드래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드래곤이 나는 벌판의 풍경.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아직 아성체 드래곤.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이나 마찬가지였다.
아기 해츨링 때는 귀여운 도마뱀 같았는데.
어느새 그런 모습은 사라졌다.
온몸을 뒤덮은 짙은 보라색의 비늘에는 매끈한 윤기가 돌았다.
긴 주둥이와 날카롭게 찢어진 눈, 쫙 벌어진 발톱은 무시무시했다.
차르르르···.
드래곤은 빠른 속도로 날면서, 여섯 개의 날개를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아찔한 곡예 비행이었다.
드래곤이 머리 위를 지나가면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러나 드래곤을 알 때부터 키운 한건우의 감상은 달랐다.
‘바람을 타고 놀고 있구나.’
드래곤은 새로 돋아난 날개를 뽐내고 싶어서 안달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몹시 귀여웠다.
이비현이 그걸 보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한건우 씨. 클래스 등록 안 하셨죠?”
“아니, 등록했지.”
각성자는 보통 각성해서 잠재 특성이 뭔지 알고 나면, 바로 클래스를 골라서 등록했다.
보통은 취직 때문이었다.
길드나 정부기관은 물론, 용병도 클래스를 보고 뽑으니까.
꼭 취직을 할 게 아니더라도, 클래스는 고르는 게 좋았다.
클래스에 맞게 능력이 집중되고 특화되기 때문이다.
한건우는 처음부터 클래스는 한 가지로 생각해놓은 게 있었다.
다양한 특성을 가진 자신에게 꼭 어울리는 클래스였다.
길드 마스터가 되고 나서야 클래스를 등록한 사람은 한건우뿐일 것이다.
클래스를 공식적으로 밝히지도 않았다.
자신의 정보를 널리 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건우가 창술사라느니, 법사라느니.
사람들이 멋대로 떠든 추측이 기정사실처럼 되었다.
심지어 뉴스나 신문에서도 가끔 오보를 낼 정도였다.
물론 한건우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뭘로 하셨어요?”
“웨폰 마스터.”
창, 검, 총, 석궁, 채찍···. 또는 마력을 사용한 무기들.
어떤 무기를 다룰 때에도 제한 없이 클래스의 특전이 적용되었다.
한건우가 알기로, 아직도 자신이 국내에 유일한 웨폰 마스터 클래스였다.
얼핏 듣기엔 좋은 것 같지만, 사람들이 안 고르는 이유가 있었다.
보통은 한 무기만 다루기에도 벅찼다.
그게 더 효율적이기도 했다.
한건우라는 이레귤러가 아니면 그렇다는 얘기였다.
“흐음···.”
“그건 갑자기 왜?”
“저 드래곤이 성체가 되면, 클래스 전직을 하시는 건 어떨까 해서요.”
“전직? 뭘로?”
전혀 추측이 되지 않았다.
“<용기사>요.”
“...!”
한건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 클래스가 시스템 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살아생전 드래곤 뼛조각 한 번 보기도 어려운데.
용기사 클래스라는 선택지가 있었나?
“물론 클래스 특전 없이도 이미 용을 타고 잘 싸우시지만···.”
“좋은 조언이야. 고맙다.”
한건우는 씩 웃었다.
흔한 검사 클래스만 골라도, 논 클래스일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했다.
검과의 일치감이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물며 ‘용기사’라는 클래스는 어떨까.
한건우는 이비현의 어깨를 툭툭 치고 다시 막사로 들어갔다.
*
김도경은 이미 앉아있었다.
한건우가 들어와 앉자, 당연하다는 듯 작전 회의가 재개되었다.
“시간이 없으니 속행하겠습니다.”
말의 내용과 달리, 김도경의 표정은 한결 여유로워져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과 소통을 하고 나서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아까 그 눈의 정체는 뭘까. 특수안보부냐, 아니면 또다른 놈들일까.’
특수안보부 쪽이라면, 정체는 확실했다.
공식적으로 특수안보부에서 김도경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니까.
바로 특수안보부의 수장이었다.
‘그런데 수장이라면 굳이 그렇게 비밀스럽게 소통할까?’
아니라고 해도 이상했다.
김도경이 모시는 주인은 특수안보부가 하는 일을 좌지우지할 권한이 있는 것 같았다.
‘!’
한건우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특수안보부가 끝이 아니구나.’
<아르고스>라고 했나.
그건 특수안보부를 조종하는 상위 조직 같았다.
외국에도 영향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중국의 <천망>과도 쉽게 협업하는 거야.’
생각을 마친 한건우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고민스러운 얼굴이었다.
짧은 휴식시간 동안 마음을 굳힌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김도경이 먼저 발언했다.
“쉬는 동안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습니다. 저는 한건우 플레이어의 말씀이 옳다는 결론입니다.”
“!”
사람들은 놀랐다.
원유선도 움찔했고, 태일제만이 포커 페이스를 유지했다.
‘뭐지?’
한건우도 아직 감이 안 잡혔다.
“미공략 균열을 파훼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만, 그 일을 많이 해오신 길드도 있으니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한건우에게 몰렸다.
김도경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를 포함해서, 일부 희망자는 <심연의 부름>을 파훼하러 들어가시죠. 나머지는 바깥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주십시오.”
각오하던 일이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일정 기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거나, 균열 파훼에 실패한다면···. 그때 생존자는 후방으로 빠져서 국경을 수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합리적인 방안으로 들렸다.
그때 누군가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이 균열은 그렇다 치고, 다른 S급 균열이 새로 터져도 감당이 될지···.”
“그건··· 최대한 중국 측에 도움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별로 기대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자기 땅 일에도 나 몰라라 하던 중국이 왜 갑자기 도와주겠는가.
김도경이 한건우를 응시했다.
‘한건우는 당연히 들어가서 싸운다고 하겠지. 저 드래곤도.’
천망의 강자들이 김도경을 도우러 오기로 했다.
한건우가 나대는 것도 여기서 끝이겠지.
김도경은 비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눌러 참았다.
김도경의 바람대로, 한건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와 아레스 길드는 미공략 균열에 들어가 싸울 겁니다.”
“우리 <홍염>도 들어가겠습니다.”
“저희도 싸우겠습니다.”
몇몇 길드 마스터들이 나섰다.
후방으로 빨리 철수하고 싶은 이들은 멋쩍은 표정이었다.
한건우는 오히려 김도경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살려두어야 하나,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깔끔하게 덜어주었다.
‘알아서 목을 내밀고 찾아오는구나.’
김도경의 뒤에 서 있는 천명환과도 흘깃 눈이 마주쳤다.
‘너도 꼭 같이 와라.’
해묵은 감정을 해결할 때가 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