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109화 (109/238)

#109심연의 부름 (3) - 위화감

임시로 만든 막사에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모여든 이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얼른 들어가서 쓸어버리자고.”

“그래요, 기다려서 뭐 합니까.”

방금의 승리에 힘입어 곧바로 전투도 불사할 듯한 자들.

“....”

침통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들.

바로 초반에 인명피해를 입은 조직에 속한 자들이었다.

몇몇 길드는 길드원을 잃었고, 각성자 군부대도 마찬가지였다.

구울은 기본적으로 강한 마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벌레도 수천 마리가 모이면 무시할 수 없는 적이 된다.

하물며 마수는 오죽할까.

이제까지 원정대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있었지만, 사람이 죽은 것은 처음이었다.

일성이나 환인은 부하를 한 명도 잃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태일제와 원유선 역시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그런 이들이 한 장소에서 만나자, 부정적인 감정이 이겼다.

유쾌하게 떠들던 이들도 점차 입을 다물었다.

“<심연의 부름> 균열은 아직 열려있습니다. 첫 번째 몬스터 웨이브는 구울의 습격이었죠.”

김도경 지부장은 여전히 작전의 총책임자였다.

그가 거두절미하고 회의를 시작했다.

작전 회의 참석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도경에게 꽂혔다.

김도경은 한건우 쪽은 애써 쳐다보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을 잃으신 분들께는 애도를 표합니다.”

“....”

차은비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칠 뻔했다.

사람의 목숨을 누구보다 가볍게 보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때 한 여자가 나섰다.

10위권 길드에 속하는 <홍염>의 길드 마스터, 홍가영이었다.

“어쨌든 첫 번째 몬스터 웨이브는 해결했잖아요. 지금 기세를 몰아서 미공략된 균열을 닫아야죠. 안 그런가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다만 구울은 저 균열에서 가장 약한 마수일 거라는 점. 그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흠···?”

홍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김도경 지부장이 왜 시간을 끄는지 알 수 없었다.

몬스터 웨이브는 무한정 리스폰된다.

구울이 가장 약하든 말든, 어차피 닫아야 하는 균열이었다.

최대한 빨리 도전하는 게 맞지 않을까.

특히 지금은 정오에 가까운 시간.

해가 쨍쨍해서 언데드 마수들이 취약한 지금이 기회였다.

“구울, 뱀파이어 일족··· 운이 나쁘면 리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도경이 설명하자, 사람들이 신음을 삼켰다.

구울은 보병과 같았다.

느리게 걸어 다니며 근거리 공격만 할 수 있었다.

그런 구울만으로도 그들은 고전했다.

뱀파이어는 이름처럼 사람의 피를 빨아먹어 기운을 흡수하는 건 물론이고, 비행을 할 수 있었다. 피의 안개를 뿌려 원거리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리치는 상당히 골치아픈 존재였다.

그들은 머리가 좋았고, 높은 수준의 흑마법을 썼다.

상급 흑마법사 클래스 각성자를 상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요? 들어나 봅시다.”

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기사단>의 길드 마스터, 김온이었다.

<홍염> 길드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라이벌 관계였다.

“저녁이 오기 전에 철수해야 합니다.”

“뭐요!”

김도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후퇴라는 말이 나오자, 회의 참석자들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일리가 있는 얘기요.”

“?”

태일제가 김도경의 의견을 지지했다.

공식석상에서 쉽게 말을 하지 않는 신중한 성격의 그였다.

랭킹 1위, 태일제가 입을 열자, 좌중은 조용해졌다.

“저녁이 오면 언데드의 위력이 강해질 겁니다. 지금 여기서 막는다면, 성공할지도 모르나 각성자들만 너무 큰 피해를 봅니다. 압록강 너머로 철수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언데드들은 물을 못 건너니까.”

“....”

사람들의 눈이 흔들렸다.

거기에 원유선도 가세했다.

“찬성이에요. 일반 군대도 동원해서, 압록강을 따라 경비도 강화해야죠. 솔직히 여기는 우리나라 영토도 아니에요. 반드시 이 땅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봐요. 평양까지만 안 밀리면 되죠.”

원유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접근이었다.

사람들이 섣불리 찬성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회귀 전과 같은 식이군.’

한건우가 생각에 잠겼다.

마치 짠 것처럼 같은 흐름이었다.

회귀 전에는 언데드 균열이 열린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논의가 이런 식으로 흘러갔고, 결국 본국 영토가 마수에게 침범당했다.

주민들의 피해도 컸다.

‘흠···.’

한건우는 희미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단서가 떠다니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만 이 흐름에는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반대입니다.”

“!”

한건우가 나섰다.

방금 전 전투에서 일당백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그였다.

가장 발언권이 셀 수밖에 없었다.

김도경의 입가에서 예의바른 웃음기가 사라졌다.

“강을 끼고 방어하며 싸운다고요? 상대쪽에 보병만 있다면 해볼 만하겠죠. 하지만 방금 지부장님 입으로 뱀파이어, 리치를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

한건우가 전술적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지.

김도경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강을 끼면 분명히 구울은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이죠.”

“왜 그렇죠? 언데드는 수영을 못 하는데요.”

다른 길드 마스터가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

“지금은 10월이죠. 압록강은 갈수기입니다.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얕은 지점도 있다는 겁니다. 국경 전체를 방어하지 못하는 이상, 분명히 뚫릴 겁니다.”

“아···.”

길드 마스터들이 동요하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압록강의 깊이 같은 것까지는 잘 몰랐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강을 끼고 붙으면 원거리 화력 싸움에서 밀릴 겁니다. 상대는 무한히 생성되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각성자 군부대의 대장 중에서도 한건우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다.

‘군인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것들인데···. 어떻게 저런 것까지?’

그들은 한건우를 새삼 다시 보았다.

“그리고 국경이 뚫리면, 시골이나 외곽에 사는 민간인들은 죽게 됩니다. 뱀파이어나 리치 같은 중상급 언데드에게 죽으면, 그 중에서는 언데드가 되는 이들도 나올 겁니다.”

“허···.”

방금 구울의 습격으로 부하를 잃은 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구울에게는 죽으면 시체가 잡아먹힐 뿐이지만, 중상급 언데드에게 피나 생명력이 빨리면 그대로 구울로 변할 수도 있었다.

언데드가 된 동료와 싸워야 할 수도 있다는 점.

그게 언데드가 나오는 균열의 무서운 점이었다.

“하지만···.”

“방금 한건우 마스터의 말이···.”

회의석상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상반된 의견을 준 것이다.

결정에 시간 제한이 있는 상황.

다들 마음이 급했고, 의견은 분분했다.

“그만.”

김도경이 엄격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말로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10분간 조용히 각자 생각을 정리해 주십시오. 그 후에 결정하겠습니다.”

“....”

침묵이 흘렀다.

김도경은 다른 용무가 있는지, 잠시 자리를 떴다.

그걸 지켜보던 한건우는 이상한 기척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비현이었다.

그녀는 한건우 건너편 사람의 그림자 뒤에 숨어들어 있었다.

기척은 완벽하게 숨겼다.

아무도 이비현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한건우는 좋은 생각이 들었다.

‘이비현의 보고를 들어야겠어.’

이비현과 같이 이곳에 왔지만, 한동안 떨어져 지냈다.

그녀는 저런 식으로 듣고 본 내용이 많을 것이다.

한건우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갔다.

이비현도 그림자를 옮겨타면서 한건우를 따라왔다.

“한건우 씨.”

한건우는 아무도 못 볼 만한 구석으로 갔다.

[특성 발동 : 공간 왜곡]

주변 공간을 진공 벽으로 둘러쳤다.

소리가 바깥으로 나가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비현은 항상 입고 다니는 회색 망토 차림이었다.

몸을 숨기고 다니느라 고생을 했는지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새하얗던 피부는 창백할 정도였다.

“고생 많았어.”

“이, 이건 계속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

이비현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번 균열, 언데드가 나오는 <심연의 부름>이요.”

“응.”

이비현이 이어서 한 말은 한건우에게도 충격이었다.

“특수안보부··· 그쪽 사람들이 일부러 연 거예요.”

“뭐라고?”

한건우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이제까지 생각하고 있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지는 얘기였다.

한 마디 말만 듣고 쉽사리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믿기 어려우실 건 알지만···.”

“자세히 말해 봐.”

이비현은 짧게 심호흡을 했다.

“한건우 씨가 균열에 들어가있을 동안, 주로 특수안보부 요원들을 따라다녔어요. 그 사람들, 김도경 지부장 말고는 균열 공략에도 참여하지 않았잖아요. 의심스러워서요.”

“그렇긴 하군.”

김도경 지부장이 워낙 눈에 띄게 행동해서, 딱히 다른 특수안보부 요원들이 뭘 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중국에도 특수안보부 같은 조직이 있는 것 아세요? <천망>이라는 비밀 조직이에요.”

“천망?”

한건우도 물론 알고 있었다.

각성자뿐 아니라 민간 정보까지 독점하고, 수사권과 즉결처분권까지 가진 조직, <천망>.

중국의 천망에 비하면 그나마 우리나라 특수안보부는 양반이라고 했다.

적어도 특수안보부는 정부의 공식 조직도에 존재하기는 했다.

하는 일을 비공개하고, 언론 보도 같은 것도 막았지만, 존재 자체가 비밀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도경 서울지부장이 이번 작전의 공식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천망은 달랐다.

그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번 균열이 열린 게··· 아니, 어쩌면 이번 만주 사태 전체가 천망과 특수안보부의 합작품이에요.”

“....”

한건우는 납득이 안 되었다.

특수안보부는 물론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

자신이 직접 당하거나, 확실히 아는 것만 해도 상당했다.

인간을 제멋대로 실험체로 써서 죽이고.

마수나 균열에서도 실험을 하다가 인명 피해를 내고.

군인이나 특수전단 대원들을 쓰다 버릴 소모품 취급해서 죽음으로 내몰고.

언론을 주물러서 사고를 조작하거나, 다른 조직의 내부 결정에 몰래 개입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하는 것 정도는 애교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그래도 이건 달라.’

한건우의 눈에 혼란이 일었다.

특수안보부가 악행을 저지르긴 하지만.

방법이 크게 잘못됐을 뿐 적어도 최소한의 선은 있다고 여겨왔다.

소수의 무고한 희생자를 내긴 해도, 자기들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내가 여전히 착각하고 있던 걸까?’

한건우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이비현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듣기 전까지는.

그리고 가능하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한건우는 문득 김도경을 떠올렸다.

아까 10분의 휴식을 말하더니, 어디론가 급히 가지 않았던가.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김도경과 태일제, 원유선은 한 패거리였다.

작전회의에서 그들이 유도하던 방향은 철수였다.

그들이 유도하는 방향으로 일이 안 풀리고 있으니.

김도경의 입장에서 지금 할 일은 둘 중 하나다.

상부에 긴급히 보고해서 지시를 듣거나, 같은 작당들과 터놓고 논의하는 것.

‘그렇지.’

김도경의 몸에 심어둔, 보이지 않는 작은 뱀.

<주시자의 뱀>이 활약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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