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심연의 부름 (1) - 장벽과 드래곤
<크로노스의 미궁> 이후로, 여기 들어왔던 자들은 자연스럽게 두 무리로 나뉘었다.
한쪽은 특수안보부 측이었다.
원유선, 쓰러져 있는 김도경.
그리고 그를 후송하는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
다른 무리는 한건우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차은비와 박이경, 그리고 임진호.
겉보기에는 단순한 구도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이능력 특수전단의 권석진 대장 때문이었다.
한건우는 균열을 나오기 전, 이능력 특수전단의 권석진 분대장과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
권석진 분대장이 미세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한건우를 보는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건우 저 자가 말한 대로 이뤄졌어.’
상황은 한건우가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
권석진 분대장은 김도경의 명령을 따랐지만,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실패했다.
그러면서 의심도 사지 않았다.
한 가지, 아직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있었다.
한건우가 부숴버린 강화 알약이었다.
‘그것도 정말··· 한건우의 말대로라는 것인가.’
한건우는 분명히 경고했다.
나중에 위험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약물이니, 절대 부하들에게 먹여서는 안 된다고.
‘설마 김도경 지부장이 그렇게까지···?’
지난 연구소 사건 때, 자신의 부하를 죽인 건 김도경이라고.
권석진 분대장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것만은 믿고 싶지 않았다.
이능력 특수전단이 <특수안보부의 개>라고 불린다고 해서, 진짜 개는 아니지 않은가.
‘백 번 양보해서 그때 박 중사를 없애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 쳐도··· 이건 아니지.’
이게 진짜라면, 김도경 지부장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권석진은 들것에 실린 김도경 지부장을 흘깃 보았다.
그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
슈우우우-
한건우가 균열 밖으로 나왔을 때.
바깥은 전쟁터였다.
그으으으···.
모래 바람이 이는 황무지 쪽.
얼핏 사람처럼 보이는 수백, 수천의 그림자가 보였다.
음산한 울음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쉬이익-!
피유우-
콰과과과···.
각성자들이 원거리에서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자들은 없었다.
바람을 타고, 시체가 썩는 듯한 고약한 냄새가 풍겨왔다.
차은비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저건 뭐죠?”
“구울입니다.”
임진호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건우가 날카롭게 물었다.
“구울이라고? <심연의 부름> 균열이 열린 거야?”
“그런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건우의 얼굴이 굳었다.
<크로노스의 미궁> 공략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지만.
작전 회의 전에 세 균열의 공략 시간을 똑똑히 확인하지 않았던가.
아직 <심연의 부름> 균열은 공략 기간이 며칠 정도 남아있어야 정상이었다.
‘일단 사정은 나중에 파악하고.’
중요한 건 균열이 공략되지 못하고 열려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첫 몬스터 웨이브로 구울 떼가 밀려나온 것 같았다.
구울의 수가 너무 많았다.
바다에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몬스터 웨이브’라는 표현은 이래서 나온 것일까.
‘구울 하나하나는 상대하기 어렵지 않지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을 듯했다.
진지가 있는 쪽으로 밀려오는 구울 떼를 막는 게 급선무였다.
한건우가 전장을 둘러보았다.
최일선의 한 지점에 그의 눈이 멈추었다.
“...태일제?”
태일제가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고고하게 서 있었다.
가장 선두에 나선 그를 향해, 구울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왔다.
그어어···.
썩어가는 시체처럼 생긴 구울이었다.
구울은 차가운 입김으로 따뜻한 피를 가진 생물들을 얼리고, 산 채로 잡아먹었다.
태일제는 무릎을 꿇고 땅에 두 손바닥을 갖다댔다.
[특성 발동 : 금속 조작]
그그그그그···.
“크으윽···.”
땅 속 깊은 곳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태일제의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한건우는 태일제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가 차은비와 함께 태일제에게 가까이 갔다.
“저기 버프 넣어주죠.”
“아··· 네!”
차은비의 <신의 가호>가 태일제에게 퍼부어졌다.
한건우도 동시에 <용맹의 가호>를 쏟아부었다.
“!”
태일제는 갑작스럽게 강해진 힘에 놀랐지만, 뒤를 돌아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땅 속의 물질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으으으-
드드드드···.
겉보기에는 그저 황무지처럼 보이지만, 땅 속에는 금속 광물 성분이 섞여있었다.
금속 광물은 태일제의 특성에 의해 덩어리지어 뭉치면서, 흙을 밀어냈다.
쿠과과과-!
쿠르르···.
“저, 저것 봐!”
“벽이다!”
태일제가 손을 댄 곳을 중심으로, 길게 이어진 장벽이 생겨났다.
금속 광물을 뼈대로 하여 흙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장벽이었다.
마치 만리장성을 연상케 했다.
사람들은 태일제의 특성이 가진 위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건우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태일제. 엄청나군.’
낮은 토성 하나만 생겨도, 전세가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
태일제는 전투의 양상 자체를 바꿔버렸다.
“올라가자!”
“으아아!”
후방에 있던 각성자들이 용기를 얻어 가까이 다가왔다.
궁수와 저격수, 법사 같은 원거리 딜러들이 서둘러 장벽 위로 올라갔다.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 군부대는 밍기적거렸다.
그동안 민간 길드에서 온 각성자들이 활약했다.
피유우웅-
콰광!
그어어···.
장벽이 생기자, 상황이 유리해졌다.
냉기를 내뿜는 구울은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없었다.
밀려오던 구울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와!”
그때 태양을 가리던 구름이 옅어졌다.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키이이잇!
키이익!
햇볕에 약한 구울들이 괴성을 질렀다.
뱀파이어와는 달리, 구울은 낮에도 활동을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흐리거나 비 오는 날씨에만 가능했다.
대낮의 직사광선을 맞으면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좋아, 지금이야.”
다시 거인화한 박이경이 호기롭게 말했다.
박이경은 균열 안에서 거의 힘을 쓰지 않은 채였다.
한건우와 김도경이 싸울 때 역시, 끼어들 기회가 없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본의 아니게 힘을 아껴둔 상황.
온몸이 근질거렸다.
까앙-
박이경이 기운차게 너클을 부딪쳤다.
그의 거대한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박이경이 허락을 구하는 듯,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한건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이경은 장벽 앞으로 달려갔다.
쿵 쿠웅···.
쿠웅- 타앗!
달려가면서 거인화한 박이경은 한달음에 장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허억!”
그의 위용을 본 각성자들이 경악했다.
한건우가 임진호에게 물었다.
“진호야. 설아와 수호는 어디 있어?”
“아까 구울들이 밀려올 때, 하필 우리 막사가 가까운 데 있었어. 한참 맞서 싸우다가, 내가 건우 형에게 도움을 청하러 갈 테니 후방으로 피해 있으라고 했는데···.”
임진호가 석연치 않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은설아와 임수호는 꽤 눈에 띄는데, 얼른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키에에엑-!
철의 장벽 건너편에서 귀청을 때리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건우는 알 수 있었다.
“드래곤?”
직접 손으로 먹이를 주며 자식처럼 키운 드래곤 해츨링이 아닌가.
그 울음소리를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금 낯선 구석이 있었다.
‘아직 해츨링인데··· 저렇게 울음소리가 컸나?’
“앗, 안 돼!”
임진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은설아가 데리고 있던 드래곤이 저 건너편에 있었다.
은설아와 임수호는 장벽 반대쪽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화아악-!
한건우의 등에 화염의 날개가 돋았다.
시위에서 쏘아진 화살처럼, 한건우가 위로 솟구쳤다.
붉은 화염의 날개 탓에 그는 전설의 불새처럼 보였다.
장벽에 올라가서 공격하던 각성자들, 그리고 후방에서 진지를 지키던 군인들.
많은 이들이 멍하니 한건우를 올려다보았다.
슈우우우-
한건우는 순식간에 점이 될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
지상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저기군.’
<화식조의 눈>을 쓸 것도 없었다.
냉기를 내뿜으며 새카맣게 몰려드는 구울 무리 속.
제법 거칠게 포효하며 날뛰고 있는 드래곤이 보였다.
그 옆에 세 개의 하얀 점이 보였다.
‘은설아와 임수호, 그리고 그리핀이군.’
한건우는 의문이 들었다.
‘왜 다들 날지 않고 바닥에 있지?’
구울은 날지 못했다.
드래곤은 물론이고, 은설아와 임수호도 그리핀을 타고 날면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슈우웅-
한건우는 날개를 접고 추락하듯이 하강했다.
가까이 가니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핀은 한쪽 날개가 부러진 듯했다.
날개를 퍼덕이며 애썼지만 날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용케 지금까지 버텼군.’
구울은 나름대로 인간형 마수이기에, 은설아의 테이밍이 통하지 않는다.
임수호의 얼음 특성도 구울과 상성이 별로 안 좋았다.
우선 구울은 냉기에 타격을 받지 않았다.
얼음으로 물리적 공격을 해도 끊임없이 재생했다.
기특하게도 어린 드래곤이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한건우는 조금 감동했다.
끝나면 싱싱한 마수 고기를 먹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해츨링이 언제 이렇게 컸지?’
전에 본 드래곤은 그리핀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는데.
어쩐지 쑥 자라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고 귀여웠던 주둥이도 길어지고, 눈도 더 매섭게 찢어졌다.
이제 해츨링이라고 부르기 어색할 정도였다.
“건우 형!”
한건우를 발견한 임수호가 손을 흔들며 절박하게 외쳤다.
한건우는 대답하는 대신에, 아그니의 화염을 초고도로 끌어올렸다.
살아있는 시체인 구울.
그들을 재로 돌려보낼 수 있는 건, 바로 화염 속성의 공격이었다.
콰아아아-
화염방사기가 벌떼를 쓸어버리는 것처럼.
초고온의 화염이 큰 원을 그리며 뿜어졌다.
한건우의 불꽃은 몰려든 수백의 구울 떼를 깨끗이 청소했다.
“아···.”
한건우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린 은설아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혀, 형···.”
키에에엑!
드래곤도 한건우를 보고 반가움의 울음소리를 냈다.
“어쩌다 너희들만 여기 남았어?”
한건우는 길드원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속이 상했다.
어쩔 수 없이 탓하는 말투가 나왔다.
“형, 그게··· 우린 반대쪽으로 도망가려고 했는데, 얘가 흥분해서 이쪽으로 오는 바람에.”
‘칭찬할 게 아니었군.’
한건우가 드래곤을 쏘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파지직- 푸르르!
드래곤이 뇌전이 섞인 콧김을 뿜어냈다.
자신을 탓하는 분위기를 눈치챈 것 같았다.
“설아야, 그리핀은 아공간에 들여보내.”
“아, 알겠어요.”
그리핀은 비좁은 아공간에 잘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개를 다친 상태이니,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설아가 낑낑대며 그리핀을 머리부터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문득 한건우는 서늘한 생각이 스쳤다.
‘태일제··· 우리 길드원들이 여기 있는 걸 알면서 장벽을 쳤나?’
물론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건우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한건우가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들은 여기서 고립되었을 것이다.
목숨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한건우는 찝찝한 마음을 숨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많은 구울들이 스멀스멀 걸어오고 있었다.
햇볕에 약해진 상태라서 걸음거리는 훨씬 느렸지만, 무한한 식욕은 여전했다.
불에 탄 동족의 시체를 넘어서, 한건우와 일행들을 향해 오고 있었다.
쿠웅- 쿠웅!
장벽 쪽에서부터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거인화한 박이경이 엄청난 속도로 뛰어오고 있었다.
휘익-!
박이경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구울들이 추풍낙엽처럼 분해되어 날아갔다.
“수호야!”
“형!”
박이경이 만든 길 뒤로, 임진호와 차은비가 달려왔다.
거인화한 박이경 뒤에 있으니, 몸집이 큰 임진호도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였다.
퍼억- 콰직!
박이경의 다리 사이로 지나친 구울들은, 임진호의 메이스가 부숴버렸다.
“이야··· 형님, 이게 그··· 드래곤입니까?”
박이경은 보라색 드래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아레스 길드의 어린 드래곤이 못내 신기한 모양이었다.
한건우는 신이 난 박이경에게 말했다.
“박이경, 먼저 구울부터 다 치우고, 장벽 안에서 만나자.”
터억!
한건우가 드래곤의 등 위로 올라탔다.
키에에엑!
드래곤이 여섯 개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