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크로노스의 미궁 (9) - 함구
한건우가 툭 손을 털고 일어났다.
목줄기를 누르던 압력이 사라지자, 김도경의 몸이 꿈틀 했다.
“...커헉!”
김도경이 밭은 숨을 토했다.
겨우 호흡만 돌아왔을 뿐, 아직 정신은 못 차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뒤집어져 흰자위가 보였고, 충혈된 흰자위가 붉었다.
한건우가 고개를 들었다.
“....”
사람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볼 만했다.
한건우와 김도경이 맞붙은 건 순식간이었다.
체감상으로 눈 깜짝할 사이 같았다.
실제로도 채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말릴 새가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경악하며 지켜보기만 했다.
타인이 개입하지 않은 둘만의 싸움.
그런데 금방 승부가 난 것이다.
누가 봐도 이견이 없을 만큼 확실하게.
“형님, 역시 형님이십니다!”
쿠웅- 쿠웅!
박이경이 뛰어왔다.
그는 엄청나게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안 그래도 거인화 때문에 큼직한 입이 찢어질 듯이 웃고 있었다.
어금니까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한건우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체포될 뻔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좋아한 건 아니었다.
“하하하! 잘난 척 하더니 꼴 좋다.”
박이경은 기절한 김도경을 내려다보며 한껏 비웃었다.
정말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그 오만한 김도경이 만신창이가 되어 땅바닥에 누워 있다니.
완벽하게 다려져 있던 제복은 군데군데 타고 찢어져 누더기가 되었고, 광이 나던 구두는 흙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하, 한건우 씨···.”
차은비는 기쁨 반, 걱정이 반인 묘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기절한 김도경과 한건우를 연신 번갈아 쳐다보았다.
스스로의 행동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한건우가 차은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깐 고마웠습니다.”
“아녜요, 별 도움도 안 된걸요···.”
사실 차은비의 말이 맞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차은비가 노선을 확실히 정했다는 것이었다.
한건우에게도 뜻밖의 일이었다.
‘김도경 선배님은··· 날 용서하지 않을 거야.’
차은비는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팔짱을 끼었다.
김도경은 자기가 감히 상대할 존재가 아니라 생각했다.
김도경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정부를 움직이는 특수안보부의 서울지부장이었다.
각성자 사관학교의 까마득한 선배였고, 심지어 겸임교수로 그녀를 가르치기도 했다.
‘아니··· 이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어.’
이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예상했던 걸까.
그녀는 태일제의 복귀 명령에 대답을 안 하고 미루고 있었다.
‘일성에는 이제 못 돌아가. 아니, 안 돌아가.’
최고의 연봉, 우수한 복지.
그리고 대한민국 1위 길드의 이름 값.
그동안 차은비는 일성 길드를 최선의 직장으로 여겼다.
서로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니, 얼마나 좋은 계약 관계냐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한건우의 신생 길드에 오게 되었다.
물건 빌려주듯이 교환을 당해서, 처음에는 불만스러웠다.
1년의 파견 기간이 언제 끝나나, 남은 날짜만 셌다.
언제부터일까. 그녀는 날짜를 세지 않기 시작했다.
늘 교과서 같은 정석 루트만 밟고 살아온 차은비였다.
그런 그녀에게 한건우의 선택은 항상 파격이었다.
뻔하고 안전한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
검증되지 않은 길이었다.
그러나 가보고 싶었다.
차은비의 불안이 잦아들었다.
그녀의 떨림이 기분 좋은 설렘으로 바뀌었다.
“마스터, 몸 상태 봐드릴게요.”
“...!”
차은비가 한건우의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그녀가 한건우를 ‘마스터’라고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에.”
원유선은 사색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지 못했다.
김도경은 대한민국 랭킹 2위 각성자였다.
여러 가지 지표가 들어가지만, 결국 개인의 전투력 순위를 보여주는 게 랭킹이었다.
게다가 김도경은 전투 계열 중에서도 속도와 힘을 고루 갖췄다.
상대방의 속성이나 환경에 크게 영향받지도 않았다.
무기가 없는 맨손으로도 강했다.
사기급이라는 소리였다.
‘김도경 지부장을··· 한건우가 1대1로 이겼다고?’
기막힌 행운이 따랐다거나, 상성에서 유리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백 번 양보해도 그 둘은 거의 대등했다.
새하얗게 질린 원유선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가 멀리 떨어진 균열 입구를 흘깃 바라보았다.
“김도경 지부장님!”
권석진과 이능력 특수전단 분대원들이 황급히 멀리서 뛰어왔다.
그들은 한건우의 눈치를 보면서 쓰러진 김도경을 챙겼다.
“어서 깨워드려!”
보조 계열 대원이 치유 특성을 썼다.
김도경의 상처가 아물었고, 흐린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
한건우는 권석진 분대장과 눈이 마주쳤다.
눈인사만 했을 뿐, 당연히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한건우는 이능력 특수전단의 대원들, 그리고 조용히 사라지려던 원유선을 훑어보았다.
“!”
그들이 움찔했다.
한건우가 그들까지 공격할까봐 두려운 것 같았다.
한건우가 발록의 화염 채찍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함구하시죠.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겁니다.”
“?”
경계 태세를 세우던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이 멈칫했다.
“지금은 전시상황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아닙니까? 각성자 한 명이라도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건우가 논리를 제시했다.
한건우는 권석진 분대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지부장님이 깨어나면 전해 주시죠. 앞으로도 균열 공략을 위한 작전은 따르겠지만, 이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전력을 줄이는 건 반대라고.”
“...알겠습니다.”
권석진 분대장이 대답했다.
그를 따르는 대원들의 표정이 변했다.
‘한건우 플레이어가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그게 아닌가?’
혼란을 겪는 기색이었다.
한건우가 미소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이 균열은 정상적으로 공략되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만주 사태가 진정되기 전에 이런 일이 또 있으면, 그때는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권석진 분대장은 말없이 고개를 까딱했다.
대원들이 김도경 지부장을 들것으로 옮겼다.
한건우는 원유선에게도 눈짓을 했다.
다른 소리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원유선은 받아들일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한건우가 쥐고 있던 <크로노스의 왕홀>에 옮겨갔다.
‘아까 저걸로 뭘 한 것 같은데?’
원유선은 곧 깨달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알겠어. 시간 능력을 얻은 거야.’
왜 이제 알았을까.
이곳은 <크로노스의 미궁> 균열이었다.
균열 보상으로 시간에 관한 스킬이나 아이템이 나와도 놀랍지 않았다.
‘저게 그런 아이템인 줄 알았다면···.’
원유선은 속이 쓰렸다.
마지막까지 다 와서 크로노스의 왕홀은 정작 한건우에게 빼앗겼다.
자신이 선택한 거였으니 할 말 없었다.
권석진과 그 대원들이 김도경 지부장을 이송해서 나가는 동안.
한건우도 S급 균열의 정산을 확인하고 있었다.
균열이 공략되고 시간의 흐름은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급할 것은 없었다.
[S급 균열 - 크로노스의 미궁, 공략 완료]
- 잔여 시간 : 3일 23시간 31분
- 공략 시간 : 4일 4시간 27분
- <삶과 죽음의 계단> 완주 성공. 믿어지지 않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간만의 업적 달성 보상.
이번에는 보상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행운 특성 진화] OR [행운 스킬 획득]
‘이건 뭐···.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하긴 대다수의 각성자는 행운 계열 특성이 없었다.
특성이 없는데 진화를 고르면 그냥 보상을 날리는 꼴이었다.
대부분은 일회성이거나 단순한 스킬 획득 쪽을 고르겠지.
하지만 한건우는 달랐다.
[행운 특성 진화]
보상을 선택했다.
[특성 진화 : 포르투나의 동전 -> 포르투나의 주사위]
- 일반 ->희귀급
‘주사위?’
특성이 진화한다고 해서 이름까지 바뀔 줄은 몰랐다.
한건우는 시험삼아 특성을 발동해 봤다.
[특성 발동 : 포르투나의 주사위(희귀)]
-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주사위를 던진다.
화아아-
행운의 여신이 미소짓는 게 좀더 선명하게 보였다.
티그르르···.
상아색 주사위가 허공에서 돌아가며 영롱한 소리를 냈다.
‘아하. 선택지가 많아졌구나.’
포르투나의 동전은 앞면과 뒷면, 2개의 선택지뿐이었다.
한 순간에 MP를 많이 소모해서 연속으로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삶과 죽음의 계단>처럼 선택지가 2개인 경우에는 유용했지만, 더 많은 갈림길이 있으면 소용 없었다.
이제 최대 6개로 나뉘는 갈림길에서도 행운이 따르는 길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아까 보았듯이, 성능은 확실했다.
만족한 한건우는 별 기대 없이 경험치 알림창을 켰다.
‘어? 경험치는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균열에서 나타난 마수는 미노타우르스였다.
한건우는 미노타우르스를 잡는 데 기여도가 거의 없었다.
경험치는 기대도 안 하고 있었다.
[미궁의 수수께끼를 풀었습니다! 경험치 +360]
‘오, 좋아.’
모든 수수께끼가 그렇듯, 정답을 알고 보면 쉬운 문제였건만.
S급 균열이라 그런지 경험치가 후했다.
‘김도경이 쓸데없이 미궁 단계를 높여 놓지만 않았어도.’
한건우가 혀를 찼다.
그랬다면 훨씬 더 쉽고 빠르게 균열을 깼을텐데.
‘뭐, 나쁘지 않았지. 희생도 없었고, 김도경의 힘도 빼 놨으니.’
원래 이 균열은 끔찍한 희생을 통해 공략되었다.
미궁의 수수께끼는 겨우 풀었지만, <삶과 죽음의 계단>이 문제였다.
원유선은 다른 균열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가 있었어도 결정적인 도움은 안 되었을 것이다.
손쉬운 대안이 있었으니까.
바로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균열 공략을 주도한 특수안보부의 판단이었다.
토벌대로 들어온 많은 인원 중에서, 희생양이 선택되었다.
그들은 약한 각성자들을 먼저 계단에 올려보냈다.
그런 식으로 안전한 루트를 바로 알아냈다.
‘그리고 이 왕홀도 원래는 특수안보부의 손에 들어갔지.’
한건우는 자기 손에 들린 <크로노스의 왕홀>을 내려다보았다.
[크로노스의 왕홀(신화급)]
- 왕홀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 모든 것의 시간이 1초간 멈춘다.
1초.
각성자의 전투에서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다.
생사를 가르고, 승자와 패자를 뒤바꿀 수도 있었다.
“....”
귀한 아이템은 이미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신화급, 마창 게이볼그.
전설급, 발록의 화염 채찍.
아이템 제작자 조승재가 만든 총기인 데스 트루퍼.
드래곤의 시체로 만든 지상 최강의 방어구, 아머드 드래곤.
거기다 지난 균열에서 얻은 서리거인의 왕관과 뿔피리.
아레스 길드원들의 아이템만 해도 엄청났다.
임수호에게 준 전륜성왕의 구슬.
임진호에게 준 아다만티움 방패까지.
<크로노스의 왕홀>은 무기나 방어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무구보다 강할 수도 있었다.
시간을 다루는 특성이나 아이템은 대부분 신화급.
한건우는 ‘신화급’이라는 단어의 가치를 체감했다.
‘신화를 쓸 수 있는 아이템이라는 뜻이지.’
원유선의 <타임 리와인드> 특성보다도 한 수 위가 아닐까.
원유선의 특성은 주변 공간에만 걸리지만, <크로노스의 왕홀>은 온 세상에 적용되었다.
“누가 또 들어와요.”
차은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스스슥···.
그녀가 가리킨 위쪽을 보니, 균열의 입구가 열리고 있었다.
“뭐야!”
박이경이 외쳤다.
아직 나가지 않은 이능력 특수전단의 대원들도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이제 들어올 사람이 없는데?’
한건우는 권석진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확인했다.
파지지직···.
한건우의 손에 푸른 전격이 맺혔다.
쿠웅-!
균열의 침입자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착지했다.
두툼한 체격에 무거운 방어구를 입은 남자였다.
고개를 든 남자가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건우 형!”
“...진호?”
임진호였다.
막사에서 대기하고 있을 진호가 갑자기 왜 이곳에 왔을까.
임진호는 숨을 몰아쉬느라 제대로 말을 못했다.
그는 핏물을 양동이로 뒤집어쓴 것처럼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한건우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듯했다.
“나가자. 가면서 들을게.”
한건우는 아공간 무기집에서 마창 게이볼그를 꺼냈다.
그가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