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크로노스의 미궁 (8) - 무한의 검
‘뻔하군.’
한건우는 속으로 김도경을 비웃었다.
그가 한건우에게 말을 거는 척 페이크를 걸 때부터, 한건우는 그의 발을 지켜보고 있었다.
- 상대방의 눈과 발, 그 두 가지만 봐라.
예전부터 기억하고 있던 권석진 대장의 가르침이었다.
- 눈을 보면 감정이 보이고, 발을 보면 다음 행동을 알 수 있다.
김도경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적대감이 역력했다.
그리고 발의 위치를 보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순간 가속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광휘의 성기사> 김도경.
그 별명만 들으면 고고하고 성스러운 인물처럼 들렸다.
정작 김도경은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나는 인정할 수 있었다.
빛처럼 빠르다는 것이었다.
쉬익-!
김도경이 섬광처럼 닥쳐왔다.
팟!
한건우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바로 <그림자 맹시>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비현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점멸하듯 이동했다.
“!”
츠즈즈···.
김도경이 멈추었다.
그의 손에서 비수 같은 빛이 거두어졌다.
김도경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내 기습을 피했어?’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설마 원유선처럼 시간을 돌리는 특성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었다.
시간을 다루는 특성은 전 세계적으로도 귀하니까.
스응···.
김도경이 광선검을 꺼냈다.
한건우에게 겨누지 않고 사선 방향으로 들고 섰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한건우는 김도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방금 김도경이 한 공격은 순전히 제압용이었다.
‘못 피했어도 목숨에 지장은 없었을 거야.’
김도경은 자신을 기습했지만, 죽이려 한 건 아니었다.
성공만 했다면 제거하기 좋은 상황인데도.
‘왜지?’
자신이 죽었다면, 김도경은 편했을 것이다.
비교적 손쉽게 박이경을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원유선은 어차피 특수안보부 측 인물이니 상관 없다.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차은비의 입만 막으면 되는 상황인 것이다.
한건우는 김도경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결론을 냈다.
‘김도경은 나를 죽일지 말지 스스로 판단할 권한이 없는 거야.’
S급 각성자는 한 국가를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S급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김도경이 최종 결정할 것 같지는 않았다.
김도경은 특수안보부 서울지부장이었다.
실세 중의 실세인 요직이지만, 특수안보부의 총수는 아니었다.
‘특수안보부의 총수는 추측만 분분할 뿐, 미래에도 그 정체가 밝혀진 적이 없지.’
한건우는 마창 게이볼그를 무기집에 집어넣었다.
그가 꺼낸 무기는 발록의 화염 채찍이었다.
아다만티움 철편으로 강화한 채찍.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가닥가닥이 꿈틀거렸다.
화르륵···.
갈라진 채찍에 불길이 타올랐다.
“!”
김도경은 한건우의 의도를 알아챘다.
김도경의 가장 큰 장점은 속도였다.
발록의 화염 채찍은 빠르게 치고 빠지는 적에게 가장 위협적인 무기였다.
한건우가 입을 열었다.
“나도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
한건우의 어투가 완연히 반말로 바뀌었다.
자존심 강한 김도경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내 앞에서 박이경을 건드리지 마.”
스칭-
한건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광선검을 든 김도경이 쇄도했다.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쿠우웅-
김도경이 서 있던 자리, 단단한 돌바닥이 네모 모양으로 내려앉았다.
쿠웅- 쿠웅-!
연쇄적으로 <그래비티 필드>가 이어졌다.
그 위력은 대단했다.
보이지 않는 신의 주먹이 바닥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김도경은 한건우의 공격을 수월하게 피했다.
‘속도로는 날 따라잡을 수 없지.’
쉬익!
김도경이 다시 바닥을 차며 가속했다.
그가 한건우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차르르륵!
“윽.”
발록의 화염 채찍이 한건우의 등 뒤로 휘어졌다.
살아 움직이는 화염의 덩굴이 한건우를 보호하는 것 같았다.
김도경은 한건우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아다만티움 철편에 상처만 입었다.
김도경의 얼굴에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각진 턱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닿기도 전.
김도경의 몸이 다시 번쩍, 빛을 내며 섬광처럼 변했다.
그에 맞서 한건우도 어둠 속으로 점멸했다.
치지지징-!
찰나의 순간, 3합이 넘는 충돌이 있었다.
“크윽···.”
김도경은 이를 뿌득 갈았다.
그의 제복에 선혈이 배어나왔다.
감질이 났다.
‘저 채찍 탓이야.’
가까이 파고들어가도 사각지대가 없었다.
김도경은 뒤로 훌쩍 뛰어서 한건우와 거리를 벌렸다.
속도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면 원거리 공격을 하는 게 나았다.
‘한건우를 죽이지만 않으면 돼. 차은비가 있으니까, 목숨만 붙여 놓으면 살릴 수 있어.’
죽이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허가를 구하지 못했으니까.
스응···.
김도경의 광선검에서 빛의 검날이 사라졌다.
그가 손잡이만 남은 검을 수직으로 치켜들었다.
파아앗!
엄청난 밝기의 빛기둥이 솟구쳤다.
<빛의 군주> 특성을 응축시킨 파괴 광선이었다.
이제까지 보여준 광선검은 장난 같았다.
“아···!”
그들의 전투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차은비가 비명을 질렀다.
김도경의 파괴 광선이 지나치게 강렬했다.
눈이 부시다 못해 불타는 것 같았다.
“형님!”
박이경이 불쑥 전투에 끼어들었다.
쿠웅- 쿵-
거인화한 박이경이 굉음을 내며 달려왔다.
그는 자신이 공격당할 때만큼, 아니 그보다 더 격노했다.
박이경을 맨주먹으로 때려눕힌 사람은 한건우뿐이었다.
그는 박이경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자였다.
그런 한건우가 자신을 대신해 김도경과 싸우고 있었다.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박이경, 가만있어!”
“?”
박이경이 우뚝, 제자리에 멈춰섰다.
한건우는 화염의 날개를 펼쳐 위로 솟구쳤다
파괴 광선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김도경이라면 누가 여파를 맞아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마저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놈이니까.
슈우웅-
김도경이 파괴 광선이 깃든 검을 수직으로 내려쳤다.
한건우의 오른팔을 노린 것이었다.
“한건우 씨!”
차은비의 손에서 흰 빛무리가 뻗어나왔다.
그녀가 <신의 가호>를 펼쳐 한건우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차은비는 김도경의 능력을 너무 몰랐다.
원소 계열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빛 속성이었다.
빛의 파동과 입자를 이용한 김도경의 공격은, 보호 특성으로는 방어되지 않았다.
슈욱-
김도경의 파괴 광선은 <신의 가호>를 간단히 통과했다.
차은비의 눈이 커졌다.
한건우가 정신을 집중해 파괴 광선의 궤적을 노려보았다.
[특성 중첩 : 암흑의 별]
[특성 중첩 : 그래비티 필드]
한건우의 눈 앞, 허공에 새카만 구체가 생겨났다.
특성 중첩으로 만든 흑점이었다.
쉬이이익!
김도경의 파괴 광선이 나선으로 휘어졌다.
흑점이 블랙홀처럼 파괴 광선을 집어삼켰다.
심해의 아귀가 물고기를 삼키는 듯했다.
우우웅-
한건우가 만든 흑점은 김도경의 파괴 광선을 탐욕스럽게 흡수하고, 점점 크기를 키웠다.
“!”
김도경은 자신의 빛 에너지가 흑점을 키우고 있다는 걸 깨닫고, 급히 힘을 거두었다.
한건우가 특성 중첩을 없앴다.
터엉!
‘반동이 온다!’
김도경은 이를 악물고 반동을 피했다.
“오.”
한건우가 감탄했다.
김도경의 신속한 판단이 인상적이었다.
“서울지부장 자리, 운으로 따낸 건 아니군.”
“하···.”
김도경은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차은비를 노려보았다.
‘이건 또 뭐야?’
김도경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아까 차은비가 자신을 가로막고 나섰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차은비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관학교 후배이자, 태일제의 부하였다.
당연히 특수안보부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그래야 했다.
‘언제부터냐?’
차은비는 변절했다.
감히 특수안보부의 서울지부장인 김도경 앞에서 반기를 들었다.
용서받지 못할 행동임에 분명했다.
‘S급 힐러만 아니었으면··· 바로 제거했을 텐데.’
김도경은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다시 한건우를 보았다.
‘어?’
그의 시야에서 한건우가 사라졌다.
김도경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
한건우는 김도경의 등 뒤에 있었다.
<그림자 맹시>로 순식간에 김도경의 그림자로 이동한 것이었다.
김도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며 굴렀다.
차아악!
“크윽···.”
김도경의 등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등이 온통 채찍으로 찢긴 것이었다.
그가 자세를 갈무리하며 알약 형태의 포션을 깨물었다.
간단한 진통제와 치료 효과가 있는 포션이었다.
고통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한건우··· 어떻게 이렇게 빠르지?’
다른 것도 아닌 속도에 밀리다니.
김도경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한건우도 김도경을 보며 기가 찼다.
김도경은 잡히지 않는 미꾸라지처럼 스르륵 빠져나갔다.
‘왜 이렇게 감이 좋아?’
근거리와 원거리를 불문하고 강력한 공격력.
독보적인 민첩성.
그리고 실전 감각에서 나온 회피와 방어 능력까지.
‘국내 랭킹 2위답군.’
김도경은 거의 육각형에 가까운 균형잡힌 각성자 같았다.
한건우는 내심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단점이 있다면, 자의식이 너무 강하다는 것.’
치이익···.
김도경의 상처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
화염에 달구어진 아다만티움 철편 때문이었다.
어느새 김도경의 온몸은 난도질이 된 채였다.
목덜미에도 상처가 났는지, 끈적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며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쪽만 미동해도 폭발할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
분노한 김도경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결국 냉정을 잃었다.
슈우우우···.
김도경의 몸에서 수백 갈래의 광선이 뻗어 나왔다.
각각의 광선은 휘어지며 검 모양을 이루었다.
슈우웅-!
수백 개의 광선검이 일점을 향해 쏘아졌다.
그 가운데 한건우가 서 있었다.
“안돼!”
차은비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공격은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을 피하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사방의 모든 각도에서 공격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의 검!’
원유선은 감탄하고 있었다.
김도경이 참다 못해 최강의 기술을 꺼낸 모양이었다.
‘저건 <타임 리와인드>가 아니면 절대 못 막아.’
제아무리 한건우가 날고 기어도, 이제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유선이 그렇게 확신할 때였다.
한건우는 여전히 <크로노스의 왕홀>을 쥐고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대로 균열의 보상 아이템으로 주어졌다.
크로노스의 왕홀에 어떤 특전이 있는지.
한건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한건우는 크로노스의 왕홀에 어마어마한 마력을 불어넣었다.
왕홀이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크로노스의 왕홀(신화급)]
- 왕홀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 모든 것의 시간이 1초간 멈춘다.
똑-
수백 개의 ‘무한의 검’이 그대로 멈추었다.
한건우는 그 사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딱-
한건우가 멈춰 있는 김도경의 목을 손아귀에 쥐었다.
슈우-
터엉-!
쿠과광!
무한의 검이 서로 부딪치며 폭발했다.
“끄윽···.”
김도경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눈만 껌뻑였다.
그가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한건우가 그의 목을 움켜쥐고 바닥에 처박은 것이다.
한건우는 <서리거인의 왕관>의 특전으로 근력이 강해진 상태였다.
이미 제압된 김도경을 찍어누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끄··· 끄어억···.”
한건우가 김도경의 목을 부술 듯이 세게 눌렀다.
김도경은 눈을 뒤집고 정신을 놓았다.
스스슥···.
한건우의 손바닥에서 마력이 응축되었다.
작고 투명한 뱀 같은 것이 생겨났다.
작은 뱀은 기절한 김도경의 상처로 파고들었다.
김도경의 혈관을 타고 몸 속으로 스르륵 스며들었다.
[특성 발동 : 주시자의 뱀]
-대상자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한건우가 김도경의 목을 짓누르던 손에 힘을 뺐다.
여기 있는 아무도 <주시자의 뱀>을 넣은 걸 눈치채지 못했다.
김도경 자신조차도 모를 것이다.
한건우가 특수안보부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이제부터 김도경이 도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