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크로노스의 미궁 (7) - 통수
균열에 새로 들어온 인원은 총 8명.
균열 입구의 개수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미로의 잔해에 능숙하게 몸을 숨기면서 포위망을 좁혀 왔다.
한건우는 파티원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역시 생각대로군.’
박이경과 차은비는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으로 얼굴이 굳어있었다.
반면 김도경과 원유선은 냉정해 보였다.
누가 관여한 일인지는 뻔했다.
타다다··· 철컥!
우우웅···.
침입자들이 희미한 기척을 냈다.
‘익숙한 소리.’
한건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반대편에서 들을 줄이야.
“이놈들이 감히.”
위협을 감지한 박이경이 분노했다.
타앗-!
박이경이 <신체 강화>로 온몸을 강화시키고 뛰어올랐다.
박이경은 투포환처럼 훌쩍 날아갔다.
침입자들을 두 주먹으로 박살내려는 것이었다.
스치잉- 터엉!
“크윽!”
박이경은 공중에서 방해를 받았다.
땅에 떨어진 그가 옆으로 굴렀다.
큰 몸집에 안 어울리게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죠.”
특수안보부의 김도경 지부장이 광선검을 꺼내서 쓰러진 박이경을 겨누고 있었다.
“뭐? 무슨 개소리야.”
“...섣불리 움직이지 마시라는 겁니다.”
박이경이 그의 명령을 들을 리 없었다.
치잉- 척!
박이경은 너클로 광선검을 쳐내며 일어나려 했다가 저지당했다.
김도경이 광선검으로 박이경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박이경이 죽일 듯한 눈빛으로 김도경을 올려다보았다.
“어이, 특수부 양반.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포위망 속에 있던 침입자들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복장이 똑같았다.
위장 무늬가 들어간 회색 군복에, 얼굴은 복면과 헬맷으로 가리고 있었다.
“...뭐야, 군인?”
당황한 차은비가 중얼거렸다.
겉보기에는 그냥 균열 밖에 경비를 서는 군대 복장이었다.
만주 땅에 출동한 군부대는 모두 각성자로 이뤄져 있었다.
그래봤자 대부분 중하급이었다.
군이나 경찰 구조대에는 상급 각성자가 거의 없었으니까.
군인들이 S급 각성자에게 총구를 들이밀다니.
차은비는 기가 찰 정도였다.
“아니.”
한건우가 김도경 지부장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저건 이능력 특수전단의 1개 분대입니다.”
“!”
김도경은 흠칫 놀랐다.
일부러 평범한 군인 복장을 입도록 하고 얼굴도 가리라고 했는데.
한건우가 바로 알아챌 줄은 몰랐다.
“이능력 특수전단? 특수안보부의 사냥개 놈들이 무슨 일로 왔어.”
박이경이 씹어 뱉듯이 말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버티고 있었다.
‘김도경 지부장··· 힘이 이 정도였나?’
박이경은 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빛 계열의 특성을 잘 쓰는 건 알았지만, 완력까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김도경 지부장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파스의 길드 마스터, 박이경 씨. 당신을 이적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엉?”
박이경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적 혐의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서, 선배님. 뭐예요?”
차은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적 혐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국가 전복 기도 쪽으로 연결되면, 각성자든 민간인이든 즉결 처분도 가능했다.
“박이경 씨가 이적 혐의가 있다니. 무슨 소리죠?”
원유선도 모르는 척 물었다.
“기밀사항이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박이경 씨는 특수안보부에서 조사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먼저 균열을 나가 주시죠.”
말로는 조사한다고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박이경을 남겨놓고 나간다면 여기서 즉결 심판을 할 기세였다.
절그럭, 절그럭···.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이 뭔가를 들고 다가왔다.
한 가지는 족쇄와 수갑, 재갈이 연결된 구속장치였다.
그 정체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각성자를 제압하려면 저게 필수적이니까.
‘마력 저감장치, 그리고···.’
또다른 아이템을 보고, 한건우는 신음을 뱉을 뻔했다.
‘아다만티움 사슬.’
검은색 아다만티움 사슬이었다.
회귀 전 천명환이 한건우를 죽이려 했을 때 사용했던 물건이었다.
“하, 말도 안 되는 혐의를 지어내서 나를 체포하겠다고?”
어이가 없어진 박이경이 코웃음을 쳤다.
“하고 싶으면 해 봐.”
박이경은 참기 어려운 분노가 솟아났다.
‘김도경 이 새끼··· 진작 죽였어야 했어.’
물론 특수안보부의 지부장 따위를 믿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김도경이 하는 짓이 몹시 괘씸했다.
균열을 깨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균열이 해결되자마자 돌변했다.
파아앗!
박이경은 거인화로 몸을 폭발적으로 키웠다.
“크아아아!”
박이경이 사슬의 포위망을 훌쩍 벗어나 짐승처럼 포효했다.
조금도 갈무리하지 않은 S급 전투 계열 각성자의 기운이 뻗어나왔다.
그 기운만으로 온 균열을 압도할 만큼 흉포했다.
그때 이능력 특수전단의 대원 여럿이 일제히 같은 행동을 했다.
전투복 앞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것이다.
저 안에는 작은 아공간 주머니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한건우는 잘 알고 있었다.
‘저거군.’
한건우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면서 이능력 특수전단을 이끄는 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권석진 분대장.’
권석진도 한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건우는 그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이번 균열에서 알파스의 박이경을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어떻게요?’
한건우를 대하는 권석진 분대장의 태도가 변했다.
경어를 쓰며 깍듯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 분대는 일반 육군과 같은 복장을 입을 겁니다.’
‘균열 외곽 경비를 맡은 팀으로 위장하는 거군요?’
‘맞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다가 공략 메시지가 뜨는 순간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균열이 다 공략되고 나서 말이죠.’
‘예.’
그건 가장 효율적인 기습 방법이었다.
균열이 공략되고 나면 이동이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마수와 싸우거나 트랩에 당할 일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균열을 공략하느라 심신이 지쳐 있으니, 싸워서 이길 확률이 높았다.
요즘은 균열 입구에 구조대나 군인이 경비를 서고, 정부에서 출입자를 기록했다.
그래서 그런 행동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출입자를 관리하는 정부에서 직접 하면 된다.
한건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김도경 지부장과 이능력 특수전단 1개 분대가 나서도··· 박이경을 제압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을 텐데요.’
김도경과 박이경.
분명히 김도경의 랭킹이 높지만, 실전에는 항상 변수가 있기 마련.
S급 각성자를 제압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권석진과 분대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쪽수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김도경답지 않게 만용을 부린 건 아닌가 싶었다.
권석진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방법은 이겁니다.’
권석진이 전투복 주머니에서 알약 통을 꺼내 보여주었다.
한건우의 눈빛이 변했다.
‘이걸 먹으라고 줬다고요? 김도경이?’
‘예, 새로 개발한 알약 형태의 강화 포션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A급 각성자이니 먹을 필요가 없다고 했고, 다른 부대원들은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건우는 김도경 지부장에게 분노가 치솟았다.
‘절대로··· 이 약을 부하들에게 먹이지 마십시오.’
한건우는 이 약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특수안보부의 연구소에서 빼온 하드디스크에서 연구자료를 보았다.
부작용이 많던 마기 증폭 시술과 유사했다.
잠깐 강해질지 몰라도, 나중에 어떤 문제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반드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
이 약의 성분은 신종 마약인 <레드 스타>의 성분과 같으니까.
대마도에서 완전히 뿌리뽑은 줄 알았는데.
이미 특수안보부는 이 성분을 암암리에 입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
[특성 발동 : 염동력]
슈욱-
“엇!”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들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알약이 진공청소기에 빨리듯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
그 알약은 이미 한건우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위험한 약은 먹지 맙시다.”
파스슥!
한건우가 손아귀에 힘을 줘서 일곱 개의 알약을 부숴버렸다.
그의 손에서 붉은 가루가 흩날렸다.
[특성 발동 : 부패의 시간]
프스스스···.
허공에 흩어진 붉은 가루가 회백색이 되어 스러졌다.
‘이걸··· 권석진 분대장만 빼고 다 먹이려고 했다고?’
권석진 분대장 빼고는 다 일회용품으로 본다는 소리다.
권석진 분대장이라고 특별 대접을 해준 건 아닐 거다.
기껏해야 몇 번 더 쓸모가 남은 정도겠지.
‘그래, 이래야 특수안보부지.’
한건우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능력 특수전단 분대원들은 권석진의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그때 한건우가 맨손을 들었다.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그으으-
“크윽···.”
철컥! 차르르르···.
중력이 가중되자, 무거운 아다만티움 사슬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다음은 마력 저감장치를 놓쳤다.
드르르르···.
아다만티움 사슬과 마력 저감장치가 한건우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염동력과 중력 특성을 동시에...?’
보조 계열의 대원이 경악하면서 재빨리 보호막을 둘러쳤다.
찌지직-!
가중되는 중력에 보호막이 찢겼다.
그 사이로 대원들은 겨우 몸을 피했다.
김도경이 전면으로 나섰다.
그가 광선검을 들고 한건우를 노려보았다.
“한건우 플레이어. 국가의 법 집행을 방해하시는 겁니까? 이건 항명입니다.”
“항명? 그쪽은 내게 명령할 권리가 없는데.”
“....”
한건우가 강하게 나오자, 김도경은 잠시 침묵했다.
“김도경 선··· 아니 지부장님. 이런 식의 집행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뭐?”
뜻밖에 차은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방금까지 균열 공략은 같이 해놓고···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이건 뒤통수 치는 거잖아요?”
김도경 지부장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차은비. 미쳤나?”
타아앗-
스치잉-!
거인화 상태의 박이경이 주먹을 휘두르며 김도경을 덮쳤다.
김도경의 광선검과 박이경의 너클이 부딪쳤다.
콰악-!
김도경의 눈이 원유선을 향했다.
원유선에게는 미리 귀띔을 했다.
이번 균열에서 박이경을 잡을 테니 협조해달라고.
원유선도 웬만하면 그러려고 했다.
상대가 박이경 하나라면 기꺼이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불리해진 것 같았다.
원유선은 어깨를 으쓱하고 뒤로 빠졌다.
“윽···.”
김도경이 분노의 신음을 삼켰다.
‘왜 이렇게 되었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이능력 특수전단이 증폭 약을 먹지 못했다.
그것만 제대로 되었어도, 박이경을 바로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파티원들의 반응도 예상 밖이었다.
물론 한건우라면 박이경의 편을 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은비가 이럴 줄은 몰랐다.
‘박이경이 어떻게 되든 말든 가장 무관심할 줄 알았는데.’
그녀가 감히 자신을 가로막고 나설 줄은 몰랐다.
차은비를 잘못 파악했나 싶었다.
‘이 균열을 나가면 태일제에게 복귀할 거 아니었어?’
끽해야 중립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 둘이 박이경을 보호하자, 원유선의 태도도 모호해졌다.
‘저 여우 같은 년이···.’
원유선은 특수안보부와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이제껏 그녀의 뒤를 봐준 게 얼만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게 원망스러웠다.
파바밧-!
김도경은 빠르게 물러나서 주위를 살폈다.
아직 대원들 중 사상자는 없었다.
‘칠까?’
김도경은 전면으로 맞붙을 때의 승산을 계산했다.
‘불리하다.’
김도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건우가 말했다.
“김도경 지부장님. 지금은 전시상황입니다. 한 명의 힘이라도 아쉬운 상황이죠. 혐의가 있더라도 사태가 다 끝나고 조사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안 그렇습니까?”
“....”
스으으···.
김도경이 광선검의 날을 집어넣고, 천천히 한건우에게 다가왔다.
“물론 집행 일정은 보류할 수도 있습니다.”
“....”
“허나 박이경 플레이어가 도주라도 한다면. 당신이 책임질 수 있습니까?”
“?”
파앗-!
김도경의 말은 페이크였다.
그가 섬광 같은 속도로 한건우에게 접근했다.
김도경의 손끝에서 날카로운 광선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