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크로노스의 미궁 (6) - 행운의 여신
“정확히는 9번입니다. 첫 번째 계단은 흰색으로 가면 됩니다.”
“그걸 어떻게···.”
“미노타우르스요.”
“아하.”
미노타우르스가 정신 조종을 당해서 흰색 타일에 올라섰을 때, 분명 별 일이 없었다.
중심을 잃고 추락해서 죽은 것이었다.
반반의 확률로 고르는 9회의 선택지였다.
오답을 골라도 6회는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성공할 확률이 꽤 늘어난다.
‘해볼 만하지 않나? <죽음> 계단 트랩이 뭔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분위기였다.
한건우는 <죽음> 계단의 트랩을 알고 있었다.
‘보호를 무력화하는 마력 폭발이지.’
다른 계단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딱 그 계단에만 작동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김도경은 팔짱을 끼고 섰다.
그는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바로 성공할 수도 있지. 하지만 마지막에 한두 계단이 남으면 어떻게 할 거지?’
그 순간이 되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김도경은 한건우를 눈을 가늘게 뜨고 한건우를 노려봤다.
“시간이 부족하니, 가보는 데까진 가보죠.”
원유선이 나섰다.
‘첫 번째 계단, 흰색 타일.’
휘익- 타앗.
원유선은 도포 자락 같은 긴 옷을 휘날리며 첫 번째 계단으로 올라갔다.
한건우가 말한 대로였다.
미노타우르스가 밟았던 타일은 안전했다.
두 번째부터는 선택이었다.
원유선이 조심스레 다음 계단 위에 올라섰다.
이번에도 흰색 타일을 골랐다.
“!”
행운이었다.
2분의 1의 확률에서, 운 좋게 맞는 선택을 한 것이다.
“휴.”
긴장하던 차은비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신의 가호>를 끌어올리고 준비 중이었다.
한 가지 불길한 생각이 났다.
‘잠깐, 아까 원유선의 정신 조종이 끊어지던데···. 저기로 넘어가면 버프도 안 들어가는 것 아니야?’
차은비는 벽의 틈으로 나가서 첫 번째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계단이라고 하지만, 전혀 안정적이지 않았다.
새카만 허공 위에 둥둥 떠 있는 타일이었으니까.
그 위에 차은비가 올라섰다.
스스슥···!
공간의 단차를 넘어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공간 창고로 들어갈 때와 비슷했다.
‘내 생각이 맞았어. 저쪽에서 원유선에게 힐이나 버프를 넣어도 안 들어갔을 거야.’
한건우는 차은비를 지켜보며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차은비를 데리고 계단 쪽으로 넘어가려고 하던 참이니까.
한건우가 그녀의 뒤에서 말했다.
“원유선 씨가 특성을 세 번 다 사용하면, 특성 버프를 넣어줘야 합니다.”
“네.”
차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익-
원유선은 이번에는 검은 타일 쪽을 택했다.
“어!”
파티원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또다시 행운이 따르는 것일까.
쿠르르-
“!”
그러나 아니었다.
쿠우우-쿠과과광!
“윽!”
원유선의 발밑에 있는 검은 타일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원유선은 급히 다른 타일로 이동하려 했다.
사방 공간이 어느새 투명한 벽으로 막혔다.
‘이런!’
원유선이 이를 악물었다.
“헉!”
차은비가 재빨리 <신의 가호>를 펼쳤다.
그러나 최강의 보호 특성도 먹히지 않았다.
차은비의 손에서 뻗어나간 마기가 원유선의 몸 근처에서 아지랑이처럼 흩어져 버렸다.
쿠와아-
원유선이 밟은 타일이 터졌다.
타일 위아래 수직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원유선의 몸이 폭발에 휩싸였다.
“헉!”
지켜보던 파티원들의 놀란 얼굴에 화염이 반사되었다.
차은비는 쓰러지듯 주저앉아 타일을 부여잡았다.
폭발의 여진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특성 발동 : 타임 리와인드]
똑딱, 똑딱
똑- 때-
톡.
원유선 주변의 시간이 멈추었다.
날아가던 타일의 파편도, 화염의 일렁임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트드드드···.
틱, 틱, 틱···.
거대한 기계장치를 거꾸로 돌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리고 모두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기적이었다.
무질서가 질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화염의 불꽃이 작게 줄어들어 사라졌다.
타일의 파편이 제자리로 돌아와 맞춰졌다.
원유선의 흰 옷자락이 다시 펄럭이면서 제 빛을 되찾았다.
그렇게 1초 전.
원유선은 다시 두 번째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주변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특성.
<타임 리와인드>의 위력이었다.
“우욱···.”
차은비가 엎드린 채로 구역질을 했다.
익숙지 않은 감각에 온몸이 후들거렸다.
휘이- 탓.
원유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고히 서 있었다.
그녀가 정답인 흰색 타일로 올라갔다.
*
원유선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운이 안 따랐다.
“마이너스의 손이야 뭐야?”
박이경이 답답해서 이죽거렸다.
원유선은 고르는 족족 폭발이 터지는 계단만 골랐으니까.
9개의 계단 중에서 원유선이 순수하게 맞춘 건 고작 3개.
다섯 번은 <타임 리와인드>를 써야 했다.
“더는 못 해.”
차은비가 특성 버프를 도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단 1개의 계단을 남겨두고, 원유선은 퍼져버렸다.
“한 번만 더 가 봐요! 여섯 번까지 가능하다고 했잖아요.”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저쪽이 그랬지.”
원유선이 무작정 엄살을 부리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방금 다섯 번 연속으로 <타임 리와인드>를 썼다.
<타임 리와인드>가 하루에 세 번까지 가능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수월하게 세 번 된다는 게 아니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사이사이에 몇 시간은 휴식을 취해야 했다.
원유선은 현기증을 느끼며 9번째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마지막 선택지인 흑백의 타일, 그리고 고고한 크로노스의 신상이 보였다.
원유선 눈을 돌려 외면했다.
“못 해요.”
“딱 하나 남았다구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원유선이 등을 돌려 차은비를 흘겨보았다.
새삼 차은비를 다시 보긴 했다.
S급 힐러라지만, 5번 연속 <타임 리와인드>를 쓰게 만들어줄 줄은 몰랐다.
‘솔직히 정말 무리하면 1번은 더 될 것 같지만.’
한건우의 계산이 꽤 정확했다.
하지만 너무 정확하다는 게 문제였다.
간당간당하다는 거였다.
‘괜히 나만 목숨을 걸 순 없지.’
게다가 이번 균열은 특별하지 않던가.
원유선은 김도경 지부장에게 귀띔을 들은 게 있었다.
공략 성공과는 상관없이, 지금은 기진맥진해지면 곤란했다.
나갈 때까지 힘을 아껴놔야 했다.
“그럼 어떡해요?”
“그렇게 올라가고 싶으면 차은비 씨가 먼저 가시던지?”
“으아···.”
차은비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폭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터였다.
솔직히 무서웠다.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마지막 선택지만 남았군요.”
지켜보던 한건우가 나섰다.
‘이 새끼, 아까부터 입 터는 걸 보아하니···.’
김도경은 경계를 바짝 세웠다.
아무래도 한건우가 김도경을 저기로 내몰려고 할 것 같았다.
‘랭킹도 내가 가장 높고, 만주 작전의 총 책임자라면서 분위기 조성할 것 같은데.’
김도경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김도경은 물론, 한건우의 정치질에 당해줄 마음은 없었다.
그 말은 거꾸로 돌려주면 된다.
랭킹이 높으니 다음 균열 공략을 위해 살아남아야 하고, 작전의 총 책임자니 희생할 수는 없다고.
그때 한건우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제 계획이니, 마지막 계단에는 제가 올라가죠.”
“뭐요?”
김도경은 하던 생각도 잊을 정도로 놀랐다.
한건우가 저렇게 희생 정신이 강한 인물이었던가?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나.
다른 이들도 움찔했다.
한건우가 2분의 1 확률에 목숨을 맡긴다니.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되면 무리를 해서라도 원유선 씨가 도와줄 거라 믿어.”
“형님, 안 됩니다.”
화들짝 놀란 박이경이 한건우를 말렸다.
그는 원유선을 믿지 않았다.
‘원유선, 태일제. 똑같은 부류야.’
대중들 앞에서는 고상한 척하지만, 뒤로 호박씨를 얼마나 까는지 알고 있었다.
‘그냥 원유선을 붙잡아서 10번째 계단 위로 던져버려?’
드드득.
박이경은 너클을 낀 주먹을 꽉 쥐었다.
“박이경, 놔 둬.”
한건우는 박이경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 한건우를 멍하니 바라봤다.
계단 위에 있는 원유선과 차은비도 한건우를 돌아보고 있었다.
스스스스···.
한건우가 벽의 틈새를 지나, 우주 같은 공간으로 넘어갔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게 있었다.
이 균열의 공략 보상이었다.
‘그걸 김도경한테 줄 수는 없지.’
한건우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첫 번째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각성자가 힘껏 점프해야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타앗-
타앗!
“헉.”
흰색, 흰색, 또다시 흰색 타일.
그 다음은 검은색, 검은색.
한건우는 거침없이 허공에 뜬 타일 위를 주파했다.
원유선이 있는 위치까지의 루트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차은비가 있는 일곱 번째 계단을 지나, 여덟 번째 계단에 우뚝 멈춰섰다.
한건우가 고개를 들었다.
원유선이 있는 아홉 번째 계단.
마지막 반반의 선택지가 있는 열 번째 계단.
그리고 크로노스 신상이 보였다.
신상의 손에서 황금빛 왕홀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건우가 태연하게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왕홀이 훨씬 크군요.”
“어떻게 할 거예요? 설마···.”
차은비가 뒤에서 다급히 속삭였다.
설마 목숨을 2분의 1의 확률에 맡기려는 거냐는 뜻이었다.
“한건우 씨는 구별하는 방법을 알아낸 건가요?”
원유선이 눈을 비스듬히 떴다.
그녀가 흰색 타일과 검은색 타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겉보기로는 구별할 수 없었다.
한건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우선 <삶과 죽음의 계단>에 대한 정보.
‘흰 타일이 일곱 번, 검은색 타일이 세 번.’
이미 검은색 타일 3번이 모두 나왔으니, 나머지 하나는 흰색이다.
하지만 그 기억 하나에 목숨을 태울 수는 없었다.
기억이 부정확해서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현재가 조금씩 바뀌어 오지 않았나.
이것도 미세하게 변경됐다면 큰일이니까.
한건우는 자신의 특성창 목록을 켰다.
주르륵 이어지는 목록을 내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세상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특성.
[특성 발동 : 포르투나의 동전]
-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동전을 던진다.
척 봐도 전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특성이었다.
한건우는 이 특성의 주인이던 자를 떠올렸다.
‘블랙마켓의 불법 도박장에서 살다시피 하던 약쟁이 도박꾼이었지.’
화아아!
암흑 공간에 희미한 빛무리가 번졌다.
행운의 여신이 미소짓는 형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팅그르르···.
500원 크기의 금화가 허공에서 돌아갔다.
한쪽 면은 흑색, 한쪽 면은 백색.
한건우가 기도하듯이 손을 모았다.
그건 한건우가 죽였던 도박꾼의 습관을 흉내낸 것이었다.
휘이익-!
한건우가 동전을 위로 튕겨올렸다.
티그르르르···..
타악!
동전을 잡은 한건우가 손바닥을 열었다.
‘역시.’
터억!
한건우가 망설임 없이 흰색 타일로 올라섰다.
<삶과 죽음의 계단>을 다 지난 것이다.
“!”
슈우우-
똑, 딱. 똑, 딱.
크로노스 신상의 두 눈에 번쩍 빛이 들어왔다.
스으으...
크로노스 신상이 왕홀을 내밀었다.
한건우가 내민 오른손으로 왕홀을 거머쥐었다.
동시에 기다리던 알림 메시지가 떴다.
[S급 균열 - 크로노스의 미궁, 공략 완료]
“와···!”
“!”
“역시 형님···.”
쿠과과과과광-!
<죽음> 쪽의 타일이 한 번에 폭발했다.
그 폭발은 안전한 타일에 서 있던 자들에게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하···.”
계단에서 내려온 차은비가 털썩 주저앉았다.
쿠구구구···.
미궁의 벽도 부서졌다.
균열 안은 더는 미로가 아니었다.
벽의 잔해에서 나온 먼지가 피어올랐다.
균열은 거대하고 어두침침한 공사장처럼 바뀌었다.
멀리 공중에 그들이 나온 균열 입구가 빛나고 있었다.
이제 저기로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어···?”
차은비가 당황했다.
들어온 사람은 5명인데.
균열 입구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
타다다다···.
그들을 둘러싸고 포위하는 소리였다.
김도경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