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크로노스의 미궁 (5) - 삶과 죽음의 계단
수수께끼를 풀고 동상을 부수어 열쇠를 꺼내기까지.
한건우의 행동은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었다.
‘미궁의 수수께끼를 풀 수야 있지만··· 어떻게 저런 확신이 있지?’
대한민국 2위 길드, 환인의 길드 마스터 원유선.
그녀가 다른 이에게 압도된 건 오랜만이었다.
저토록 강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더욱이 실력까지 뒷받침되고 있었다.
원유선이 문득 알파스의 박이경을 돌아보았다.
한건우를 바라보는 박이경의 옆얼굴에는 처음 보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뚜렷한 경외감이었다.
‘박이경···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놈인데. 한건우가 저 짐승을 어떻게 길들였나 했더니.’
박이경은 나이가 한참 어린 한건우를 형님 운운하면서 모시고 있지 않던가.
다른 꿍꿍이가 있나 했더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사이 한건우는 망설이지 않고 벽으로 다가가,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아넣었다.
드르륵.
열쇠가 한 번에 제대로 꽂혀들어갔다.
철컥.
쿠르르릉···.
열쇠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벽 안에서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돌벽이 좌우로 갈라지고, 미궁 중심의 공간이 나타났다.
“저게 뭐죠?”
차은비가 당황해서 숨을 삼켰다.
돌벽 사이로 나타난 공간은 깊이를 모를 암흑이었다.
마치 우주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드넓은 암흑의 허공.
그 가운데 크로노스의 신상이 떠올라 있었다.
한 손에는 빛나는 왕홀을 든 채였다.
“크로노스의 왕홀.”
한건우는 열린 벽 가까이 다가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허공이 먹먹하게 이어졌다.
저 위에 보이는 것이 천장인지 밤하늘인지.
그것마저 알 수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결 아찔했다.
파앗!
한건우가 손에서 작은 불꽃을 쏘아 떨어뜨렸다.
피유우우···.
타오르는 불꽃은 끝도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불빛은 점차 희미해지더니, 마침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바닥을 모를 만큼 깊다는 뜻이었다.
한건우는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로 파티원들도 다가왔다.
크로노스의 왕홀로 이어지는 열 칸의 계단이 보였다.
저걸 과연 계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네모난 흑백의 타일이 중력을 무시하고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왼쪽 줄은 백색, 오른쪽 줄은 흑색.
열 칸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왕홀이 있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저것만 뛰어올라가면 되는 겁니까?”
박이경이 금방이라도 계단을 뛰어올라갈 듯 어깨를 풀었다.
한건우가 그런 박이경을 제지했다.
“기다려.”
“예?”
박이경이 바로 동작을 멈추었다.
띠링-.
곧 모두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삶과 죽음의 계단]
-하나는 삶, 하나는 죽음.
-필멸자는 열 개의 계단을 지나야 왕홀을 얻을 수 있다.
‘역시 이것도 들은 대로군.’
한건우는 흑백의 계단을 응시했다.
“뭔 소립니까 이건?”
박이경이 머리를 긁적이며 한건우에게 물었다.
한건우는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미리 알고 있던 듯한 인상을 줄 필요는 없으니까.
“계단은 10단으로 되어 있어. 매 단계마다 흑색 타일과 백색 타일 중 하나를 골라야 할 것 같아.”
“그럼 삶과 죽음이란 건···.”
물론 한건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사람이 디딜 수 있는 계단.
나머지 하나는 폭발이 일어나는 트랩이었다.
보통 폭발이라면 터져도 막을 수 있겠지만.
이건 보호를 무력화하는 강력한 폭발이었다.
드래곤의 갑주를 입은 한건우마저도, 그게 발밑에서 터지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선택지를 잘못 고르면 죽는다는 거지.”
“비행 특성으로 날아가서 홀을 잡으면 어떨까요?”
차은비가 물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얼마나 쉬웠을까.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열 개의 계단을 지나야 얻을 수 있다고 했어. 반드시 계단 열 개를 밟는 게 룰인 것 같아.”
“그러면··· 반반의 확률에 목숨을 걸자는 겁니까?”
박이경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상체 근육이 크게 팽창했다.
“...2분의 1이 아니죠.”
“?”
특수안보부의 김도경 지부장이 말을 받았다.
그가 착잡한 얼굴로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2의 10승 분의 1···. 1024분의 1의 확률인 겁니다.”
파티원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흠··· 한쪽은 환영 계단인건가? 어이, 거기. 환영이라면 당신이 구별할 수 있잖아?”
박이경이 원유선을 돌아봤다.
원유선은 어깨를 으쓱했다.
“환영은 없어요. 다 진짜 계단이에요.”
원유선은 이미 두 줄의 계단을 유심히 살펴봤다.
둘 중 하나가 환영이라면 쉽게 구별할 수 있을텐데.
아쉽게도 아니었다.
“이건··· 못 해요.”
차은비가 뒤로 물러났다.
1024분의 1이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확률에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잠깐, 건우 형님. 아까 그 골렘을 조종해서 계단으로 보내면 어떻습니까?”
박이경의 아이디어였다.
‘제법인데?’
한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하는 척했다.
안 통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좋아.”
한건우가 바람 골렘을 연성했다.
반투명한 바람 골렘이 비척비척 걸어 열린 공간 앞에 섰다.
모두의 뚫어질 듯한 시선이 골렘의 뒷모습에 모였다.
터억!
바람 골렘이 훌쩍 뛰어서 흰색 타일 위로 올라갔다.
“앗!”
뭔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좋아한 것도 잠시.
투웅-!
바람 골렘이 튕겨나왔다.
보이지 않는 손에 맞은 듯 했다.
두 번, 세 번. 흑색 타일로 올라서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바람 골렘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왜 안 되는 거야?”
박이경이 답답함에 주먹을 쥐며 씩씩거렸다.
“<삶과 죽음의 계단>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골렘은 생명이 없는 존재죠. 생명을 대가로 걸 수 없어서 받아주지 않는 겁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김도경 지부장은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냉정한 눈으로 계단을 바라보았다.
“방법은 두 가지 있습니다.”
“뭐지?”
“첫째, 생명이 있는 마수를 조종해서 보내는 겁니다. 원유선 플레이어께서 할 수 있겠죠.”
“그래! 그거 좋네. 밖에 많잖아.”
박이경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게 통하지 않는다면···.”
“다음은 뭔데?”
“...일단 첫 번째를 해보죠.”
“좋아요.”
원유선이 미궁에서 미노타우르스 한 마리를 조종해서 데리고 왔다.
김도경의 그럴싸한 계획은 곧 수포로 돌아갔다.
미노타우르스가 저 공간으로 넘어가자, <마인드 컨트롤>의 정신 조종이 끊어져 버렸던 것이다.
“아.”
원유선이 안타깝게 신음했다.
아무래도 아공간처럼 공간의 단차가 있는 것 같았다.
미노타우르스는 첫 번째 계단에 무사히 뛰어올랐지만, 거기까지였다.
갑자기 환영이 사라져 정신을 차린 미노타우르스는 시커먼 허공에 뜬 타일 위에서 허우적댔다.
다음에 벌어질 일은 뻔했다.
미노타우르스는 몸의 중심을 잃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저갱으로 추락했다.
우워어어어-!
울음소리가 계속 울려퍼졌다.
아주 희미하게, 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으···.”
원유선이 입술을 깨물었다.
“거기 특수부 양반. 두 번째는 뭔데?”
박이경이 김도경에게 물었다.
몹시 건방진 태도였다.
한건우에게 하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사람을 투입하는 겁니다.”
“엉?”
김도경은 차가운 표정으로 파티원들을 돌아보았다.
물건을 감정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여기 있는 분들을 확률의 제물로 바칠 수는 없으니. 바깥에서 군인들을 데려오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선배님.”
차은비가 당황했다.
사실 그녀도 무심코 그 생각을 떠올리기는 했지만, 입 밖에 꺼내지는 못한 터였다.
다른 이를 희생시키자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할 줄은 몰랐다.
“차은비, 왜 그래. 너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 같은데?”
김도경이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얼굴로 차은비를 보았다.
그때 한건우가 나섰다.
“반대합니다.”
“한건우 플레이어, 뭡니까? 영웅 놀이라도 하는 건가요?”
한건우와 김도경이 첨예하게 대치했다.
“불가능하니까요. 지금 잔여 시간을 보시죠.”
“시간?”
파티원들은 얼른 알림창을 켜서 <균열 정보> 쪽의 잔여 시간을 확인했다.
그동안 시간은 신경쓰지 않고 있던 터였다.
8일이 넘는 공략시간이 있었으니까.
“뭐지? 이럴 리가···.”
김도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명히 균열에 들어온 지 6시간에서 7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밀폐되고 어두운 공간이라 시간 관념이 흐려진 걸 감안해도 이건···.”
남은 시간은 4일 남짓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줄어드는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장난이었다.
이 균열에서는 시간이 바깥보다 빠르게 흘렀다.
기본적으로는 6배.
미궁 2단계에서는 12배.
미궁 3단계에서는 24배.
현재는 미궁 3단계이니, 여기서의 1시간이 밖에서는 하루와 같았다.
김도경은 시간이 줄어드는 속도를 계산했다.
“남은 시간은 4일이 아니라 4시간···이군요.”
“아무리 빨라도, 지금 밖으로 나가서 군인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돌아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제가 빠르게 이동하면···.”
반박하려던 김도경이 입을 다물었다.
혼자서라면 <빛의 군주> 특성으로 섬광처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군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미노타우르스 균열을 안전히 헤쳐 나가려면 원유선과 함께 이동해야 했다.
좌절한 김도경의 얼굴을 보고, 한건우가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여기에 해결 방법을 숨기고 있는 분이 계시죠.”
한건우가 원유선을 가리켰다.
원유선은 ‘또 나냐?’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원유선을 이 균열에 데려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녀가 숨기고 있는 능력이라면, 이 균열을 희생 없이 깰 수 있었다.
아니면 확률 게임에 타인의 목숨을 밀어넣을 수밖에.
원유선이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는 지점을 한건우는 정확히 포착했다.
“횟수가 모자라시죠?”
“!”
원유선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한건우에게 마음을 낱낱이 읽힌 것이다.
“횟수라니. 그건 무슨 말이죠?”
차은비가 재빨리 물었다.
그녀는 오가는 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타임 리와인드>의 횟수 말입니다.”
“타임 리와인드요?”
“그걸 쓰면 1초 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선택의 기회를 벌 수 있습니다.”
한건우는 충격받은 원유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간 계열의 신화급 특성, <타임 리와인드>.
주변의 시간을 1초 전으로 돌리는 능력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설마 태일제 영감이?’
원유선은 다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특성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태일제밖에 없었다.
원유선의 <타임 리와인드>를 겪은 각성자는 모두 죽었으니까.
오직 태일제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녀는 궁극 방어기를 노출당해 분했지만, 그걸 따질 시간이 없었다.
“하루에... 1번밖에 못 써요.”
“3번까지 가능할 텐데요.”
“...!”
“그리고 차은비 씨가 있으니, 버프로 최소 2배 이상 늘릴 수 있습니다.”
원유선은 이제 확신했다.
저렇게 자세히 아는 걸 보니, 태일제가 알려준 게 분명했다.
‘망할 영감탱이···.’
원유선이 이를 갈았다.
“6번을 되돌려도 모자랄 수 있습니다.”
김도경이 계단을 가리켰다.
계단은 10개의 단으로 되어 있었다.
정말 6번의 횟수가 가능하더라도, 실패는 최대 6번까지만 허용된다는 소리다.
까앙-!
박이경이 너클을 부딪치며 픽 웃었다.
“언제부터 백 프로 안전할 때만 도전했어? 까짓거 가보자고! 특수부 양반, 쫄리면 먼저 내빼시던가.”
김도경의 눈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김도경도 인정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