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크로노스의 미궁 (2) - 환각 미로
“하아, 간 떨어질 뻔 했네. 이런 말은 없었잖아?”
차은비가 투덜거리면서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간혹 상급 균열 중에서 이렇게 무서운 경우가 있긴 했다.
균열에 들어오자마자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던지, 바닷속으로 이동해 버린다던지.
어떻게 보면 이 균열은 더 심했다.
‘파티원’이라는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녀는 조명 아이템을 켜고 주위를 비춰보았다.
‘정말이네.’
한건우가 미리 귀띔을 해준 게 있었다.
‘균열에 들어가는 순간 차은비 씨는 혼자가 될 겁니다.’
‘네?’
차은비는 그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랐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마 따로 떨어질 겁니다.’
‘그럼··· 미로 안에서 어떻게 만나죠?’
<미궁> 균열이니 미로가 나오는 건 상식이었다.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움직이지도 말고.’
‘네?’
‘제가 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요.’
차은비는 그 말이 조금 불만이었다.
자기를 무시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지금 와서 보니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딜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잖아?’
사방은 돌벽으로 막혀 있었다.
혹시나 하고 두드려 보았지만 모두 진짜 벽이었다.
커다란 정사각형 칸에 갇혀있는 셈이었다.
미로가 아니라 감옥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
쿠웅- 쿵!
“?”
멀리서 엄청난 기세로 소리가 들렸다.
돌벽에 좌충우돌하며 부딪치는 소리였다.
‘마수인가?’
차은비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코뿔소 같은 마수가 돌벽을 박아 부수는 소리 같았다.
도저히 인간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스르륵.
차은비가 허리에 차고 있던 레이피어를 뽑았다.
행사용 칼이냐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거의 뽑지 않는 물건이었다.
“....”
쿠우웅- 쿠우웅-! 콰직!
진동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뭔가 박살나는 소리도 들렸다.
‘벽을 부수면서 이동하고 있어!’
움직이는 속도나 소음을 볼 때, 확실히 인간은 아니었다.
누가 저렇게 무식하게 벽에 온몸을 충돌하고 다닐 것인가.
‘바로 근처야.’
차은비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레이피어를 겨누었다.
일격에 미간을 뚫어버리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콰과과광-!
그녀 앞의 돌벽이 산산조각 났다.
쉬익!
“!”
차은비는 레이피어를 들고 몸을 날렸다.
부스러기와 돌 조각이 날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아?”
“너, 뭐 하냐?”
차은비의 발이 허공에 붕 떴다.
그녀는 목덜미가 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마수인 줄 알았던 상대는 거인화된 박이경이었다.
“내려놔요!”
그녀도 S급 각성자였다.
그렇게 쉽게 다루어질 사람은 아니었건만.
완력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얌전히 있어야 내려놓지. 바늘로 찌르려고 했잖아.”
“바늘···?”
박이경은 툴툴거리면서도 순순히 차은비를 놓아주었다.
차은비는 그를 쏘아보았지만, 내심 그녀는 박이경이 반가웠다.
S급 균열에서 혼자 있다가 그를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 속으로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순수한 궁금증도 들었다.
“어떻게 벽을 깼어요?”
“주먹을 벽에 쳐 봤더니, 부서지더라.”
차은비가 깜짝 놀랐다.
미궁 균열의 미로는 절대 파괴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래요? 미로의 벽이 깨진다고요?”
“그런데 랜덤인 것 같아. 어떤 벽만 깨지고, 어떤 벽은 온몸으로 들이받아도 꿈쩍도 안 해.”
“아하···.”
이제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무식하게 벽에 온몸을 들이받고 다녔는지를.
박이경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센 척 했지만 지쳐 보였다.
차은비는 말 없이 그의 깎인 MP와 HP를 채워 주었다.
‘아니 세상에··· 이 정도로?’
조금만 더 있었으면 박이경의 체력이 바닥날 뻔했다.
박이경이 잠깐 폭주했을 뿐, 더이상 같은 방법을 쓰는 건 무리 같았다.
“벽에 들이받는 게 방법은 아닐텐데···.”
“그럼 네가 해답을 내 봐. 어?”
박이경이 톡 쏘듯이 말했다.
차은비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때 갑자기 웅웅거리는 큰 진동이 들렸다.
“어?”
부우우우-!
마치 사이렌 소리 같았다.
물결치는 파동음이 점점 커졌다.
그 소리를 듣자, 머릿속에 끼어있던 안개가 말끔히 개여지는 기분이었다.
“헉.”
“뭐야!”
그녀와 박이경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박이경이 부수었던 벽과 그 잔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으으으-.
스스스···.
벽 뒤의 벽도, 그 옆의 벽도 사라졌다.
그러나 모든 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환각이 없어지면서 진짜와 가짜가 가려졌을 뿐이었다.
진짜 벽은 굳건히 남아있었다.
드디어 미로의 형상이 나왔다.
“알겠다! 부서지는 벽은 가짜였던 거야.”
박이경이 깨달은 듯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의기양양하던 그가 차은비에게 물었다.
“어이, 너. 정신 방어벽 있다고 안 했어? 환각은 왜 못 없앴냐.”
“처음 들어온 순간부터 걸린 걸 어떡해요.”
차은비는 톡 쏘듯이 답했다.
속으로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환각을 쓰는 마수가 나오는 정도만 생각했는데, 미로의 일부가 환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까 그 나팔 소리 같은 건 뭐냐.”
그녀도 그게 궁금하던 차였다.
소리 한 번으로 정신 상태이상을 제거하다니.
평범한 아이템은 아닌 듯했다.
“그쪽으로 가보자.”
“잠깐만요!”
차은비가 박이경의 소매를 덥썩 붙잡았다.
박이경은 뒤를 돌아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래?”
“조금만 기다려요.”
차은비는 어쩐지 감이 있었다.
기다리면 한건우가 이쪽으로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방법은 모르지만 한건우가 그럴 거라고 했으니까.
한건우가 한 말 중에 이뤄지지 않은 게 없었다.
그 순간.
띠링-.
불길한 알림음이 들렸다.
그들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긴급)균열 조정 : 미궁 2단계]
“뭐?”
박이경은 무심코 다음 칸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슈우욱-!
앞쪽에서 날카로운 감각이 찌르듯 닥쳐왔다.
“!”
차은비의 시야는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거인화된 박이경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보호 특성을 펼쳤다.
[특성 발동 : 신의 가호]
파바바밧!
“윽!”
박이경의 두 눈을 노리고, 강한 산으로 된 독액이 쏘아졌다.
그는 팔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치지지지···.
“...!”
박이경은 식겁했다.
아무리 피부가 단단해도 강한 산에는 답이 없었다.
다행히 독액이 피부에 닿지 않았다.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아래로 흘러 떨어졌다.
차은비가 아니었으면 시각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박이경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가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고 미로를 살폈다.
독액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미로의 함정인가···? 갑자기?”
미궁에 숨겨진 함정이 있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가 움직일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
게다가 저 칸은 박이경이 방금도 지나왔던 칸이었다.
차은비는 방어막을 겹겹으로 강화해 둘러쳤다.
불시에 기습이 와도 막을 수 있도록.
“은비야, 고맙다.”
“...?”
박이경이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차은비는 멈칫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정상적인 모습도 있었나?’
그러나 곧 자괴감이 밀려왔다.
목숨을 살려 주고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를 한 것뿐인데.
자칫하면 감동을 받아버릴 뻔했다.
‘인간이라면 저게 당연한 반응이잖아.’
차은비는 얼른 고개를 젓고 이상한 기분을 털어냈다.
그녀는 방금 뜬 알림을 다시 뜯어보았다.
“균열 조정, 미궁 2단계···. 이게 뭘까요.”
균열 안에서 새로운 알림이 뜨다니.
척 봐도 좋은 일 같지는 않았다.
“낸들 아냐. 미궁이 레벨 업이라도 했나?”
박이경이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 말이나 툭 던졌다.
차은비는 진지하게 그 말을 받았다.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엉?”
“좀전의 미궁은 1단계··· 환각의 벽만 있었던 거고, 이제는 함정이 작동하는 거예요. 그게 2단계인 거죠.”
박이경의 귀가 동물처럼 쫑긋했다.
그때, 한건우가 허공에서 스르륵 나타났다.
아무런 기척조차 없었다.
“형님!”
“한건우 씨!”
박이경이 주인을 만난 개처럼 반가워했다.
몸이 워낙 커서 그런지 감정이 잘 드러났다.
보이지 않는 꼬리가 흔들리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제 자리에 있으라고 했잖아.”
한건우가 힐난하는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둘에게 미리 경고를 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면 찾아가겠다고.
박이경은 움찔했고, 차은비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뭐, 덕분에 빨리 만나긴 했지만.’
박이경이 하도 쿵쿵거리면서 요란을 떠는 바람에 쉽게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벌써 2단계 미궁이 됐다는 건···.’
한건우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패였다.
‘김도경이냐, 원유선이냐?’
누군가 생각보다 길을 잘 찾아내고 있었다.
‘뭣도 모르고 미로를 건드리다니. 일이 귀찮게 됐군.’
*
<크로노스의 미궁> 균열에 두 번째로 들어간 건 김도경이었다.
홀로 떨어진 김도경은 당황했다.
분명히 원유선이 먼저 들어갔는데, 그녀가 안 보였다.
따라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김도경이 상황을 깨닫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세운 음모가 초장부터 어긋난 것 같았다.
이 균열에서 박이경을 잡았어야 하는데.
‘일단 보류하고, 기회를 봐야겠군.’
김도경은 감옥처럼 밀폐된 사방의 벽을 둘러보았다.
‘왜 미로가 아니라 닫힌 공간이지?’
그는 의문을 가졌다.
김도경은 곧바로 미궁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고대의 환각이 걸려 있군.’
고대의 환각은 눈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다 속였다.
파훼법은 비교적 단순했다.
무엇이 환각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면 그 환각은 힘을 잃었다.
김도경이 광선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특성 발동 : 빛의 군주]
스으으-.
백색의 빛이 칼날 형태를 이루었다.
스릉-.
김도경이 보이지 않는 적을 베듯이 광선검을 한 바퀴 휘둘렀다.
검술의 교본 같은 자세였다.
빛의 칼날이 사방의 벽을 훑었다.
어떤 벽에는 칼에 베인 자국이 생겼고, 어떤 벽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미궁 균열의 진짜 벽은 절대 파괴되지 않아.’
환각이라고 확신만 하면, 벽의 형상도 점점 흐려졌다.
부수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었다.
김도경은 균열의 공략 조건을 되새겼다.
- 공략 조건 : 크로노스의 왕홀을 찾는다.
이 미로 어딘가에 아이템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기초적인 형태의 미로라면, 아주 단순한 방법이 있었다.
‘우수법.’
한쪽 손을 벽에 붙이고 따라간다는 생각으로만 가도 된다.
미로 안의 모든 구간을 훑을 수 있으니까.
김도경은 먼저 미궁 계열 균열에 대비한 아이템을 꺼냈다.
[테세우스의 실타래]
한 번 지나간 공간을 표시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이걸 들고 지나가면, 실타래가 풀리듯이 허공에 빛으로 된 선이 그어졌다.
이 아이템은 균열을 공략한 후 출구를 찾아 나오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
공략에 성공해도 출구를 못 찾으면 소용이 없다.
미로 안에 갇히게 되니까.
타다다-.
김도경은 환각의 벽을 통과하면서 빠른 속도로 미로 안을 주파했다.
테세우스의 실타래 덕분에 시간이 절약되었다.
한 번 지나간 길을 두 번 가는 일은 없었으니까.
김도경은 원래도 공간 지각이 뛰어났다.
‘이건 기본적인 사각 미로야.’
우선 미로가 실시간으로 변형되는지를 주의깊게 살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천만 다행이군.’
미로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다.
벽의 각도를 미세하게 속이거나, 바닥의 층고가 변하는 것 같은 속임수도 없었다.
김도경의 머릿속에는 점차 미로의 지도가 그림처럼 그려졌다.
아주 멀리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
김도경이 자리에 멈추어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진동의 진원지가 너무 멀었다.
어느 방향에서 나는 건지도 알기 어려웠다.
‘다른 놈들인가···. 대체 어디서 헤매고 있는 거야?’
어쩌면 다른 파티원들은 처음부터 환각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속수무책으로 갇혀 있겠지.
‘고대 환각을 제대로 알아볼 사람이 없나? 원유선 정도 말고는···.’
김도경이 혀를 찼다.
그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지금 크게 한 바퀴 돌고 있는 것 같은데.’
김도경은 머릿속으로 미로의 지도를 떠올려보았다.
이어진 벽이 큰 원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윽.”
김도경은 탄식했다.
만일 우수법이 통하지 않는 형태의 미로라면, 이제까지 시간을 낭비한 셈이었다.
‘이 다음 칸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안 나오면, 이제 바깥쪽으로 돌아야 해.’
김도경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환각의 벽을 통과했다.
“!”
스응!
뭔가를 발견한 김도경이 광선검을 겨누었다.
‘동상···?’
청동으로 된 거신상이 보였다.
크기는 10미터 정도 되었다.
혹시나 했지만, 움직이지 않는 진짜 동상이었다.
거신상은 수염이 난 노인의 형상이었고,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크로노스···.’
거신상의 발밑에 다섯 개의 관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김도경은 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안에 크로노스의 왕홀이 들어있는 건가?’
그러기에는 관의 크기가 작아보였다.
크로노스 신상의 크기를 볼 때, 왕홀이 이렇게 작을지 의문이었다.
김도경은 긴장을 놓지 않고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바닥에 룬 문자가 쓰여진 표지석이 있었다.
김도경은 룬 문자를 읽을 줄 알았다.
<죽음 안에 정답이 있다>
“?”
김도경은 고민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관을 열어보라는 소리로 들렸다.
관 다섯 개는 겉으로 보기엔 동일했다.
혹시나 해서 환각인지 확인해봤지만, 아니었다.
확률은 5분의 1.
김도경이 왼쪽에서 첫 번째 관을 열었다.
슈우욱!
“으윽!”
김도경의 몸이 강제로 이동했다.
눈앞은 암전이었다.
“!”
김도경이 벌떡 일어나며 빛을 밝혔다.
다시 사방이 꽉 막힌 벽이 보였다.
“하....”
균열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똑같았다.
순간적으로 시간을 돌아온 건가 의심될 정도였다.
띠링-!
[(긴급)균열 조정 : 미궁 2단계]
“빌어먹을.”
김도경이 욕설을 내뱉었다.
시간을 돌아온 건 아니었다.
그는 잘못된 선택지를 골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