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98화 (98/238)

#98크로노스의 미궁 (1) - 그럴싸한 계획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한건우가 입을 열었다.

“다시 2개 파티로 나누어서 2개의 균열을 동시에 공략하시죠.”

그가 전략 모형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어디를 먼저···?”

남은 균열은 3개였다.

선택이 필요했다.

“잔여 시간을 기준으로, 가장 여유가 있는 <심연의 부름>을 남겨두고요.”

“좋소.”

어느 균열을 먼저 깨느냐보다, 누구랑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게 목숨을 좌우할 수 있으니까.

“기본적으로는 기존 파티를 유지하는 선에서요.”

사람들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성공이 입증됐으니, 굳이 파티를 섞으면서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원유선의 파티였던 쪽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쪽은 사람이 한 명 모자란데다, 랭킹으로 봐도 더 약했다.

랭킹 1, 2위인 태일제와 김도경이 모두 반대쪽 파티에 몰려 있었으니까.

불만이 터져나오기 전, 한건우가 덧붙였다.

“다만, 이런 제안을 드립니다.”

한건우는 회의 탁자의 전략 모형에 손을 가져갔다.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손가락 끝에 집중되었다.

한건우가 ‘일성-태일제’라고 표시된 모형을 반대쪽 파티로 옮겼다.

그리고 태일제가 속한 파티 전체를 <지옥 광산> 균열 쪽으로 옮겼다.

“!”

“왜 그런...?”

“<광산> 계열의 균열은 십중팔구 금속이 풍부한 환경이니까요.”

“아하.”

금속을 조종하는 태일제의 능력.

그 힘을 백 퍼센트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듣고 보니 태일제가 그쪽으로 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물론 한건우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제부터 태일제와 김도경을 떨어뜨려 놓아야 해.’

곧 한건우는 김도경과 대립각을 세울 것이다.

전투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 둘이 합심해서 반격한다면 상대하기 만만치 않을 터였다.

게다가 차은비도 어느 쪽을 도와야 할지 갈팡질팡할 가능성이 컸다.

한건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환인-원유선’ 모형을 자기 파티로 끌어왔다.

‘원유선은 태일제보다는 중립에 가까워. 김도경과도 큰 인연이 없다고 알고 있고.’

그리고 이번 균열에는 그녀의 능력이 필요했다.

생각을 마친 한건우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뭐라고요?”

원유선이 인상을 찌푸렸다.

비록 전략 모형일 뿐이라지만.

새파랗게 어린 한건우가 자기와 태일제의 거취를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기분좋을 리 없었다.

“<크로노스의 미궁> 균열. 정신이나 시간 계열 공격이 예상되니, 거기에 대항할 멤버가 필요합니다.”

“...알겠어요.”

‘시간’이라는 단어에 원유선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금세 태도를 바꾸고 선뜻 받아들였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태일제는 그런 그녀와 한건우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한건우, 알고 말하는 건가?’

환인 길드의 원유선은 정신 계열 각성자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 특성조차 실전에서 쓴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짜 능력은 그게 아니었다.

원유선의 비밀 병기인 시간 계열 특성.

한건우는 그걸 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태일제는 문득 눈을 돌려 특수안보부 측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김도경과 그의 부하들이 보였다.

그들은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돌아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왜 그들은 작전을 주도하지 않고, 한건우가 날뛰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걸까?

태일제의 사고가 문득 생각지도 못한 데 미쳤다.

‘설마··· 특수안보부가 한건우를 지원하고 있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정보력과 기획 능력.

매번 따르는 천운.

실패 한 번 없이 최상위 길드까지 승승장구하기까지.

정부 차원의 특혜와 정보 공세.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한때 태일제도 경험했다.

특수안보부가 물심양면으로 한 길드를 밀어주면, 세상에 안 되는 게 없었으니까.

‘대체 왜, 어째서!’

태일제는 팔짱을 낀 채 분노의 신음을 삼켰다.

일성과 특수안보부.

대한민국을 이끄는 두 축이라고 생각해 왔다.

태일제는 자타공인 최강의 무력을 가졌지만, 안정을 추구했다.

사회에 혼란을 일으킨 적도, 정부를 전복하려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특수안보부는 세대 교체를 생각하는 건가?’

있을 법한 일이었다.

동시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쓰디쓴 배신감이 올라왔다.

특수안보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뺏기면, 일성 길드가 쌓아올린 자리도 순식간에 위협당할 수 있었다.

‘아직 확인된 건 아니니. 신중하게 판단하자.’

태일제의 날카로운 시선은 차은비에게 이르렀다.

그녀는 한건우의 옆에 딱 붙어 앉아있었다.

‘가만, 차은비를 파견 보내면 좋겠다고 압박을 넣은 것도 특수안보부였지.’

그때는 특수안보부에서 한건우를 지켜보기 위한 정보원 격으로 심으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태일제도 그에 동의했었다.

자신도 떠오르는 신성인 한건우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 싶었으니까.

돌아보니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내가 어리석었군.’

태일제는 다른 길드를 망하게 하는 데 익숙했다.

그의 손속은 잔인하고 치밀했다.

그 칼날이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걸 간과했을 뿐이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안이하게 지냈는지도···.’

일성 길드의 왕좌가 도전을 받지 않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까.

태일제는 본래 의심과 경계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 의심이 태일제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태일제가 오해를 키울 동안, 전략이 완성되어갔다.

*

차은비는 공략 시간을 앞두고 막사 밖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지평선까지 이어진 황무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모래가 섞인 찬바람이 무척 건조했다.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 정부에서 버린 텅 빈 땅.

식사도 잠자리도 휴식 공간도.

좋은 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원정 끝내고 돌아가기만 해봐라. 좋은 호텔에 가서 수영도 하고 스파도 하고 푹 쉴 거야···.’

그녀의 유일한 희망사항이었다.

다행히 일은 잘 풀리는 것 같았다.

특히, 새 고용주의 활약이 놀라웠다.

‘한건우 씨는··· 내가 알던 것보다 더 강한 것 같아.’

차은비는 무심코 한건우의 전투력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후방에 서는 힐러였다.

전장의 모든 상황을 놓치지 않고 지켜봐야 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잘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김도경 선배님이나... 태일제 마스터보다도 강할지도 모르겠어.’

그 둘은 현재 국내 전투력 랭킹 1, 2위를 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차은비의 생각이 외부에 알려지면, 아마도 큰 화제가 될 것이다.

세간의 호사가들은 한건우의 예상 랭킹에 관심이 많았다.

올 연말에 나올 랭킹을 추정하는 게 관심거리였다.

- 10위 안에는 무조건 들겠지.

- 너무 보수적으로 잡았는데? 박이경도 박살냈잖아. 당연히 5위 안이지.

- 한 번 우연히 이겼다고 랭킹이 고정되는 건 아냐.

언론에서는 이번 원정의 경과에도 관심이 많았다.

공식적으로는 기자들을 차단했지만, 은근히 소식이 새어나가는 모양이었다.

사태가 아무리 심각해도, 민간인 중에서는 그걸 게임처럼 즐기는 자들이 있었다.

‘흥, 각성자들이 목숨 걸고 싸워야 평화가 지켜지는 것도 모르고.’

차은비는 그런 분위기가 별로였다.

‘아··· 그러고보니 박이경.’

알파스 길드의 박이경을 생각하면, 차은비는 아직도 뒷목이 당겼다.

그의 무식한 행동거지 때문이었다.

‘사람을 짐짝 나르듯이 어깨에 올리다니.’

정말 치욕스러운 순간이었다.

이제껏 그녀를 그렇게 함부로 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박이경에게 닿았던 걸 생각하니 소름 끼쳤다.

‘어우, 정말!’

차은비가 팔을 털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 조용히 다가왔다.

“차 부장님.”

“어?”

오랜만에 들은 일성 길드에서의 호칭이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차은비가 깜짝 놀랐다.

차은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가온 남자는 태일제의 비서였다.

평소 회사원처럼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만 보았는데.

컴뱃 셔츠에 방어구를 걸친 모습을 보니 영 달라보였다.

‘그래, 김 비서도 각성자였지?’

그는 <진실의 눈>이라는 편리한 특성을 가진 남자였다.

그걸로 태일제의 총애를 받아서 비서가 되었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세요.”

차은비가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김 비서가 차은비에게 따로 할 말은 없을 터였다.

아마 태일제가 전하는 말이 있으려니 싶었다.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비서가 엄숙한 얼굴로 나지막히 말했다.

“태일제 마스터께서 복귀를 요청하십니다.”

“...?”

차은비가 화들짝 놀랐다.

**

[S급 균열 - 크로노스의 미궁]

- 공략 조건 : 크로노스의 왕홀을 찾는다

- 잔여 시간 : 8일 3시간 58분

한건우는 균열 입구에 서서 박이경을 돌아보았다.

‘원래 박이경과 알파스 길드원들은 이 균열에서 죽었다고 했어.’

한건우가 회귀 이후에 알게 된 게 있었다.

사람의 사고 회로는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어진 조건이 비슷하면, 거의 동일한 결론을 냈다.

김도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이번에도 박이경을 여기서 죽이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지.’

한건우는 이 균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균열은 <미궁> 계열 균열의 대표적인 사례라며 교육 자료로 쓸 정도였으니까.

미궁 계열 균열은 대체로 공통점이 있었다.

주로 어두컴컴한 미로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공략 조건이었다.

물론 그 미로는 숨겨진 함정과 마수로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궁 균열에서는 정신 계열의 상태 이상을 주의해야 했다.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환각에 빠지는 식이었다.

그러면 균열 공략은 말할 것도 없고, 출구도 찾지 못한다.

바깥으로 도망치는 것마저 어려워지는 것이다.

“차은비 플레이어. 광역 보호 특성을 준비해 주세요. 모두들 그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김도경이 말했다.

얼핏 듣기에는 합리적인 대처였다.

일단 파티 구성도 그럴싸했다.

빛을 다루는 김도경.

정신 방벽이 강하고, 역습까지 가능한 원유선.

상태이상 방어를 해줄 수 있는 차은비.

그리고 한건우와 박이경이 무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미궁을 깨기에 최적의 파티로 보였다.

그러나 한건우는 알고 있었다.

‘다 소용 없는 짓이지.’

여기 들어가는 순간, 김도경의 계획은 어그러질 것이다.

슈우우-.

그들은 나란히 균열로 들어갔다.

균열 안은 암흑이었다.

발밑에는 땅이 밟히지 않았다.

땅이 아닌 공중으로 이동한 것이다.

슈웅- 타앗.

화염의 날개를 펼친 한건우는 가볍게 땅에 착지했다.

화르르륵···.

한건우가 불을 환히 밝혔다.

사방은 수십 미터 높이의 돌벽으로 막혀 있었다.

감방에 갇힌 듯했다.

파티원들은 아무도 안 보였다.

제각기 랜덤 배정으로 시작하는 균열.

이 미궁의 첫 번째로 악랄한 점이었다.

“꺄악!”

연이어 새된 비명소리가 들렸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차은비의 목소리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거리였다.

한건우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균열 입구가 보여야 하는데, 벌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미로에는 강력한 환각이 씌워져 있었다.

사방이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방의 벽 중 하나는 환각이었고, 나머지 3개의 면은 진짜 벽이었다.

환각의 벽은,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는 실제 벽과 똑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게 환각이란 걸 인지한 상태에서는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모 칸을 하나씩 이동할 때마다 그런 환각은 반복되었다.

길을 하나하나 찾아나가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시간 내에 이 균열을 공략할 수 없다.

한건우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환각이란 건, 정신 계열의 상태이상이지.’

그가 품 속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서리거인의 뿔피리(희귀)]

-아군의 정신 방어력을 일시적으로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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