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악마의 손
“...일이라니?”
아래에 깔린 권석진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나 한건우는 속지 않았다.
권석진은 단순히 시간을 끌려는 것 같았으니까.
권석진은 시야가 넓은 편이었다.
측면 시야로 옆에 떨어진 클레이모어의 위치를 재고 있었다.
다시 반격할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다.
‘안 믿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
처음부터 덥썩 받아들이면, 그게 이상한 놈이니까.
“포기해요. 내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면, 분대장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으윽....”
권석진이 침음을 흘렸다.
자존심 상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권석진은 이미 한건우와 그 사이의 압도적인 실력 차를 느꼈다.
그가 억울한 듯 이를 악물었다.
한건우가 그의 목을 누르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권석진 분대장님, 당신 뭡니까? 이중 첩자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일부러 노골적인 단어를 사용하며 그를 긁었다.
권석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첩자? 나는 대한민국 군인이다. 군인이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게 무슨 문제지?”
“그래요? 그렇다면 김도경한테 가서 말하면 어떻게 될까.”
협박.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었다.
예상대로 권석진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권석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안 되겠군.’
권석진의 속내를 알아내야 하는데, 그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건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고문을 하면 빠르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런 게 먹힐 사람도 아니었다.
한건우가 권석진에 대한 정보를 읊었다.
“이능력 특수전단의 권석진 분대장. 현재 나이는 32세. 열아홉에 각성해서 군에 입대했고.”
“...?”
“장기복무를 신청했다가 이능력 특수전단에서 콜을 받았죠. 지금은 홀아버지를 모시고 처자식과 함께 살고 있고.”
“...내 뒷조사를 한 건가?”
권석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가족 얘기를 꺼내자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권석진에게 가족은 가장 큰 약점이었다.
가족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권석진의 기가 수그러들었다.
“당신이 이 길을 택한 이유는, 범죄를 저지르는 각성자들에 대한 증오 때문이 컸죠. 아닙니까?”
“잘 알고 있군. 국가의 적들을 없애는 거다. 문제라도 있나?”
권석진이 한건우를 노려보며 씹어 뱉듯이 물었다.
‘진실.’
한건우는 <거짓 간파>로 그의 말의 진위를 확인했다.
속으로 안도감이 밀려왔다.
자기가 알던 권석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서 오는 안심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확인이 필요했다.
“문제? 있죠. 당신은 김도경이 아닌 국가에 충성해야 하는 사람 아닙니까?”
권석진은 머리를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그가 입을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김도경 지부장도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오.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게 곧 국가를 위한 일이고.”
‘거짓.’
권석진은 역시 특수안보부의 명령에 갈등하고 있었다.
그의 숨겨진 속마음을 알고 나니, 이제부터는 쉬웠다.
권석진이 고민하는 지점을 정확히 찔러주면 된다.
“분대장님. 그렇다면 명령대로 박이경을 죽일 생각입니까?”
“...!”
권석진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방금 김도경이 했던 지시 말입니다. 알파스 길드의 박이경, 범죄자도 아닌 사람을 이유없이 죽이는 게 맞습니까?”
“상부에서 결정한 일이오. 이유가 있겠지.”
“정말 문제 없다고 생각했으면, 왜 굳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겁니까?”
“....”
“사실은 알고 있죠? 김도경의 명령은 사익을 위한 겁니다. 그건 임무가 아닙니다. 그냥 살인에 가담하는 거죠.”
권석진은 그제야 긴장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걱정 말아요. 소리는 모두 차단하고 있으니까.”
한건우가 손마디로 허공을 두드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아무 소음도 안 들렸어.’
한건우는 공간 능력까지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권석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권석진은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아까 한건우의 말투는 꽤 의미심장했다.
김도경과 자신이 만나는 장면을 직접 본 것 같았다.
‘거기서부터 날 미행했다고? 그럼···.’
김도경의 감각을 속이고 특수안보부의 막사에 숨어들 정도라니.
한건우는 아직도 모든 능력을 보여주지 않은 게 분명했다.
권석진은 아득한 눈으로 한건우를 올려다보았다.
달을 등지고 있는 그가 더욱 무시무시해 보였다.
권석진의 반응을 보고, 한건우는 직감했다.
그가 반쯤 넘어왔다는 것을.
한건우는 여유롭게 생각에 잠겼다.
‘김도경이 박이경을 죽이려 한다라···.’
실마리가 풀릴 듯 말 듯 했다.
회귀 전 만주 사태에서, 박이경과 알파스 길드의 실세는 전멸했다.
다른 사망자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 대접을 받았건만.
그들은 그렇게 되지도 못하고 어리석었다는 오명만 얻었다.
정부의 작전 명령을 어기고, 지나친 만용을 부리다가 죽은 걸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평소 좌충우돌하는 박이경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아무도 진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건우마저도 긴가민가했다.
아까 김도경이 내린 비밀 임무를 엿듣기 전까지는.
이제 확실했다.
‘그때도 특수안보부가 박이경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거야.’
왜 하필 박이경이 첫 번째 타겟일까?
물론 알파스 길드는 이단아 같은 성격이 있었다.
1위 길드인 일성, 2위인 환인과는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대형 길드 중에서 유난히 정부에 비협조적인 편이기도 했다.
특히 각성자 사관학교 출신에게는 대놓고 혐오감을 표출했다.
그런 박이경을 특수안보부에서 곱게 볼 리 없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박이경에 대해서 꺼림칙하던 느낌이 싹 가셨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오히려 박이경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절대로.’
한건우가 씩 웃었다.
“현재 우리가 원하는 게 같군요.”
“그게 무슨···?”
“나는 특수안보부가 하는 방식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잘못된 건 고쳐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
권석진이 바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당장 무슨 수가 있을까.
좋으나 싫으나 김도경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그의 마음을 읽고, 한건우가 말했다.
“분대장님은 김도경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실패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죠? 그게 쉽지 않겠지만.”
권석진은 낭패라고 느꼈다.
한건우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한건우가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 말대로 해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한건우의 말투는 마치 악당 같았다.
그는 도저히 한건우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한건우 플레이어는 특수안보부의 편이 아니었군.’
권석진은 그 사실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한건우가 그의 위에서 내려와서 손을 내밀었다.
권석진은 악마의 손을 잡는 기분이었다.
**
또다른 S급 균열에 들어갔던 두 번째 팀.
환인 길드의 원유선을 비롯한 4명 역시 공략에 성공했다.
균열에 들어간 지 12시간만이었다.
처음에 만주 땅에 열린 균열은 6개.
S급 균열이 5개, A급 균열이 1개였다.
출동한 지 한나절 만에 남은 균열이 3개로 줄었다.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아직까지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진지 전체에 희망적인 기운이 흘러 넘쳤다.
‘어쩌면 정말로 모든 균열을 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
원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작전이다.
‘중국 정부도 손 놓고 포기했는데, 우리나라 각성자들이 막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이런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국내 여론도 회의적이었다.
‘우리나라 땅도 제대로 못 지키면서 왜 중국 일에 나서느냐!’
‘정부는 뭐 하냐. 각성자들을 빨리 철수시켜서 국경에 포탑이라도 강화해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국경 근처에 미공략 균열이 생기는 것보다는 닫아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국민들은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제 민간인들 여론도 좀 바뀌려나?”
“아무래도.”
보초를 서던 군인이 옆 동료에게 말했다.
둘 다 표정이 환했다.
그러나 막 균열에서 나온 4명의 S급 각성자들의 얼굴은 죽상이었다.
앞선 2개의 균열, 즉 <황혼의 서리거인>과 <거울의 숲> 균열의 소식 때문이었다.
“뭐···? 첫 팀은 7시간만에 나왔다고? S급 균열 확실하지?”
원유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A급 균열은···? 거기도 이미 닫았다고?”
내심 자기들이 가장 빨리 나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일 늦었다니.
다른 팀의 엄청난 공략 속도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원유선은 몹시 당황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침착하려 애썼다.
“우리 쪽은 한 명이 적었잖아. 그리고 김도경 지부장이랑 태일제 영감이 같이 갔으니 당연히···.”
원유선은 환인 길드의 힐러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저, 마스터.”
원유선의 비서가 곤란한 얼굴로 속삭였다.
“뭐? 서리거인 왕을 잡은 게 한건우라고?”
“확실하답니다.”
비서가 입수한 소식을 전했다.
원유선은 초조해졌다.
‘얘기가 이렇게 흐르면 안 되는데···.’
“마스터, 작전회의에 참여하실 겁니까? 금방 시작한다고 합니다.”
“미친 놈들. 쉬지도 않는대?”
원유선은 평소와 달리 날카롭게 반응했다.
“이미 6시간 쉬었고, 시간이 없다고···.”
“어휴.”
원유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힐러에게 명령했다.
“넌 회의장에 따라와.”
“예.”
회의 자리에서 힐을 받는 한이 있어도, 그 자리에 빠질 수는 없었다.
*
작전회의가 열리는 공동 막사.
회의 테이블에는 전략을 짜기 위한 모형이 만들어져 있었다.
주변 지형지물과 균열은 물론, 인물 모형까지.
모든 걸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어있었다.
회의장을 둘러본 원유선은 조금 놀랐다.
‘독한 놈들. 한 명도 안 빠지고 다 왔잖아?’
다들 똑같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 자리에 불참하면 불리하다고.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김도경이 회의를 주재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말을 끊었다.
“잠깐만. 회의 시간은 처음부터 이때로 잡았다던데? 우리가 그전에 못 나왔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죠?”
원유선과 함께 균열에 들어갔던 <가디언> 길드의 마스터였다.
대놓고 공격적인 자세였다.
작전 회의에 참가한 이들은 모두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저놈은 또 왜 저래. 아까 균열에 정신을 놓고 나왔나?’
원유선도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방금 전까지 싸우고 와서, 흥분이 안 가신 모양이었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그럴 수 있었다.
김도경이나 자기나 같은 S급인데, 할 말 못 할 건 뭐냐는 식으로 생각했겠지.
그들은 특수안보부의 무서움을 몰랐으니까.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것이다.
그러나 김도경은 너그럽게 웃었다.
“양해해 주시죠. 워낙 시간이 급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는 입으로만 미소를 지었고, 눈빛에는 냉기가 흘렀다.
그걸 눈치챈 사람은 별로 없었다.
회의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현재 남아있는 균열은 S급 3개.
<지옥 광산>, <크로노스의 미궁>, 그리고 <심연의 부름>.
다행히 아직까지 추가 균열은 안 터졌다.
사람들은 무심코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무의식적으로 그가 해결책을 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건우는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이 탁자 위 모형으로 올라갔다.
모든 시선이 한건우의 손끝으로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