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저랑 일 좀 합시다
권석진의 뒤를 밟으면서, 한건우의 머리가 점점 차갑게 식었다.
‘아직도 내가 순진했나?’
한건우는 이제껏 잘 해왔다고 믿었다.
길드장 회의에서 분위기를 이끌었고, 대통령과 직접 협상을 했다.
작전 회의에서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첫 회의에서 낸 의견도 잘 먹여 들어가고 있었다.
이러면 정부 측과 길드 측은 대등한 목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원래 특수안보부는 작전 배치를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던가.
교묘하게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각성자들을 죽음으로 모는 방식으로 말이다.
작전 회의를 오픈하는 것만으로, 특수안보부의 횡포를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건 오산이었다.
그들은 그 정도로 상식적인 조직이 아니니까.
‘진짜 작전은 따로 진행하고 있었어.’
이능력 특수전단의 간부들을 이용해서, 이참에 일부 각성자들을 제거하려는 것 같았다.
그들로서는 참으로 편리한 아이디어였다.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아무 의심받지 않고 각성자를 암살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
‘김도경··· 내 말을 순순히 들어준 이유가 있었군.’
한건우는 결심했다.
이번에 만주 땅에서 반드시 김도경을 잡겠다고.
바로 그들이 잘 쓰는 방법으로 돌려줄 것이다.
한건우가 권석진의 그림자 속에서 미소지었다.
그러나 한건우는 곧 고개를 갸웃했다.
권석진의 행보가 생각과는 달랐다.
‘왜 자기 부대 막사로 돌아가지 않지?’
이곳은 행동이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언제든 균열 사고가 터질지 모르니, 대부분의 각성자들이 개인행동을 자제했다.
그런데 권석진은 뜻밖에 황무지 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새벽의 황무지는 으스스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권석진은 중간에 슬쩍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따라오는 사람이 없나 주의 깊게 살피는 듯했다.
‘산책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고.’
권석진 분대장이 이렇게 비밀이 많은 사람인 줄이야.
권석진은 꽤 멀리까지 갔다.
작은 언덕을 몇 개 지나, 이제 돌아보아도 막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한건우는 인내심을 가지고 조용히 따라갔다.
‘어?’
권석진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품에서 위성전화를 꺼냈다.
기지국 위치와 상관없이 전 세계 어디든 통신할 수 있는 장비였다.
한건우에게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이능력 특수전단의 보급품이었으니까.
‘전화 통화를 하려고? 여기까지 와서?’
태도를 보면 대단히 비밀스러워 보였다.
오히려 김도경과의 만남보다도 더 숨기고 싶은 눈치였다.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은 통화라···.
설마 원치 않게 권석진의 사생활을 듣는 건 아닐까.
한건우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이었다.
[삐비빅.]
권석진은 위성전화에서 칩을 꺼내서 바꿔 끼웠다.
채널이 바뀌는 것 같았다.
‘저런 기능이 있었다고?’
저 위성전화를 그렇게 오래 썼는데.
자신이 모르는 기능이 있었다니.
권석진이 누군가에게 통화를 걸었다.
그는 아직도 경계를 놓지 않고 연신 주위를 살폈다.
‘전임 대장님, 뭐가 그렇게나 비밀이십니까.’
한건우는 그를 엿보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 실망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권석진이 엄숙하게 부르는 이름을 듣고, 한건우는 머리를 맞은 듯했다.
“각하, 권석진입니다.”
[권 분대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정남준 대통령이었다.
‘...?’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한건우는 당황스러웠다.
“통화가 여의치 않아 빠르게 보고하겠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말씀해 주시죠.]
들어보니 이런 통화가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조금 전, 김도경이 저를 개인적으로 불러서 지시를 내렸습니다. 자신이 지정하는 각성자를 암살하라는 겁니다.”
[허··· 그 암살 대상은 누굽니까?]
대통령은 몹시 분노한 듯했다.
“알파스의 길드 마스터, 박이경입니다.”
[S급을···?]
“맞습니다.”
‘!’
한건우의 눈이 커졌다.
그가 빠르게 머리 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권석진 분대장은 일종의 이중 첩자인 거야.’
권석진의 입지는 상당히 복잡했다.
소속은 군 소속이지만, 특수안보부의 직속 부대 취급인 이능력 특수전단의 분대장.
권석진은 특수안보부 서울지부장 김도경의 끈을 잡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정남준 대통령에게도 선을 대고 있는 것이다.
‘....’
아무리 유력한 차기 대장이라지만, 대통령과 직통 라인이 있는 줄은 몰랐다.
권석진이 새삼 다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알던 권석진은 가짜였을까?
가짜까지는 아니라면, 자기가 본 실체는 몇 퍼센트 정도였을까?
한건우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고생 많으십니다.]
권석진은 대통령이 먼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가 위성전화를 품에 집어넣고, 담배를 꺼냈다.
권석진은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불은 붙이지 않았다.
‘여전하군.’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권석진은 밤 시간에 야외에서 담뱃불을 피우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자신의 위치가 파악된다고 생각했다.
뭔가 고민이 있어 담배를 피우고 싶지만 참고 있다는 소리였다.
파앗!
한건우가 갑자기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마창 게이볼그를 어깨에 기대어 들고 있었다.
“!”
권석진이 기절할 듯이 놀랐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스치잉-!
권석진이 순식간에 허리에 차고 있던 클레이모어를 뽑았다.
쉬익!
권석진이 클레이모어를 가로로 휘둘렀다.
치잉! 프스스···.
한건우가 창대로 클레이모어를 흘려냈다.
마찰 부분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들의 시선이 부딪쳤다.
권석진은 뛰어난 A급 마검사였다.
흔히들 마검사 클래스는 이도 저도 아니라고들 했다.
실제로도 마검사는 중급 수준에도 이르기 어려웠다.
그 살아있는 예외가 바로 권석진이었다.
[특성 발동 : 압축 공기탄]
투두두둥-
쉬이익! 스칭-!
공격 마법과 훌륭한 검술의 조합.
마치 검사와 마법사로 이뤄진 두 명의 적과 동시에 싸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건우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한건우는 창을 가볍게 돌려가며 권석진을 상대했다.
한때 권석진은 한건우의 상사이자 스승이었다.
그는 한건우에게 직접 창술과 검술을 알려주기도 했다.
터엉-!
권석진이 내리친 클레이모어를 한건우가 정면으로 막았다.
그때부터는 완력의 대결이었다.
“으으으···.”
권석진은 이를 빠드득 갈며, 한건우를 죽일 듯 노려왔다.
힘껏 대치한 채였다.
“언제부터, 미행했나?”
“그게 왜 궁금합니까.”
권석진이 보기에, 한건우는 얄미울 만큼 태연해 보였다.
‘역시 S급···!’
권석진은 아득한 실력 차이를 느꼈다.
혼자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느꼈다.
‘한건우 플레이어··· 나를 봐주고 있어?’
그 증거로 한건우는 자신의 강력한 화염 마법 같은 걸 전혀 쓰지 않았다.
뿌득.
권석진이 이를 깨물었다.
‘이놈도 특수안보부의 끄나풀이었나···. 잘못 걸렸군.’
권석진은 한건우에게 자신의 뜻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는 A급이고 한건우는 S급이었지만, 역전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강한 자가 어이없이 패배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방심할 때지.’
이제까지 압축 공기탄은 권석진에게서 바깥쪽으로만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반대로 멀리서 이쪽으로 끌어당기는 법도 가능했다.
피이이잉-!
멀리서 압축 공기탄이 날카롭게 송곳처럼 응축되어 날아왔다.
한건우의 등 뒤를 노린 것이었다.
투우웅···.
“!”
한건우는 구태여 피하지도 않았다.
놀란 것은 반대로 권석진 쪽이었다.
‘내 압축 공기탄을 그냥 견뎌냈어?’
사실 견뎌냈다는 것도 과도한 표현이었다.
한건우는 긴장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저 흰 갑옷··· 뭐지?’
권석진은 그제야 한건우의 방어구가 남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한건우가 씩 웃었다.
“그걸로 뚫리겠습니까?”
[특성 발동 : 검풍]
차아악!
한건우의 창에서 별안간 칼바람이 몰아쳤다.
“으윽!”
권석진이 압축 공기탄을 허공에 얕게 펼쳤다.
충격을 흡수하려는 모양이었다.
원래 방어 계열의 특성이 아니니, 한계는 있었다.
권석진은 온몸에 찰과상을 입었다.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챙! 치이잉! 터엉!
그는 오히려 더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데.’
한건우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검풍>을 압축시켜서 한 점에 집중했다.
창과 클레이모어가 만나는 부분에서 빛이 번쩍였다.
쩌어엉-!
‘무기 파괴술.’
“안돼!”
권석진이 절망한 얼굴로 신음했다.
그의 클레이모어가 산산조각났다.
얇은 살얼음 위에 돌덩이를 떨어뜨린 것처럼.
트드드···.
권석진은 한순간에 무기를 잃었다.
권석진이 손잡이를 놓고 옆으로 굴렀다.
한건우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였다.
터억!
“윽!”
한건우는 그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던 듯, 권석진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인간이 발로 찬 게 맞는지.
어마어마한 충격이 닥쳐왔다.
권석진이 거의 메다 꽂히듯이 쓰러졌다.
그의 눈이 텅 빈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건우는 권석진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의 얼굴에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나로서는 예측하는 게 당연하지.’
한건우는 권석진의 모든 행동이 교과서처럼 읽혔다.
권석진과 대련을 해본 게 한두 번이던가.
그의 모든 습관과 체술은 훤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걸 기억하는 건 한건우뿐.
권석진은 자신의 움직임이 낯선 한건우에게 속속들이 읽힌다고 느낄 것이다.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타앗!
권석진이 꿋꿋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날 죽이러 온 것 같군.”
“....”
권석진이 한건우를 노려보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한건우 플레이어, 역시 당신도 그 각성자 우월주의자들과 한 패였나···.”
“...음?”
한건우가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권석진의 눈빛이 형형했다.
권석진은 특수안보부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의 악이었다.
방금 김도경과 독대했을 때도, 그를 해치워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남을 원망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권석진은 괴로웠다.
‘내가 죽인 미등록자들··· 내가 죽인 각성자들···.’
그들은 과연 모두 죄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 작전을 하다가 죽은 부하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권석진은 확신하고 있었다.
김도경이 자신의 부하를 이용한 뒤, 헌신짝 버리듯 죽여 버렸다고.
그는 마지막 분노를 끌어모아, 압축 공기탄을 응축했다.
눈앞에 서 있는 한건우가 김도경을 대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권석···.”
투두두두···!
반 박자 빠르게, 압축 공기탄이 쏘아졌다.
권석진은 한건우의 머리 부분을 노렸다.
온몸이 갑주로 가려져 있어, 드러나 있는 게 머리뿐이었기 때문이다.
[특성 발동 : 믿음의 방패]
한건우가 물리 방어 특성을 펼쳤다.
아군 전체에 작용하는 특성이지만, 지금의 적용 대상은 오직 한건우 하나뿐.
‘이걸 방어한다고?’
권석진은 믿을 수 없었다.
단순한 패시브 스킬이라기엔 너무 강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한건우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파앗!
동시에 한건우가 권석진의 바로 앞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권석진의 목덜미를 붙잡고 바닥으로 꽂았다.
퍼억!
“크윽.”
“권석진 분대장님. 사람 말을 끝까지 들읍시다. 예?”
“으으···.”
한건우가 꿈틀거리는 권석진을 내리눌렀다.
나름대로 다치지 않게, 겁 주지 않고 제압하려고 했는데.
‘그냥 실컷 두들겨패고, 차은비 씨한테 치료해달라 할걸 그랬나?’
한건우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분대장님, 저랑 일 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