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거울의 숲 (3) - 국가의 적
숲 바깥쪽에는 군인들이 도착해 있었다.
후발대로 들어온 이들이었다.
각성자 군인들은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균열 공략 메시지가 떴다.
그건 전투를 안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하루를 날로 먹게 된 군인들은 진심으로 환호했다.
“우와아!”
“거 길드 놈들··· 회의 때 투닥대면서 시끄럽게 굴더니만 실력은 좋네.”
간부들도 싱글벙글했다.
당연히 3개의 길드가 힘을 합쳐서 균열을 공략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곧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러분 셋이서 이 균열을···?”
“그렇게 됐습니다.”
임진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드래곤은 은설아가 어르고 달래서 겨우 아공간에 숨겨놓은 상태였다.
아레스 길드가 드래곤을 가진 게 극비 사항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부 측에 전력을 자세히 노출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쪽은···.”
군인들이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기사단>과 <홍염>의 길드원들이었다.
그들은 보기 흉한 모습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들의 몸에는 거목의 잔뿌리가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나무에게 산 채로 영양을 흡수당한 모양이었다.
“일단 뿌리는 대충 자르기만 했습니다. 뿌리를 뽑아내려다가 더 다칠까봐요.”
임수호가 부연 설명을 했다.
그들은 체액이 쪽 빨려나가 마른 멸치처럼 보였다.
어쨌든 숨은 붙어있으니 다행이었다.
“사, 살··· 려···.”
정부군의 힐러 의무병들이 붙어서 응급처치를 했다.
“다 데리고 나가려면 한참 걸리겠어.”
의무병들이 볼멘 소리를 했다.
“아니, 이 사람들 자신있게 앞장 서서 들어가더니만···. 뭐 하다 이렇게 형편없이 당한 거랍니까? 뭐 엄청 센 놈이라도 나왔나요?”
군 간부가 혀를 끌끌 차며 임진호에게 물었다.
회의장에서 본 걸로 내적 친분이 생겼는지, 말투가 스스럼없었다.
“도플갱어가 나왔습니다.”
“도플갱어요?”
다른 군인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뒤에서 엿듣고 있었다.
비교적 새로 생긴 아레스 길드는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다.
군인들도 호기심이 들었던 것이다.
경험 없는 신참들은 도플갱어라는 말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고참들은 달랐다.
‘아레스 길드··· 도플갱어가 나오는 균열을 아무 희생자 없이 깼다고?’
‘운이 좋았나? 그렇다기엔···.’
도플갱어가 나오는 균열은 유난히 까다로웠다.
이유는 단순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이라도 도플갱어가 아군 속에 숨어드는 데 성공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다 보면 모두 노이로제에 걸리기 마련.
종국에는 아군끼리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일도 많았다.
‘도플갱어가 나오는 균열이라면··· 경력 있는 정부군 한 부대가 몰살된 적도 있어.’
그 얘기를 아는 고참들은 진땀을 흘렸다.
군인들은 새삼 임진호 형제와 은설아를 다시 보았다.
‘아레스 길드··· 한건우와 차은비가 없어도 엄청나게 세구나!’
군 간부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게다가 아레스 길드원들은 모두 어린 편이었다.
각성자 세계에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길드끼리 모이는 자리에서 이들을 은근히 깔보는 걸 봤다.
‘이제 그런 일은 다시는 없겠구만.’
균열 입구 바로 앞.
차은비가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
A급 균열 공략 완료 메시지가 떴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여기로 왔다.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마냥 쉴 수만은 없었다.
“차은비 씨!”
“다친 사람은요?”
맨 앞에 나온 사람은 임진호였다.
차은비의 눈이 빠르게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저는 괜찮···.”
“괜찮은 게 아니네요.”
그녀의 손에서 흰 빛이 솟아났다.
언제 봐도 성스러운 광경이었다.
임진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감사합니다.”
“어디다 세게 박았죠? 미세골절이 많아요. 이러고 걸어 나왔다구요?”
차은비가 질책하듯이 말했다.
“그야··· 별로 안 아파서요.”
그 말을 들은 차은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임진호의 특성은 <일점돌파> 아닌가.
미세골절 정도의 충격은 흔했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기도 하고.
샤아아아···.
차은비의 손에서 나온 회복의 기운이 임진호의 온몸 구석구석 새어들었다.
“저, 언니.”
“응?”
은설아가 쭈뼛쭈뼛 말을 걸었다.
“우리 검둥이 좀 치료해주세요···.”
샤벨 타이거가 한쪽 발을 절고 있었다.
군 의무병들에게 조금 치료를 받긴 했지만,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차은비가 샤벨 타이거의 다리를 만져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잘못 붙였네. 이거 군대 힐러들이 했지?”
“네···.”
부러진 뼈가 똑바로 붙지 않고 살짝 엇나가게 붙어 있었다.
‘군대 힐러들 수준이 이렇지 뭐!’
차은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 제대로 붙이려면, 샤벨 타이거의 다리를 다시 부러뜨렸다가 붙여야 했다.
그걸 도와줄 사람은 안 보였다.
임진호도 완력은 좋지만, 섣불리 샤벨 타이거에게 접근했다가 뒷다리로 차일까 걱정되었다.
“이건 지금은 안 돼. 한건우 씨 오면 다시 치료하자.”
“네.”
은설아가 샤벨 타이거를 꼭 안아주면서 물러났다.
“저, 차은비 씨. 건우 형은 어디 있나요?”
임수호가 목을 길게 빼고 한건우를 찾았다.
한건우 앞에서 뿌듯하게 전황을 보고하고 싶었다.
“그게, 나도 몰라요.”
차은비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
한건우는 차은비에게 말도 없이 막사를 몰래 빠져나갔다.
6시간의 휴식 시간.
순수한 휴식으로 날릴 수는 없었다.
빨리 알아내야 할 게 있었다.
‘이능력 특수전단도 잠잠하고··· 권석진 분대장도 안 보여. 대체 뭘 하는 거지?’
이능력 특수전단은 분명히 특수안보부와 함께 만주에 출동했다.
그러나 막상 보이는 건 평범한 각성자 군인들뿐.
문제의 그 부대는 균열 근처에서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이건 회귀 전과 다른 것 아닌가···?’
회귀 전에는 이능력 특수전단도 다른 군부대와 손발을 맞추어 활동했다.
국가 비상사태니까 당연하다 생각했다.
기억을 되새기던 한건우는 이상한 점을 떠올려 냈다.
‘그때도··· 대장이나 분대장 같은 간부들은 자리를 비우고 잘 안 보였지 않나?’
당시 한건우는 일개 대원일 뿐이었다.
이능력 특수전단이 마수들과 싸울 때를 돌이켜보았다.
가장 중요한 전력인 대장과 분대장이 자주 자리를 비웠다.
그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도 없었다.
남은 대원들이 힘겹게 싸우며 욕지거리를 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는 영문도 모르고 받아들이기만 했지만, 이제 보니 뻔한 일이었다.
‘간부들은 다른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거야.’
부하 대원들에게까지 비밀로 할 정도면, 떳떳한 명령은 아닐 것이다.
한건우의 관심의 초점은 한 사람에게 모였다.
이 넓은 만주 땅에서 단 한 명.
이능력 특수전단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특수안보부 서울지부장, 김도경.’
한건우는 특수안보부의 막사로 접근했다.
그들만 다른 막사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예상대로 철통 같은 보안이었다.
특수안보부 소속 각성자가 순찰을 도는 게 보였다.
하지만 한건우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특성 발동 : 그림자 맹시]
[특성 발동 : 침묵]
한건우는 상대의 눈과 귀를 속일 수 있었으니까.
<그림자 맹시>로 눈을 속이고, <침묵>으로 발소리와 미세한 진동마저 죽인다.
각성자의 뛰어난 오감으로도 도저히 감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 땅에 한건우가 숨어들지 못할 곳은 없었다.
스으윽···.
그림자 속에 숨어든 한건우가 지나쳐도,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수안보부의 막사 안은 병적으로 깔끔해 보였다.
한건우는 여러 겹의 천막과 가벽을 지나쳤다.
“그래요. 내 말 알아듣겠죠?”
마침내 김도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핏 듣기에는 웃음기 어린 자상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실체는 소름 끼치도록 무감하고 잔인했다.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
한건우가 멈칫했다.
바로 그가 찾던 권석진이 있었다.
아직 대장도 아니고 분대장인 그가, 왜 김도경과 독대하고 있는 걸까.
김도경은 깨끗한 셔츠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최상급 균열에 들어가서 싸웠는데.
그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해 보였다.
권석진 분대장은 그 앞에 엄숙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아래 대원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면 되겠습니까?”
서류를 따라 내려가던 김도경의 손끝이 멈추었다.
김도경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드려야 합니까? 답지 않게 왜 이러죠?”
“아, 아닙니다. 가보겠습니다.”
권석진 분대장이 황급히 돌아서려 했다.
한건우는 괜히 기분이 언짢았다.
권석진은 과거 자신이 롤모델로 존경하던 남자였다.
어디서나 자신감 있고 거침없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던가.
그런 권석진도 김도경 앞에서는 일개 하수인에 불과했다.
‘당연한 거지만···.’
쩔쩔매는 권석진을 직접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잠깐.”
“예?”
김도경이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대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그런 게 걱정됩니까?”
“....”
“권석진 분대장님, 생각보다 순진하시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권석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국가의 적, 범죄자들이라서 처단한다고 하세요.”
“!”
김도경은 제법 명쾌하게 대답을 냈다.
권석진 분대장이 못박힌 듯 멈추었다.
“사회를 혼란시키는 각성자들을 처단하는 거, 그게 이능력 특수전단 역할 아닙니까?”
“...맞습니다만.”
권석진 분대장의 얼굴은 아직 혼란스러워 보였다.
김도경이 나른한 태도로 설명했다.
“그럼 잘 됐네. 특수안보부의 적은 국가의 적 아닙니까. 국가의 적이면 이적죄에 범죄자가 확실하지. 안 그래요?”
“맞습니다.”
“분대장 중에서 당신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가 파다해요. 그걸 믿고 시키는 일입니다. 알겠어요?”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권석진 분대장의 대답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갈등을 털어버린 모양이었다.
권석진 분대장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때 김도경이 미소를 지었다.
“잘 해내 봐요. 군대에서는 일만 잘하는 사람이 승진하는 건 아니라지만, 나는 그래야 된다고 믿으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권석진 분대장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가 돌아서서 막사를 나갔다.
‘이게 무슨 소리지. 대체 누굴 처단한다는 거야.’
김도경이 승진을 걸고 권석진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건 부대를 동원할 명분이 없는 일이라는 걸.
문제를 일으킨 각성자나 범죄자가 아니라, 단순히 자기들이 보기에 거슬리는 자를 죽이려는 것이다.
‘뭐, 하나도 놀랍진 않군.’
특수안보부가 그런 놈들이라는 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번에 죽이려는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한건우가 말 그대로, 권석진의 그림자에 숨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