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94화 (94/238)

#94거울의 숲 (2) - 브레스와 가장 가까운 것

맑은 연못은 겉보기보다 훨씬 깊었다.

임수호는 순식간에 깊은 곳으로 빨려들듯 내려갔다.

‘이상해!’

꾸르르륵···.

그의 입에서 거품이 일었다.

‘물이 아니야.’

임수호가 허우적댔다.

연못을 가득 채운 건 물보다 훨씬 묵직한 액체였다.

투명한 점액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임수호는 액체 속에서 눈을 뜨려 애썼다.

힘겹게 눈을 뜨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거울···?’

임수호와 똑같이 생긴 한 사람이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도플갱어다!’

-임, 수, 호?

도플갱어가 이름을 외우듯이 입술을 움직였다.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꼬르르륵···.

‘안돼.’

임수호의 머릿속이 뒤엉켰다.

매운 액체가 비강 속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 뇌에 손을 넣고 휘젓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임수호!’

임수호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었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다.

‘내가 건우 형이라면···?’

임수호는 숨을 참고 망토 안주머니에 힘겹게 손을 넣었다.

전륜성왕의 구슬이 만져졌다.

임수호가 구슬을 꽉 쥐었다.

스으으으···..

치지지직!

그의 몸 아래에서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어? 저건···.’

임수호가 뭔가를 발견했다.

*

드드드드!

파아앗!

임수호의 몸이 수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수호야!”

임진호가 연못 근처로 달려갔다.

“연못을 보면 안 된다구요!”

은설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풍덩!

임진호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수했다.

“으읍.”

몸이 무거웠다.

갑주 때문은 아니었다.

뻑뻑한 크림 속을 헤엄치는 느낌이었다.

임진호는 오로지 감각에 의지해서 기절한 임수호의 목덜미를 잡고 건져 나왔다.

“수호야!”

“허억!”

임수호가 코와 입에서 물을 뿜으며 눈을 떴다.

“어이없게 죽을 뻔했네··· 미안.”

임수호가 엉망이 된 얼굴로 멋쩍게 웃었다.

그는 그 상태에서도 전륜성왕의 구슬을 꼭 쥐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요!”

은설아가 손짓했다.

임진호는 정신없는 동생을 끌고 설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저게 <거울 연못> 같아요. 절대 수면을 쳐다보지 마세요.”

“보면 어떻게 되는데?”

임진호는 헬맷의 얼굴 가리개를 내렸다.

연못에서 뭐가 튀어나올까 경계하며, 사선으로 등지고 섰다.

“거울 연못을 들여다보면 도플갱어가 생겨날 수 있으니까요.”

임진호는 흠칫 놀랐다.

“그럼 기사단이나 홍염 길드원들도 저 연못을 본 건가?”

“아마도요.”

임진호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이렇게 깊이 들어왔다면, 지금은 어디 있는 걸까?

근처에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임수호가 중얼거렸다.

“나, 그 도플갱어··· 이미 생긴 것 같아···.”

임수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은설아는 태연했다.

연못을 홀린 듯 들여다볼 때부터 예상했던 바였다.

“걱정 마세요! 어차피 도플갱어는 본체보다 훨씬 약하거든요. 나오면 바로 잡으면 돼요.”

“그럼 다행이네.”

“그런데, 도플갱어가 본체와 똑같은 힘을 얻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뭔데?”

“도플갱어가 본체를 죽이면 그렇게 된대요.”

“....”

분위기가 잠시 무거워졌다.

임수호는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희소식이야.”

“네?”

“적어도 홍염과 기사단 길드 마스터는 아직 살아있다는 거지. 겉보기에만 비슷하고 실력은 형편없었잖아?”

“그러네요.”

은설아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그런 사람들이 죽든지 살든지 별로 상관 없었다.

그때 임진호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처억!

임진호가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진호 오빠?”

“혀, 형? 왜 그래?”

임진호가 겨눈 메이스는 동생 임수호를 향하고 있었다.

“하나 시험해 보자.”

“...?”

임진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의심받기 싫으면 바로 대답해.”

“어··· 알겠어.”

임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확인하는 게 당연했다.

“예전에 어떤 마수 때문에 내가 팔을 잃었지. 그 마수는 뭐였을까?”

임진호가 질문했다.

일부러 조금 옛날 얘기로 골랐다.

“악마종 헬하운드잖아.”

임수호가 쉽게 답변했다.

임진호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이번엔 더 옛날 이야기로.

“어릴 적 우리가 살던 보육원에, 네가 짝사랑하던 여자애가 있었어. 그애 이름이 뭐지?”

“지윤이··· 한지윤.”

임수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은설아의 두 눈이 커졌다.

‘설마 지윤 언니? 우리 마스터 여동생?’

임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가 가차없이 메이스를 휘둘렀다.

슈웅-.

임진호의 메이스가 허공을 갈랐다.

빗나간 것이다.

쿠구국···!

“악!”

은설아가 비명을 질렀다.

놀란 임수호가 자기 가슴을 내려다봤다.

등 뒤에서 공격받아 몸통이 뚫렸다.

얼음의 창 끄트머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

아니, 그건 임수호가 아니었다.

임수호의 모습을 한 도플갱어가 무너져 내렸다.

“와, 남의 기억 가지고 막 헛소리를 하네!”

도플갱어에게 버럭 성질을 내며, 진짜 임수호가 나타났다.

그는 온몸이 액체에 젖은 채였다.

“수호야!”

굳어있던 임진호의 얼굴이 풀렸다.

“역시 형이야. 도플갱어가 거짓말을 하니까 딱 알아보네.”

“거짓말이라니?”

“지, 지윤이 얘기 말야.”

임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거짓말은 무슨. 넌 그거 절대 인정 안 하잖아. 순순히 대답하길래 아닌 줄 알았지.”

“....”

임수호의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망할 도플갱어!’

기억을 빼간 도플갱어 때문에 괜히 약점만 털린 셈이었다.

사실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임진호는 첫 번째, 악마종 헬하운드에 대한 질문부터 확신했다.

진짜 임수호라면 죄책감에 임진호의 눈을 피했을 것이다.

가짜의 눈빛은 태연하고 평온하기만 했다.

도플갱어의 한계였다.

기억은 속속들이 베꼈지만, 마음까지 흉내내지는 못했다.

“이제 그 나무를 찾아서 부수면 끝인가.”

임진호가 중얼거리자, 임수호가 나섰다.

“저 연못부터 처리하자.”

임수호가 전륜성왕의 구슬을 힘껏 쥐었다.

[특성 발동 : 빙정난류]

콰과과과···.

거울 연못을 채운 액체가 요동쳤다.

파도 치는 모양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제 도플갱어가 더이상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거울 연못 속에서 보았다.

‘이 연못은 나무 뿌리와 직접 연결되어 있어.’

그때 엄청난 타격음이 들렸다.

우지끈··· 콰앙!

집채만한 나뭇가지가 탄력 있는 채찍처럼 땅을 내리친 것이다.

“뭐야!”

키에에엑!

놀란 그리핀이 푸드덕거렸다.

끄으으으···.

우우우···.

숲 전체가 울부짖는 듯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등을 맞대고 모여섰다.

<고대 정령신의 나무>.

고층 빌딩만한 거목이 화가 난 것처럼 꿈틀거렸다.

울퉁불퉁한 나무둥치 한가운데, 사람의 얼굴처럼 생긴 형상이 생겨났다.

불길하게 빛나는 두 눈이 번뜩, 떠졌다.

그어어···.

나무의 입이 무저갱처럼 쩌억 벌어졌다.

“나무라고 하더니··· 거인이나 다를 바 없잖아!”

“수호야, 피해!”

고대 정령신의 나무는 굵은 나뭇가지를 팔처럼 휘둘렀다.

그 속도도 매우 빨랐다.

터어엉!

굵기가 한아름이 넘는 나뭇가지가 그들이 서 있던 땅을 내리쳤다.

“아악!”

은설아가 비명을 질렀다.

샤벨 타이거가 공격에 맞은 것이다.

크르르···.

샤벨 타이거가 고통의 신음을 뱉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절뚝거리면서 좀처럼 걷지 못했다.

임진호가 지시했다.

“설아야! 넌 위에서 날면서 나뭇가지를 공격해. 수호 너는 뿌리 쪽을 공격하고!”

임진호는 저 나무의 중심을 정면으로 파고들 생각이었다.

“알겠어요!”

은설아는 그리핀에 올라타 날아올랐다.

그러나 사방에서 촘촘한 나뭇가지가 엉겨왔다.

“앗··· 뭐야!”

나뭇가지가 움직이면서 그리핀의 날개에 얽혔다.

그리핀이 아무리 퍼덕여도 날 수 없었다.

드래곤은 남의 일처럼 구경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연못 근처에 한가롭게 앉아서 쉬고 있었다.

주둥이를 쩍 벌리고 하품을 하기도 했다.

“형, 잠깐만 날 지켜줘.”

임수호가 바닥에 한 손을 대고 무릎을 꿇었다.

쉬이익!

가늘고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사방에서 임수호를 노리고 휘어졌다.

마치 여러 갈래로 된 채찍 같았다.

임진호가 아다만티움 방패를 치켜들었다.

치잉-!

그의 검은 방패 위, 바실리스크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위협적으로 움직이던 나뭇가지가 허공에서 잠깐 멈추었다.

임수호는 얼어붙은 연못에서 나무뿌리로 연결되는 맥을 느끼고 있었다.

임수호가 눈을 감고 더욱 집중했다.

치지지직···.

연못 아래, 나무뿌리의 수관이 얼기 시작했다.

뿌리의 수관을 타고, 줄줄이 얼음 결정이 생겨났다.

뿌리가 얼기 시작한 것이다.

액체는 얼면 부피가 커지기 마련.

얼어붙은 나무뿌리는 급기야 터지기 시작했다.

그워어어어-!

고대 정령신의 나무가 입을 크게 벌렸다.

몸이 얼어붙는 통증을 느끼는 듯, 괴로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푸스스스스···..

고대 정령신의 나무에서 나뭇잎이 흩날렸다.

나무는 아직 얼어붙지 않은 위쪽의 가지를 휘둘렀다.

아까보다 더 맹렬한 움직임이었다.

터어엉! 터억!

“으윽!”

임진호의 방패는 사람 몸통만한 나뭇가지와 연신 충돌했다.

다른 손으로는 메이스를 휘둘렀다.

까앙!

그의 전투화가 땅 속 깊이 박혔다.

임진호는 자기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그동안 임수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나무의 속을 얼리고 있었다.

임진호는 더이상 밀려날 데가 없었다.

한계가 온 것 같았다.

‘어떡하지!’

위에서 지켜보던 은설아의 속이 탔다.

드래곤은 오직 한건우의 명령만 따랐다.

은설아의 말은 기본적으로 못 들은 척했다.

기분 내킬 때만 들어주는 편이었다.

“제발, 한 번만.”

은설아가 드래곤을 보며 간절히 빌었다.

드래곤은 딴청을 피우며 하품했다.

그 순간,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드래곤의 콧등을 푹 찔렀다.

보랏빛의 섬광이 번뜩였다.

쉬이이이-

콰과과과아아-!

그때 임진호는 뇌룡의 브레스와 가장 가까운 것을 보았다.

“!”

동생 임수호는 아직도 눈을 감고 땅 속에 집중하고 있었다.

임진호는 순간적으로 동생의 몸을 방패로 보호했다.

콰르르릉···. 콰광-!

모두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폭풍 같은 뇌전이 몰아쳤다.

파지직···. 쿠구궁!

충격은 1차로 끝나지 않았다.

“형, 방금··· 뭐야?”

임수호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치이이익-.

번개를 맞은 나무둥치에서 검은 연기가 솟았다.

펄럭-!

짙은 보라색의 피막 날개가 자신만만하게 펄럭였다.

고대 정령신의 나무는 괴로워했다.

그으으으으···.

나무의 얼굴 부분이 잔뜩 찡그려졌다.

이제 고대 정령신의 나무는 드래곤에만 집중했다.

임진호와 임수호는 안중에도 없었다.

임진호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이 기회야.’

두두두···.

임진호가 투우소처럼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특성 발동 : 일점돌파]

콰과광-!

아다만티움 방패를 든 임진호가 고대 정령신의 나무에 정면 충돌했다.

그는 나무를 베는 도끼 같았다.

우우웅···.

푸스스스스···..

거목이 통째로 울렸다.

남아있던 나뭇잎이 떨어졌다.

아무런 기교도, 기술도 없었다.

그저 순수한 파괴력이었다.

“형!”

임수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무둥치에 박힌 형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갔다.

“으윽.”

임진호는 온몸을 뒤흔드는 격통에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첫째로 아다만티움 방패가 충격을 상당히 상쇄했고, 둘째로는 용갑 방어구가 부상을 막아주었다.

‘아이템이 이 정도인데. 다칠래야 다칠 수가 없어.’

촤악!

임진호가 나무 깊숙히 박힌 방패를 뽑아냈다.

투명한 나무 수액이 피처럼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나무는 죽지는 않았다.

균열 공략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

“명이 길군.”

슈우우-!

드래곤이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멈춰!”

임수호가 외쳤다.

그러나 드래곤이 임수호의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잠깐만!]

은설아가 외쳤다.

드래곤은 언짢은 듯한 눈길로 은설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공격을 멈춘 건 확실했다.

“수호야, 왜 그래?”

“저쪽을 봐.”

임수호가 땅 한쪽을 가리켰다.

방금의 격렬한 전투로, 흙이 상당수 날아갔다.

땅 속에 파묻혀 있던 뭔가가 반쯤 드러나 있었다.

“헉.”

<홍염>과 <기사단>의 길드원들이었다.

그들의 몸에는 거목의 잔뿌리가 박혀 있었다.

죽지는 않았다.

몇몇은 손발을 경련하며 떨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드래곤이 재차 공격한다면, 이들마저 위험할 게 뻔했다.

“내가 해야 해.”

임진호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정령의 나무인가 뭔가가 완전히 쓰러져 죽을 때까지, 일점 돌파를 반복할 생각이었다.

임수호는 형의 의도를 알아챘다.

“형, 잠시만.”

임수호가 다시 한 번 <빙정난류>를 썼다.

아주 효율적으로.

트드드득···

지름만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목.

전부 얼릴 수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건 단지 준비 작업이었다.

아까 <일점돌파>가 명중했던 부분에 맞추어서, 손가락 하나 정도의 두께만.

그 단면을 얼렸다가 녹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임진호가 다시 나무에 돌진했다.

[특성 발동 : 일점돌파]

쿠과과광-!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두 번째라 약한데··· 더 들어갔어.’

미리 점선을 내 놓은 종이를 찢는 것 같았다.

쩌저저적···. 그으으윽···..

“!”

거목이 휘청거렸다.

끼이이이···.

고대 정령신의 나무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균열 전체가 울렸다.

놀란 드래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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