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거울의 숲 (1) - 도플갱어
A급 균열, <거울의 숲>.
끝없이 펼쳐진 흰 사막 한가운데.
거짓말처럼 짙푸른 숲이 보였다.
그 숲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넓었다.
타악!
그리핀이 숲 경계에 착륙했다.
임수호는 얼른 그리핀의 깃털을 놓고 뛰어내렸다.
“숲속으로 들어가야겠지?”
“그렇지. 아마 홍염과 기사단 길드도 저기 있을 거야.”
홍염과 기사단 길드는 10위권 내의 꽤 강한 길드였다.
그런데도 여기서 뭐에 당했는지 구조 신호를 보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숲이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어.’
임수호가 <거울의 숲> 균열의 공략 조건을 곰곰히 되새겼다.
-공략 조건 : 고대 정령신의 나무를 쓰러뜨린다.
“음... 건우 형한테 들은 말 있는 사람?”
“형도 이 균열에 대해서는 잘 모른대.”
“우리 마스터도 모르는 게 있네요.”
“그러게.”
당연한 사실인데도, 새삼 놀라는 분위기였다.
임진호도 동감이었다.
“그래도 건우 형이 이런 말을 하더라.”
“뭔데?”
“지금 우리라면, 이 균열 정도는 문제없을 거라고.”
“와···.”
임수호는 잠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곧 현실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원래 작전대로 했을 때의 얘기 아닐까? 원래는 3개 길드와 군부대가 단체로 공략 들어가기로 했으니···.’
임수호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냐. 해낼 수 있어!’
임수호는 한건우가 준 전륜성왕의 구슬을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이걸 받은 건 바로 어젯밤이었다.
임수호는 구슬에 손을 대자마자 그 가치를 알아보았다.
‘형, 이건···!’
‘넌 지금도 C급이라기엔 너무 강하지만. 이걸 쓰면 거의 A급 법사에 필적할 거야.’
임수호는 감동해서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일단 갖고 있어. 돌아가면 우리 대장장이에게 부탁해서 구슬을 박은 스태프를 만들어달라고 할 테니까.’
‘건우 형···.’
코가 찡해지려고 했다.
그까짓 어린 시절의 인연이 뭐라고.
이렇게 아낌없이 퍼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한건우가 선의를 보일수록, 임수호 형제의 마음은 더욱더 굳세졌다.
‘건우 형을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이곳은 마침 물기가 가득한 숲.
드문드문 작은 연못과 늪지대도 보였다.
임수호의 얼음 마법이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타다닥!
샤벨 타이거가 수풀과 나무 사이로 먼저 질러갔다.
“고대 정령신의 나무라고 했나··· 어디 있을까?”
“난 알 것 같아요.”
뜻밖에 은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임수호가 반색했다.
“응? 어떻게?”
“균열에서 <고대>라는 말이 붙은 건 다 엄청나게 크대요. 그러니까 숲에서 제일 큰 나무를 찾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
임수호는 실망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 넓은 숲에서 제일 큰 나무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뜨듯미지근한 임수호의 반응을 보고, 은설아가 도리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호 오빠. 아까 날아올 때 못 봤어요? 이 숲 한가운데에 엄청 높은 나무가 하나 서 있었잖아요.”
“!”
숲 가운데로 들어가던 그들은 곧 난관을 만났다.
“잠깐만. 우리 한 군데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아.”
“아까 저 나무 봤어요···.”
어느새 숲 바깥은 보이지도 않았다.
높은 나무에 나뭇잎이 빽빽해서, 햇볕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리핀과 샤벨 타이거도 숲속에서 길 찾는 데에는 젬병이었다.
“안 되겠어요. 제가 위쪽에서 보고 올게요.”
은설아가 탄 그리핀이 땅을 박찼다.
푸드득!
끼에엑-!
“엇!”
빽빽한 밀림 같은 나뭇가지 때문에, 덩치 큰 그리핀이 날아오르기가 녹록지 않았다.
“홍염이랑 기사단 길드, 혹시 그냥 길을 잃어서 구조신호 보낸 것 아냐?”
“그러게···. 심지어 이 숲에선 마수도 안 나와.”
그런 합리적인 의문이 든 순간.
수풀 뒤 한켠에서 심상치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투두두···.
임진호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다만티움 방패와 메이스를 들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으헉!”
“사람이다, 사람!”
“잠깐만요!”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반가워하는 듯한 기색도 있었다.
“...?”
방패를 든 임진호가 멈칫했다.
그 뒤에서 임수호와 은설아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레스 길드원들이네! 아깐 실례 많았어요.”
<홍염>의 길드 마스터, A급 홍가영과 그 부하들이었다.
갑자기 눈웃음 치면서 친한 척하니, 거부감이 들었다.
“구조 신호··· 당신이 보내신 겁니까?”
“구조 신호? 우리는 아닌데, 기사단 쪽이려나.”
홍염과 기사단은 원래 앙숙으로 유명했다.
균열 안에서도 따로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경쟁심은 대단했다.
만주 작전에서도 그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처음에는 조심스레 두세 명만 보낸다더니.
한쪽이 출동 인원을 늘리자 다른 쪽이 따라서 늘리면서 점점 인원이 많아졌다.
크르르르···.
샤벨 타이거가 홍염 길드원들을 보며 으르렁댔다.
홍염 길드원들이 주춤했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테이밍된 마수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니까.
임수호는 얼른 은설아의 눈치를 보았다.
마수는 테이머와 감정을 공유하니까.
‘설아가 저 길드에 화가 안 풀렸구나.’
“아하하···.”
홍가영이 어색한 긴장을 풀려는 듯 먼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나가는 길은 찾았어요? 빨리 나가야지, 여기 계속 있다가는 길을 잃겠어.”
“거기, 길드 마스터 홍가영 씨.”
은설아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홍가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응?”
홍가영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 나이가 몇이죠?”
“어? 하하··· 꼬맹이가 지금 무슨 소릴.”
“지금 몇 살이냐고.”
“설아야, 왜 그래?”
임수호가 말리려 하는데, 임진호가 그의 어깨를 턱 잡고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놔두어 보라는 뜻이었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홍가영은 자기 나이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크와아악!
끼에엑!
샤벨 타이거와 그리핀이 홍가영에게 사납게 덤벼들었다.
마수들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무방비한 홍가영을 잔인하게 공격했다.
“설아야! 안돼!”
마침내 은설아가 마수를 시켜서 사람을 공격하고 말았다.
임수호는 기겁을 했다.
그러나 더 놀랄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프스스스···.
홍가영의 몸이 금방 슬라임처럼 녹아내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A급 각성자가 저렇게 쉽게 당할 리가 있나?
“마스터!”
“으아아악!”
좁은 숲속에서 샤벨 타이거가 활약했다.
길다란 검치로 홍염 길드원들을, 아니 슬라임처럼 녹아내리는 마수를 찢어발겼다.
그들이 깨끗이 처리되고 나서, 은설아가 말했다.
“방금, 도플갱어였어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임수호는 입을 딱 벌렸다.
도플갱어는 흔한 마수는 아니었다.
원래 모습은 투명한 슬라임 같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본 사람을 복사해서 흉내내는 재주가 있었다.
본래의 공격력이나 방어력은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사람으로 변신해서 기회를 노렸다가 기습하는 식으로 공격했다.
“들었죠? 아직 균열 공략도 안 됐는데, 나가는 길을 찾잖아요. 그렇게 욕심 많은 사람이.”
“그것만으로?”
“물론 말투나 낌새도 이상했고요.”
“그럼 나이는 왜 물어본 거야?”
임수호는 궁금한 점이 많아서,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도플갱어는 상대방을 훔쳐보고, 최근 몇 시간에서 며칠 동안의 기억만을 복사할 뿐이에요. 그러니 아무리 중요한 정보라도 최근에 생각하지 않은 건 모르는 거죠.”
“그렇구나···.”
임수호는 머리를 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균열의 이름이···.’
바로 <거울의 숲>이었다.
이제 균열 안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처음에 균열에 들어오자마자 홍염과 기사단이 뿔뿔이 흩어졌겠지.’
그것부터가 패착이었으리라.
깊은 숲속.
서로 떨어진 일행들은 도플갱어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 것이다.
각자 반대편 길드를 흉내내며 접근하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테니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여기는 기분 나쁜 곳 같아··· 우리 빨리 균열을 닫···.”
피유웅-!
임수호를 노린 화살이 날아왔다.
“!”
트드드··· 콰직!
순식간에 거세게 뻗어나간 얼음 결정이 화살을 막았다.
거의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눈을 감는 것처럼,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죽어라!”
“사악한 아레스 길드 놈들, 감히 우리 뒤통수를 쳐?”
기사단 길드 마스터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이런···!”
아무래도 그들은 아레스 길드를 흉내낸 도플갱어에게 기습을 당하고 온 모양이었다.
기사단의 길드 마스터, 김온.
A급 궁수인 그가 위협적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그의 화살에 빛이 응축되었다.
“잠깐만요!”
트드드드···.
임수호가 얼음의 방벽을 올리면서 외쳤다.
“저희가 아니에요! 도플갱어가 있다구요!”
“개소리 마라!”
기사단 길드원들이 일제히 습격하려 할 때였다.
콰아아아-!
엄청난 충격파가 주변을 강타했다.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의 몸집은 어느새 그리핀보다 더 크게 자라나 있었다.
“헉, 왜 나왔어!”
은설아가 당황했다.
싫다는 드래곤을 아공간 창고에 꾸역꾸역 넣어놓았지만, 은설아의 마력으로는 끝까지 막기에 무리였다.
드래곤은 은설아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펄럭-!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드래곤 아성체의 날개.
그 한 차례의 날갯짓이 숲속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드··· 드래곤···.”
기사단의 길드원들도 사색이 되었다.
검붉은 빛이 도는 보라색 몸통.
네 개의 다리, 네 개의 날개.
성체 드래곤의 위엄에는 모자랐다.
그러나 더이상 해츨링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애기야.”
드래곤을 올려다보면서, 은설아가 말했다.
“다 죽여 버리자.”
“어, 설아야?”
키야아아악-!
아직 브레스라고 부를 수 없는 포효.
그럼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드래곤은 뇌우가 쏟아지는 구름을 발사한 듯했다.
그 포효가 기사단의 길드원들을 집어삼켰다.
“!”
기사단 길드원인 줄 알았는데, 역시나 도플갱어였다.
그들이 슬라임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녹아내리는 도플갱어의 몸을 맛있다는 듯이 씹어 삼켰다.
“...또?”
임수호는 이제 놀랄 기력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김온 마스터는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으로 활을 당기려고 하길래요. 도플갱어는 거울처럼 반대로 나타나거든요.”
“...그래.”
임수호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특성까지 비슷한 모양새로 흉내내니, 자신은 도저히 구분할 자신이 없었다.
‘대체 진짜 홍염과 기사단 길드원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
“헉, 허억···.”
그들은 거침없이 나뭇가지를 부수며 날아가는 드래곤을 따라가느라 벅찼다.
드디어 드래곤이 멈춘 곳은 숲속의 신비한 연못 근처.
연못의 물은 투명할 정도로 맑았다.
드래곤은 연못 근처에 앉아 기지개를 켜고 쉬고 있었다.
“수호 오빠, 기다려!”
뒤에서 임진호와 은설아가 따라왔다.
연못 앞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무가 얼마나 컸는지, 그 안에 구멍을 파면 사람 여럿이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임수호는 그 나무에 손바닥을 갖다댔다.
[고대 정령신의 나무]
“이거야!”
시스템의 메시지가 보였다.
‘연못의 물을 빨아먹고 자라는 나무였구나.’
임수호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가 홀린 듯이 연못 가장자리로 다가섰다.
연못 안에는 임수호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다.
임수호는 자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수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미소짓고 있었다.
스으으···.
갑자기 수면이 꿀럭거렸다.
연못의 물줄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수호 오빠! 물러나!”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은설아의 경고였다.
물줄기가 크게 일어나더니, 임수호가 연못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