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92화 (92/238)

#92황혼의 서리거인 (4) - 두 번째 석판

균열 공략 메시지를 보고, 쓰러졌던 박이경이 벌떡 일어났다.

“이겼어?”

“어우 정말. 가만히 좀 있어요!”

차은비가 박이경의 팔을 퍽퍽 때리며 성질을 냈다.

‘목뼈가 부러져서 사지가 마비될 뻔한 걸 겨우 붙여 놨더니.’

금세 아무렇게나 움직이려는 게 화가 났다.

“나참. 힐러가 사람 잡네.”

박이경은 툴툴거리면서도 그녀의 말대로 다시 누웠다.

“입도 다물고요.”

차은비의 손에서 은빛의 빛무리가 생겨났다.

<신의 가호>의 빛이었다.

박이경을 치료하는 건 남들보다 배는 힘들었다.

몸집이 크고 신체 조직이 단단해서일까.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워넣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배어났다.

“....”

그런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박이경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뭐예요? 딴 데 봐요.”

“건우 형님 여자만 아니었어도 내가 데려가는 건데.”

“...?”

차은비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박이경이 새끼손가락을 들고 물었다.

“건우 형님이랑 이거 아니었어?”

“....”

박이경이 고개를 들었다.

한건우와 태일제, 김도경조차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음··· 아니면 말고.”

차은비의 손에서 빛이 거두어졌다.

그녀가 홱 고개를 돌리며 가버리자, 박이경이 몸을 일으켰다.

“어, 아직 목이 결리는 것 같은데?”

“알아서 하세요!”

“....”

“....”

한건우와 태일제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왠지 모를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

균열에서 나오니 한밤중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균열 입구에서 보초를 서는 군인들의 얼굴이 밝았다.

현재 만주에 발생한 S급 균열은 5개.

그 중 단 하나라도 공략에 실패해서 기한을 넘기면, S급 균열의 마수들이 이곳으로 넘어오게 된다.

현실적으로 모두 다 성공할 수는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런데···.

‘한건우 플레이어의 전략이 먹혔나.’

원래 정부는 각성자 수십 명으로 이뤄진 정석적인 레이드를 구상했다.

한건우는 그 반대 의견을 밀어붙였다.

극소수의 S급으로만 빠르게 공략하자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일단 첫 균열에서는 성공이었다.

그것도 예상 시간을 며칠이나 단축하면서.

고무적인 일이었다.

한건우를 보는 군인들의 눈빛이 빛났다.

김도경은 군인들에게 보고를 받더니, 이쪽을 돌아보았다.

“저희가 제일 빨리 나왔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새로 터진 균열도 없고요.”

안도할 만한 소식이었다.

“잠시 정비하고 휴식하시죠. 6시간 후에 회의 장소에서 뵙겠습니다.”

“저는 그럼.”

태일제가 먼저 일성 길드에서 온 수행원들과 함께 막사로 돌아갔다.

“고작 6시간 휴식? 엄청난 강행군이군.”

박이경도 뻐근한 뒷목을 문지르더니, 소식을 듣고 마중나온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사라졌다.

한건우는 벌판에 세워진 수십 개의 막사를 바라보았다.

모두 환하게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우리 길드원들은 괜찮을까요? 따라 들어가볼까요?”

차은비가 물었다.

다른 길드원 셋은 A급 균열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S급이 한 명도 없는 대신, 공략 인원이 많았다.

‘우리 길드라고? 언제부터?’

이제껏 차은비가 ‘우리 길드’라고 부르던 건 일성 길드 쪽이었다.

게다가 꿀 같은 휴식을 포기하려 하다니.

한건우는 내심 놀랐다.

“막사로 가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괜찮을 겁니다.”

차은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그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도 많이 지쳐있었다.

“알겠어요.”

“그리고 다음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보상 정리를 해야죠.”

위험이 크면 보상도 큰 법.

S급 균열에서 얻은 경험치와 보상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마 태일제와 박이경이 쏜살같이 사라진 이유도 그거겠지.

아레스 길드에 배정된 막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A급 균열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한건우는 침상에 기대서 메시지 창을 확인했다.

우선 설인 67마리를 잡은 경험치, 그리고 마정석.

각자 맡은 방향의 설인들을 깔끔하게 몰살했기에, 힐러의 몫을 빼면 거의 기여도가 100%에 가까웠다.

그러나 설인 쪽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서리거인은?’

[서리거인의 왕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1,290]

“와.”

솔로 플레이도 아니고 경험치를 나눠먹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역시 S급 균열의 주인은 달랐다.

한건우는 서리거인 왕을 잡은 기여도가 얼마나 될지 추측해 보았다.

아마 자신, 박이경, 김도경, 태일제, 차은비 순서가 아닐까.

한건우가 킬을 땄으니, S급 마정석도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최소 50억원 이상이지.’

금해준이 얼마나 좋아할까.

이 참에 돈을 많이 벌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고 작은 아이템 보상도 쏟아졌다.

[설인의 돌도끼]

[설인 주술사의 약초]

[설인의 털가죽]

...

돌아가면 바로 마켓에 내놓을 물건들이었다.

[서리거인의 왕관(희귀)]

[서리거인의 뿔피리(희귀)]

“그렇지.”

희귀 아이템이 2개나 나왔다.

왕관은 서리거인의 왕이 쓰고 있던 관과 모양이 비슷했다.

한건우는 아이템 창을 띄워서 설명을 보았다.

[서리거인의 왕관(희귀)]

-착용자의 근력 스탯을 5% 강화한다

“!”

착용만 하면 무조건 5% 강화라니.

기존의 스탯이 높을수록 이득이 되는 아이템이었다.

‘지금은 경험치를 쏟아부어도 스탯을 올리기가 어려운데···.’

한 가지 꺼려지는 점은 있었다.

마수의 뿔과 뼈로 장식된 기괴한 디자인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왕관을 써봤다.

스으윽···.

서리거인의 왕관은 알아서 크기가 조정되더니, 스르륵 사라졌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았다.

한건우가 왕관을 벗으려 하자, 그제서야 손에 잡혔다.

‘다행이군.’

한건우는 다시 왕관을 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험삼아 자신이 누워있던 군용 침대의 다리를 잡고 들어보았다.

번쩍, 침상이 시원스럽게 들렸다.

힘을 써보니 5%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느꼈다.

자연히 두 번째 아이템에 손이 갔다.

[서리거인의 뿔피리(희귀)]

-아군의 정신 방어력을 일시적으로 강화한다.

‘이것도 괜찮아.’

정신 계열 방어력은 스탯으로 강화할 수 없었다.

높은 정신력을 타고나던지, 스킬이나 아이템으로 막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신뿐만 아니라 아군 전체에 적용된다.

언젠가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당장 이 다음 균열에서 쓰게 될지도 모른다.

경험치를 스탯에 배분하기 전, 한건우는 멈칫했다.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아이템 때문이었다.

한건우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납작한 금속 판을 꺼냈다.

서리거인의 왕이 이걸 손에 든 채로 잠들어 있었다.

[히든 아이템 : 예언 석판(1/7)]

-???

-???

아무 글자도 없는 새까만 금속 판.

‘대체 정체가 뭐냐.’

두 번째 <예언 석판>이라니.

한건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균열은 회귀 전에도 열리지 않았던가.

3년의 시간차가 있는데도 같은 위치, 같은 이름으로.

한건우도 대원으로 만주 사태에 출동했으니 분명히 기억했다.

‘그렇다면 그때는··· 누가 이걸 가져갔던 거지?’

아무도 못 찾았을지도 몰랐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양도 없는 금속 판에 불과하니까.

균열 어딘가에 방치된 채로 닫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군가 주웠다 해도, 별 일 없이 지나갔을 수도?’

자신도 이미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한건우는 따로 보관하던 아공간 금고 깊은 곳에서, 첫 번째 예언 석판을 꺼냈다.

예전에 아이템 제작자 장영표에게 이걸 보여주기도 했다.

장영표는 석판을 부수지 않는 선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아무래도 예언 석판이라면 글자가 쓰여진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숨겨진 글자를 찾아내려고 할 건 다 해봤습니다. 열도 가해보고, 물이나 용액에도 담궈보고, 마력과 이계 에너지도 쪼여보고··· 심지어 자기공명 영상이나 엑스레이, 초음파까지 돌려봤습니다.’

‘결과는?’

‘아무 것도요.’

장영표는 시무룩한 얼굴로 두 손을 들었다.

‘흠··· 그렇군.’

‘저기, 한 가지 짚이는 건 있습니다.’

‘뭔가?’

‘아이템 창에 [1/7]이라는 표시가 있잖아요. 그건 7개의 조각으로 이뤄진 아이템이라는 겁니다.’

‘조각이라고? 그럼 이런 게 7개 있다는 건가?’

‘그렇죠. 다른 조각을 이어붙이면 숨겨진 메시지가 나오게 설계된 아이템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건우는 고민 끝에 이비현에게도 의뢰했다.

혹시 마켓이나 블랙마켓에 이런 물건이 풀린 게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아직까지 소득은 없었다.

“....”

한건우는 두 개의 예언 석판을 양 손에 들었다.

크기와 모양은 복사한 듯 똑같았다.

둘 다 매끈한 판으로밖에 안 보였다.

한건우는 무심코 예언 석판을 서로 가까이 댔다.

두 석판의 넓은 면이 척 달라붙었다.

“어?”

석판 두 개가 완전히 겹쳐졌다.

다시 떼려고 해도 떼어지지 않았다.

이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한건우가 서둘러 아이템 창을 켰다.

[히든 아이템 : 예언 석판(2/7)]

-황혼의 시간을 멈추는 방법이 담겨 있다

-???

아이템 두 개가 하나로 합쳐졌을 뿐더러, 히든 메시지 중 하나가 풀렸다.

그 메시지가 의미심장했다.

‘황혼의 시간이라고?’

한건우가 알기로, 시스템의 메시지는 말장난을 하는 법이 없었다.

비유적인 표현도 쓰지 않았다.

이 시스템에서 황혼이라는 단어의 뜻은 단 하나뿐이었다.

‘한 세계의 멸망···.’

**

그 시각, A급 균열.

아레스의 길드원 셋은 뒤늦게 균열에 들어가고 있었다.

원래 작전은 이런 게 아니었다.

아레스를 포함한 3개 길드의 연합체와 군부대가 동시에 공략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2개 길드의 마스터가 서로 말을 맞추고, 작전을 바꾼 것이다.

10위권 길드에 속하는 <홍염>과 <기사단>.

서로 아웅다웅하며 경쟁하는 관계였지만, 여기서는 마음이 잘 맞았다.

‘아레스 길드는 빠지쇼.’

‘예? 작전과 다르잖습니까.’

임진호가 나섰지만, 소용 없었다.

‘시간 없으니 솔직히 말할까. 괜히 걸리적거리고 방해되지 말란 소리요.’

‘뭐요?’

‘당신네 길드, 한건우 마스터와 차은비 플레이어 빼면 별 것 없잖아?’

‘....’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기사단과 홍염의 마스터는 둘 다 경험 많은 A급 각성자였다.

아레스에도 같은 A급인 은설아가 있었다.

그러나 어리고 경력이 짧다고 얕잡아본 모양이었다.

‘군부대도 선발대는 됐네. 한 시간쯤 후에 후발로 따라와 주면 고맙겠군.’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이라고 했던가.

그들을 제어할 사람이 없었다.

특수안보부나 군부대 측 각성자들은 팔짱만 끼고 끼어들지 않았다.

흔한 길드 간의 아귀다툼 정도로 보는 듯했다.

잠시 생각하던 임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다만 조건을 하나 붙였다.

‘저희가 안쪽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바깥에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마도구를 가져가시죠.’

기사단과 홍염의 길드 마스터는 서로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손해는커녕 그들로서도 도움이 되는 제안이었다.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딱히 쓸 일은 없겠지만··· 좋소!’

그들은 아룡종의 가죽 팔찌를 여러 개 들고 균열에 들어갔다.

한 짝이 끊어지면 다른 짝도 무조건 끊어져서, 구조 신호를 하는 데 쓰이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호기롭게 들어간 지 단 2시간.

가죽 팔찌가 모조리 끊어졌다.

*

임진호와 임수호, 그리고 은설아는 선발대의 흔적을 쫓아가고 있었다.

“아까 그 사람들 왜 그런 거예요?”

그리핀을 탄 은설아가 날카롭게 물었다.

“아마 균열의 보상 때문일거야. 자기들끼리 가도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다 먹으려고 한 거지. 그래서 군부대도 뒤에 따라오라고 한 거고.”

은설아의 뒤에 얻어 탄 임수호가 설명했다.

“그 사람들, 꼭 살려줘야 돼요?”

푸드득!

은설아의 마음처럼, 그리핀의 날갯짓도 사나웠다.

타다닥···.

모래밭에서는 샤벨 타이거가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중무장한 임진호를 등에 태우고서도 속도가 그대로였다.

“그래도 뭐··· 최대한 살려 놔야지.”

“왜요?”

“앞으로 균열이 더 터진다는데, 초장부터 우리 편이 줄어들면 곤란하니까.”

“우리 편? 그런 사람들이 우리 편이에요?”

그리핀이 거칠게 저공 비행을 했다.

임수호는 헉, 하고 숨을 삼키며 깃털을 꼭 붙잡았다.

“아, 아니··· 그러니까 마수들의 반대 편?”

푸르르!

그리핀이 못마땅한 목울음 소리를 냈다.

‘설아가 많이 화가 났구나.’

임수호는 은설아를 살살 달랬다.

“설아야, 그런다고 사람을 공격하면 안 된다, 알지?”

“안 그래요!”

여차하면 자신이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임수호는 한건우에게 받은 전륜성왕의 구슬을 꼭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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