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황혼의 서리거인 (2) - 설인 사냥
“설인이군.”
한건우는 주변 지형을 살폈다.
사방이 산봉우리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한 숟갈 파낸 것처럼 움푹 들어간 좁은 평지였다.
이 황량한 산지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곳이 없다는 소리였다.
‘포위해서 습격하기에 좋은 지형이군.’
그렇다면 설인들은 다른 방향에서도 나타날 가능성이 컸다.
쿠우우-!
쿠르르르···.
한건우의 추측대로였다.
반대쪽 절벽에서도 돌덩이가 굴러왔다.
‘균열 입구가 이렇게 불리한 지형에 연결되어 있다니.’
웬만한 파티는 들어가자마자 전멸할 것이다.
S급 균열이란 여러 가지로 지독했다.
“포위됐군.”
한건우가 창을 잡으며 말했다.
한건우와 차은비, 박이경, 태일제, 그리고 김도경.
모두 S급 각성자였다.
심지어 4대 길드의 마스터 중 셋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특수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팀이 아닐까.
그들 넷은 차은비를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 각 방향을 보고 서 있었다.
서로 뒤를 지켜주는 모양새였다.
산봉우리의 능선을 따라 시커먼 털로 뒤덮인 설인들이 보였다.
얼핏 봐도 수백이었다.
설인들은 분지를 몇 겹으로 둘러싸 포위망을 이루고 있었다.
쿠르릉···.
쿠르르르···.
설인들은 좀처럼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울음소리도 없이 침묵한 채로 바윗덩이만 굴렸다.
지형의 이점을 살려서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포위망을 깨줘야겠군.’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했다.
타앗-!
가장 먼저 출발한 것은 한건우였다.
그는 바윗덩이가 비처럼 내려오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부우웅-
마창 게이볼그가 화려하게 돌아갔다.
슈욱-! 터엉!
긴 창이 춤을 추었다.
신화급 무구의 창날은 예리했다.
단단한 바윗돌을 갈라도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한건우는 떨어지는 바윗덩이를 두부 베듯이 가르며, 가파른 산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평지를 달리는 것 같은 정면 돌파였다.
분명 아슬아슬한 상황인데, 이상할 만큼 안정적으로 보였다.
타아앗-!
한건우는 금세 설인들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설인들이 무쇠 도끼를 들고 우우 달려들었다.
설인은 식인을 하는 마수였다.
그들의 눈에는 한건우가 간만에 만난 먹잇감으로 보였으리라.
파즈즈즉···.
<인드라의 뇌전>이 창날에 맺혔다.
검은 창날 위에 푸른 뇌전이 감돌았다.
한건우가 맨 앞의 설인에게 창을 내리쳤다.
슈우웅- 파지직!
치지지···.
마른 하늘에 벼락이 내리친 듯했다.
창에 직접 맞은 설인은 재가 되었다.
반경 10미터 안에 있던 설인들까지 기름에 튀겨지듯 튀어올랐다.
한 방에 모두 즉사한 것이었다.
“하핫.”
한건우의 활약을 보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알파스 길드의 마스터, 박이경이었다.
“역시 형님이란 말야.”
박이경이 씩 웃었다.
그가 맡은 방향은 수십 미터의 바위절벽으로 막혀 있었다.
90도가 넘는 각도로 기울어진 절벽은 깎아지른 듯 가팔랐다.
도저히 올라가기 힘들어 보였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기준이었다.
터엉-!
박이경이 땅을 박찼다.
대지가 우지끈 울렸고, 그의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떠올랐다.
[특성 발동 : 신체 강화]
박이경의 온몸이 돌덩이처럼 단단해졌다.
그는 <신체 강화> 특성을 주먹과 손가락 끝에 집중했다.
콰악!
푸스스스···.
박이경이 바위 절벽에 손가락을 박아넣고 매달렸다.
손 잡을 곳을 만든 것이었다.
절벽이 진동하며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그걸 두어 번 반복하자, 그는 벌써 절벽을 반쯤 올라와 있었다.
보기 드물게 몸집이 큰 박이경이었다.
인간보다 마수에 가까운 맹렬한 움직임이었다.
박이경의 머리 위로, 그를 노린 바윗덩이가 비처럼 쏟아졌다.
박이경은 한 손과 발끝만으로 절벽에 매달려, 강화된 주먹을 호쾌하게 휘둘렀다.
부우우-
콰앙-!
설인들이 굴린 바위는 박이경의 주먹 한 방에 산산조각났다.
자갈과 모래 부스러기로 돌아가서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콰직- 콰악-!
박이경은 다시 바위 절벽에 손가락을 박아넣으며 몸을 날렸다.
마침내 박이경도 설인들의 포위망 1선과 충돌했다.
휘익!
무쇠 도끼와 몽둥이가 날아왔다.
“으하핫!”
박이경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신체 강화>를 한 그는 최소한의 방어 동작조차 하지 않았다.
단단한 몸으로 도끼와 몽둥이를 그냥 받아내고, 오로지 공격에만 집중했다.
콰직-! 부우웅-!
박이경의 너클 낀 주먹이 설인의 머리와 몸통을 박살냈다.
바위도 쉽게 부수는 주먹이었다.
박이경의 주먹에 맞는 것보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쪽이 더 충격이 적을지도 몰랐다.
박이경의 체형은 설인과 비슷했지만, 근력은 차원이 달랐다.
그가 거대한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설인들의 머리뼈가 부서지고, 관절이 꺾였다.
단순하고 거친 힘의 향연이었다.
주춤해서 도망가려는 설인들을 박이경은 끝까지 쫓았다.
‘무식해라. 누가 설인이고 누가 사람인지···.’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차은비가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신의 가호>를 펼쳐 박이경을 보조해 주었다.
싫은 건 싫은 거고, 지금 여기서는 필요한 존재니까.
한건우와 박이경이 무용을 펼치는 사이.
특수안보부 소속, <광휘의 성기사> 김도경이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의 무기는 얼핏 보기에 짧은 메이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건 무기가 아니었다.
진짜 무기의 손잡이일 뿐이었다.
[특성 발동 : 빛의 군주]
빛을 무기로 조종하는 김도경의 특성이었다.
스으으-.
메이스 위를 따라서, 백색의 빛이 칼날 형태를 이루며 자라났다.
광선의 칼날로 이루어진 장검이었다.
김도경은 빛의 파동과 입자를 가지고 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파앗-!
팟!
김도경이 육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이동했다.
빛이 점멸하는 것처럼 빠른 속도였다.
그가 절벽에 가까운 오르막을 오르는 데는 몇 초가 걸리지도 않았다.
전신 갑주를 입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김도경은 이동하면서 몸을 풀듯이 광선검을 휘둘렀다.
스응- 슥!
빛의 칼날이 굴러오던 바윗덩이를 깔끔하게 갈랐다.
김도경의 광선검은 보통의 무기와는 사뭇 달랐다.
다른 사물에 부딪쳐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레이저를 쏘는 것 같았다.
파앗!
김도경이 한 번 더 점멸하듯 가속하더니, 마침내 설인들이 있는 곳에 나타났다.
굶주림에 흉포해진 설인들이 새카맣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김도경의 털끝 하나도 스치지 못했다.
스윽! 스스스···.
광선검은 설인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나갔다.
빛의 칼날이 지나는 곳마다 설인의 팔다리가 분리되었다.
설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푹푹 쓰러졌다.
설인의 시체가 비탈 아래로 떨어져 쌓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성 길드의 마스터, 태일제.
그는 차은비 옆에서 여유롭게 눈을 감고 있었다.
또그륵, 또륵···.
태일제의 손바닥 위에서 맑은 쇳소리가 났다.
그는 호두만한 쇠구슬 네다섯 개를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인 관록 덕분일까?
태일제는 좀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설인들이 굴린 바윗덩이가 근처에 떨어지려 할 때였다.
[특성 발동 : 금속 조작]
핑! 피잉-!
태일제가 굴리던 쇠구슬들이 순식간에 총알처럼 발사되어 나갔다.
직선이 아니었다.
각자 반원을 그리면서 바위에서 만나는 궤도였다.
파바박!
쩌억···.
쇠구슬 여러 개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바윗돌의 중심을 통과했다.
바위는 허공에서 산산조각났다.
쇠구슬들이 다시 공중에 떠올랐다.
태일제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시선을 집중했다.
허공에서 몽글거리던 쇠구슬이 서로 뭉쳤다.
주먹만한 쇠공이 만들어졌다가, 다시 더 작은 탄환 모양으로 갈라졌다.
아이가 찰흙을 다루듯이, 태일제는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피이잉-!
작은 탄환이 다시 한 번 폭발하듯 날아갔다.
총에 넣고 발사한 듯 엄청난 속도였다.
목표는 산 위에 있는 설인들이었다.
정확히 그들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
겁에 질린 설인들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태일제의 탄환은 몸을 숙인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끝내 목표물을 죽일 때까지, 몇 번이고 궤적을 바꾸었다.
곡선이나 원, 그 어떤 자유로운 궤적도 가능했다.
피이이-!
슈욱! 피잉-!
탄환은 설인의 머리를 관통하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작은 유도 미사일처럼, 태일제의 탄환은 다른 희생자를 찾아 헤맸다.
태일제는 모든 탄환의 궤적을 머리로 계산하고 있었다.
‘저 모습은 언제 봐도 무섭다니까.’
차은비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요즘 잊고 지냈지만, 그녀의 원래 고용주는 이 사람이었다.
손바닥 위에서 굴리던 아무것도 아닌 쇠구슬.
고작 구슬 몇 개로 수십 마리의 설인을 쓰러뜨렸다.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은 채로.
정말이지 적으로는 두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역시 그 나이 먹고도 랭킹 1위를 놓치지 않는 이유가 있다니까.’
랭킹은 기본 전투력과 균열 공략 경험치 등 여러 가지를 산정해서 매년 말에 매겨진다.
태일제는 실전을 뛰지 않으니, 균열 공략 기록이 없었다.
순수한 전투력만으로 1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차은비의 눈이 모든 파티원들을 바삐 오갔다.
힐러는 전투의 모든 사각지대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파티원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알맞은 지원을 해줘야 하니까.
공격 보조가 필요하면 공격 보조를.
MP나 HP가 소모된 사람에게는 힐을···.
웬만한 상급 힐러나 버퍼 여럿이 모여야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아직까지 위험에 처한 사람은 없었다.
‘아니, 위험은커녕···. 너무 압도적이었어.’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들 다섯은 수백 마리의 설인들을 종이인형 쓰러뜨리듯 쓸고 있었다.
아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차은비의 주위에도 어느새 설인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녀가 직접 죽인 건 한 마리도 없었다.
사방에서 굴러떨어진 시체가 쌓인 것이었다.
그러나 안도하기엔 일렀다.
설인은 이 균열의 최하층일 뿐이었다.
진짜는 서리거인이었다.
그것도 균열을 공략하려면 서리거인의 왕을 죽여야 했다.
“서리거인 왕은 어디 있나!”
간만에 몸을 풀고 신난 박이경이 소리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산맥을 울려 메아리쳤다.
강한 각성자만이 내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김도경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균열 입구가 있는 분지를 떠났다.
산맥의 능선을 따라서 점점 더 고지대로 올라갔다.
아직 서리거인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김도경이 주위를 살피며 설명했다.
“서리거인은 사화산의 분화구 안에 둥지를 만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분화구라면 저기겠군요.”
한건우가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그러나 김도경은 납득하지 못했다.
“어째서...?”
모두 똑같이 만년설로 덮여있어, 봉우리의 형태를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산 아래를 보세요. 암석의 색이 다릅니다.”
거기만 용암이 흘러내려 굳은 것이다.
“....”
김도경이 미묘한 표정으로 눈썹을 까닥했다.
자기가 못 본 걸 한건우가 먼저 알아내서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한건우는 그걸 눈치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한건우가 분화구가 있는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이 균열의 규모는 유난히 컸다.
‘저 분화구에 서리거인의 둥지가 있다라···.’
저 분화구까지 가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갔는데 마침 비어 있다면 낭패다.
게다가 지능이 높은 인간형 마수에게 굳이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줄 필요는 없었다.
“제가 서리거인을 유인해서 오죠. 그게 빠를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한건우의 등에서 화염의 날개가 뻗어나갔다.
그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하늘로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