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89화 (89/238)

#89황혼의 서리거인 (1) - 멸망하는 이계

한건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잠깐만요.”

그저 나지막한 말 한 마디였다.

다들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추었다.

회의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건우의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태일제 이상의 존재감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정남준 대통령이 긴장을 숨기고 웃음을 띠며 물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정남준 대통령은 오히려 안심했다.

‘아마 보상을 요구하려는 것이겠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동원에 대한 보상은 합리적인 수준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다만, 이건 대통령님께 말씀드릴 내용은 아닙니다.”

“예? 그럼···.”

길드 마스터들의 뜨악한 시선이 한건우에게 꽂혔다.

국가를 움직이는 대통령과 직접 협상할 수 있는 자리였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통령님이 직접 작전에 출동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제 권한을 대신해서, 음···.”

정남준 대통령이 말을 흐렸다.

이제껏 말 한 번 더듬지 않고 매끄러운 언변을 보이던 그였다.

그가 무심코 시선을 옆쪽으로 돌렸다.

“작전에서 지휘권을 행사할 자를 여기 불러와 주십시오. 그 사람과 얘기하겠습니다.”

“그건···.”

“그 사람도 와 있을 겁니다. 아마 이 옆방에서 회의 내용을 듣고 있겠죠?”

한건우는 정남준 대통령이 곁눈으로 쳐다본 방향을 가리켰다.

그제야 정남준은 졌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원유선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당황했다.

‘이게 뭐야. 이런 말은 없었는데···. 태일제 영감은 알고 있었나?’

그녀는 얼른 태일제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태일제의 노회한 얼굴에서 아무 감정도 읽지 못했다.

‘작전 지휘할 사람? 그게 누구지.’

다른 길드 마스터들도 정신이 바짝 드는 기분이었다.

국가 작전이라면 누군가 명령권을 가질 것이다.

국군 장성급 각성자가 지휘를 맡으려니 싶었지만, 막상 한건우가 저렇게 나오니 불안해졌다.

뚜벅, 뚜벅.

한건우가 가리킨 옆방에서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스윽.

벽처럼 보이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어?”

“광휘의 성기사···.”

“언제 한국으로 돌아왔지?”

놀란 길드 마스터들이 자세를 고쳐앉았다.

현재 대한민국 각성자 전투력 랭킹 2위.

특수안보부(SSS) 소속 S급 각성자, 김도경이었다.

얼마 전 중국에서 돌아와서 특수안보부 서울지부장 자리에 앉은 그였다.

‘그러고 보니··· 한 자리에 이렇게 많은 S급이 모인 적이 있었던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김도경이 대통령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190cm를 훌쩍 넘는 거구로, 롱코트로 된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천명환이 난처한 얼굴로 따라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건우 플레이어. 김도경입니다.”

김도경이 한건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치 깊은 산에서 만난 호랑이처럼 압도적인 기운이 풍겼다.

한건우는 앉은 채로 김도경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김도경···. 이 사람은 이번에도 똑같은 위치군.’

만주 사태를 지휘하는 총 책임자.

예나 지금이나 특수안보부의 김도경이었다.

그를 이렇게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김도경은 원래의 한건우가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하는 높은 위치였다.

앞으로 승승장구해서 특수안보부의 수장까지 올라가게 된다.

한건우가 입을 열었다.

“우선 대통령님이 계시고, 유력한 길드의 대표들이 다 오셨죠. 그리고 군 통수권을 위임받은 김도경 플레이어까지.”

“...?”

“이 자리에 모든 대표자가 모여 있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건우가 회담을 주도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방금 저희 길드 마스터들은 모두 결의했습니다. 만주 작전에 정예 인력을 지원하기로요.”

“알고 있습니다.”

김도경은 듣고 있었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작전 회의에 길드 측 대표들도 들어가겠습니다.”

“...!”

길드 마스터들은 불안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까진 못 했는데.’

듣고 보니 필요한 조건 같았다.

작전회의에 못 들어간다면 불리한 전략을 강요당할 수도 있으니까.

“둘째, 사망자나 부상자에 대한 보상은 길드의 규칙대로 받겠습니다.”

“....”

분명히 사망자가 나올 수 있는 작전이다.

부상자는 어떻게든 치료할 수 있다 해도, 사망에는 보상이 필요했다.

‘길드의 규칙대로’라는 건, 군인 배상 수준이 아니라 민간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가 보장되지 않으면, 참전 의사를 철회할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렇죠?”

한건우가 원탁을 돌아보았다.

길드 마스터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미처 못 챙기고 넘어갈 뻔한 일이었다.

한건우가 가려운 곳을 긁듯이 짚어준 것이다.

김도경은 차가운 눈으로 한건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미 협상의 판도는 넘어가 있었다.

***

만주 땅에 원정을 온 각성자들은 100명이 넘었다.

길드와 군 소속 각성자를 다 포함한 숫자였다.

포털을 이용해서 국경까지 이동한 후, 군용 트럭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균열 입구가 훤히 보이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군인들이 막사를 치면서 잡담을 했다.

“들었냐? 우리나라에 S급이 13명인데, 그 중 9명이 지금 여기 와 있대.”

“여기서 S급이 다 죽으면, 우리나라 망하는 겁니까?”

“뭔··· 어차피 이거 못 막으면 망해.”

“아···.”

이 근방에는 S급 균열 5개, A급 균열 1개가 발생한 상태였다.

점점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정말 비현실적인 상황이군.’

군 소속 각성자 중에서는 그리 등급이 높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반쯤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가족에게 미리 인사를 하고 온 이들도 많았다.

“일단 오늘만 무사히 버티자, 오늘만.”

군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문 같은 희망사항을 외웠다.

독특한 물결 무늬의 구름이 하늘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때 두 개의 팀이 각각 S급 균열에 들어가 있었다.

[S급 균열 - 황혼의 서리거인]

-공략 조건 : 서리거인의 왕을 죽인다

-잔여 시간 : 11일 19시간 30분 4초

한건우가 들어간 첫 번째 팀.

무려 S급 5명으로만 구성된 쟁쟁한 팀이었다.

이런 조합으로 균열을 공략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전무후무하겠지.’

원래 군에서 구상한 작전은 거의 인해전술에 가까웠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들어가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한건우가 작전회의에서 강하게 이쪽을 밀어붙였다.

‘등급을 위주로, S급 각성자 9명을 두 팀으로 나누는 겁니다. 각 팀이 S급 균열 2개를 동시에 공략합니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뭘 합니까?’

‘상급 각성자들은 A급 균열을 공략하고, 그 외 인원은 보급품과 진지를 지킵니다.’

길드나 소속을 초월해서, 오직 등급을 위주로 팀을 재편하자는 소리였다.

낯선 개념이었다.

S급 각성자들은 가만히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그··· 그래도 괜찮을까요? 군부대 인원까지 충분히 들어가는 게 나을 듯합니다.’

‘공략 기간이 길다는 건 균열 내부 공간이 넓다는 얘깁니다. 게다가 동시에 여러 균열이 발생했으니, 공략 기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는 처지죠?”

‘...?’

‘파티원 수가 많아지면 분명히 뒤쳐지는 그룹이 생깁니다. 시간이 없으니 후발대를 지켜줄 수도 없고, 이동시간을 맞춰줄 수 없습니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선발대로만 파티를 구성하자는 소리군요···.’

한건우의 명령을 믿고 따르는 길드라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설득을 시켜야 했다.

그때 회의의 상석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김도경이 설핏 미소를 지었다.

‘한건우 플레이어, 저와 생각이 같으시군요.’

‘...?’

한건우는 미심쩍었다.

특수안보부에서 가져온 기존 작전을 뒤엎는 다른 의견을 냈는데, 생각이 같다니?

어쨌든 작전의 공식 책임자가 동의하니, 회의는 끝났다.

그리고 김도경은 자신을 한건우와 같은 파티에 배치했다.

한건우와 차은비, 태일제, 박이경, 그리고 김도경.

실력으로는 아무도 덤비지 못할 드림팀이었다.

“자네, S급 균열은 처음 아니오?”

“맞습니다.”

태일제가 한건우에게 물었다.

그는 미세한 금속편을 이어붙인 미늘 감옷을 입고 있었다.

골프복이나 정장을 입던 모습과는 달라보였다.

‘회귀 후로만 따지면 처음인 게 사실이니까.’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젊은이가 여기까지 오다니. 상당히 긴장되겠군 그래.”

태일제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경험이 일천한 젊은이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뛴다는 소리로 들렸다.

한건우는 피식 웃기만 했다.

“괜찮습니다. 성공할 거니까요.”

“형님 말이 맞습니다.”

박이경이 무조건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고개까지 과장되게 끄덕이고 있었다.

‘이 놈은··· 정말 왜 이러지?’

형님으로 모시겠다니 나쁠 건 없지만.

한건우는 박이경이 살짝 부담스러웠다.

박이경이 그답지 않게 굴자, 분위기가 영 이상해졌다.

“저기요 박이경 씨. 머리를 잘못 맞았어요?”

차은비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박이경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한건우의 길드에서 받은 순백색 망토와 부츠를 걸치고 있었다.

“흐하핫, 그렇지. 잘못 맞긴 했지.”

박이경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같았으면 차은비에게 저급한 희롱을 했을 텐데.

이번엔 별 말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저 인간 왜 저래, 정말. 뭐 잘못 먹었나봐.’

차은비가 질색을 하면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제 들어가시죠.”

김도경이 앞장섰다.

그는 성기사 클래스답게, 백금빛으로 빛나는 풀 플레이트 아머로 중무장했다.

무기는 단순한 형태의 메이스였다.

팀원을 배정한 건 김도경이었다.

한건우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싶었다.

‘특수안보부 소속 S급이 각 팀에 한 명씩 들어가 있잖아.’

대놓고 감시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슈우우우-.

이들은 김도경을 따라 한 명씩 균열 안으로 들어갔다.

S급 균열은 그 환경 자체가 지옥이다.

혹한이나 혹서는 물론이고, 중력의 세기가 다르기도 했다.

유독한 공기로 숨쉬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

상급 각성자의 강한 육체가 아니면 아예 버티기 어려웠다.

일반인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저승 구경을 할 수 있으리라.

위이이이잉-!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불어왔다.

S급 마수인 서리거인이 사는 곳이었다.

히말라야 산맥처럼 높은 봉우리가 이어졌다.

봉우리마다 흰 만년설이 지붕처럼 덮여 있었다.

“여기도··· 곧 멸망하는 거죠?”

“아마 이제 곧, 그렇게 되겠죠.”

한건우의 뒤를 쫓아오던 차은비가 물었다.

한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균열의 이름은 <황혼의 서리거인>.

‘황혼’이라는 명칭이 붙은 균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멸망의 문턱에 선 이계가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그 안에 있는 마수들은 남달리 사납고 흉포했다

굶주림과 공포 때문이었다.

한건우가 균열 입구를 돌아보았다.

엄청나게 큰 균열 입구는 몇 킬로 밖에서도 보일 것이다.

멸망하는 세계에 사는 마수들에게, 균열은 이세계로 탈출할 수 있는 희망으로 보이는 게 아닐까?

쿠웅- 쿠르르르-.

푸스스스···.

산봉우리에서 수십 개의 바윗덩이가 굴러왔다.

곳곳에 털투성이 머리가 보였다.

생김새는 사람과 비슷하지만, 2-3미터 정도의 몸집에 구부정하고 긴팔을 가진 마수.

서리거인의 부하, 설인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