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88화 (88/238)

#88만주 정벌 (2) - 대통령

회의장 안에 있던 길드 마스터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큰 길드의 수장들이었다.

상당수는 정치인과 관계도 맺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아직 8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전원이 도착한 것도 아니었다.

몇 자리는 비어있었다.

“이거, 바쁘신 와중에 급히 불러서 죄송합니다.”

정남준 대통령이 소탈하게 웃었다.

그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고, 얼굴도 호감형이었다.

대통령은 으리으리한 의장석을 그냥 지나쳤다.

다른 참석자와 똑같이 원탁의 의자를 직접 빼서 앉았다.

“여기 들어오기가 좀 번거로우셨죠? 우리 경호실 직원들에게 항상 쉽게 가자고 해보는데, 제 말을 안 들어줍니다.”

“아닙니다, 하하···.”

대부분의 길드 마스터들은 정남준 대통령을 만나는 게 처음이었다.

국가 통수권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오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환인 길드의 마스터 원유선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정남준··· 어떨 때는 태일제 영감보다 더 교활해 보인다니까.’

그녀는 정남준 대통령이 야당 국회의원이던 시절에 접촉을 시도했었다.

정치인과 대형 길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아닌가.

그러나 정남준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원유선의 접촉을 별로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녀와는 영 코드가 안 맞았다.

‘이 자가 대통령까지 될 줄은 몰랐지만··· 뭐 어때.’

정남준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별로 기반이 없는 젊은 대통령이었다.

원유선은 그렇게 아쉬움을 달랬다.

8시가 되기 2분 전.

추가로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대통령 각하.”

나이 든 길드 마스터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는 고풍스러운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전투복이나 평상복 차림인 다른 길드 마스터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일성 길드의 태일제!’

‘역시 왔구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각성자 중 하나인 S급 태일제.

태일제의 특성은 <금속 조종>.

금속성의 물질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합치고, 형태까지도 바꿀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는 1세대 각성자로서 지금은 60대의 나이였다.

각성자라고 해도 노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희끗희끗해진 머리, 잔주름이 지는 이마.

더는 올라가지 않고 미세하게 깎여가는 스탯.

그러나 각성 전에 철강 그룹의 임원이었던 태일제였다.

전투만큼이나 사업체 운영에도 자신 있었다.

그는 이제 현장에서 물러나서 길드의 지휘와 운영을 맡고 있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은퇴한 것은 아니지만, 직접 균열에 들어간 지는 한참 되었다.

태일제가 자리에 앉자, 이제 빈 자리는 두 개였다.

눈치 빠른 길드 마스터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벌써 짓궂은 웃음을 띠는 이도 있었다.

‘이 자리··· 박이경과 한건우 자리군.’

‘박이경 그 놈 얼굴이 볼 만하겠어.’

‘부끄러워서 꽁무니 뺀 건 아닐까?’

박이경이 한건우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비 오늘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는 소식이 파다했다.

혼수상태까지 갔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는 얘기가 즐겁게 회자되었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도중에 조금 과장되기도 했다.

급기야 박이경이 머리를 잘못 맞아서 바보가 되었다거나, 기억이 왔다갔다 한다는 얘기까지 돌 정도였다.

이들은 한 명 한 명이 군벌이나 다름없는 세력의 대표들이었다.

이럴 때는 호기심 많은 아이 같기도 했다.

홀로 무표정한 태일제가 명품 손목시계를 흘긋 보았다.

시계가 8시 정각을 가리켰다.

덜컥!

회의장 문이 열렸다.

모두의 관심 어린 시선이 열린 문으로 향했다.

“어?”

누군가가 육성으로 놀라는 소리를 냈다.

한건우와 박이경이 동시에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박이경은 한건우 옆에 떡하니 붙어서 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밀한 사이인 줄 알 정도였다.

‘뭐지··· 그 싸움이 분명 헛소문은 아닌데?’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다.

그들의 놀라움은 그 다음 말을 듣고 더욱 심해졌다.

“형님, 들어가시죠!”

태일제와 원유선마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그 박이경이···?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박이경이 존댓말을?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한건우에게?’

태일제와 원유선에게도 반말을 찍찍 하는 박이경이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던 이들은, 이번엔 눈알이 빠지도록 놀랐다.

박이경이 깍듯한 태도로 한건우의 의자를 당겨서 빼 준 것이다.

마치 조폭 부하가 두목을 모시는 것 같은 태도였다.

‘말도 안 돼··· 바보가 되었다는 설이 진짜였나?’

사람들이 숨을 삼키며 경악했다.

한건우도 내심 의아했다.

‘박이경 이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인거지?’

조금 전 회의실 입구에서 박이경을 마주쳤을 때만 해도, 그가 이렇게까지 백팔십 도 변했을 줄은 몰랐다.

씩씩거리며 기분나쁜 티를 내거나, 눈을 깔고 회피하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 친한 척을 하는 것이었다.

나이도 어린 한건우를 형님으로 모시겠다며 쓸개 빠진 놈처럼 굴었다.

한건우는 판단을 보류하고, 회의장을 죽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정남준 대통령에게 꽂혔다.

정남준도 마침 한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정남준 대통령이군.’

정남준 대통령은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었다.

한건우가 알기로, 대한민국의 마지막 일반인 대통령이 바로 정남준이었다.

이후의 대통령은 모두 각성자 사관학교 출신들이 차지했으니까.

정남준의 얼굴은 한건우가 기억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회귀 전의 정남준은 지금으로부터 얼마 후에 의문의 사고로 죽었기 때문이다.

한건우는 정남준 대통령을 잘 몰랐다.

별 대단한 업적도, 추문도 없던 대통령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정남준 대통령은 백지 상태에서 보는 거나 다름없었다.

‘흠··· 꽤 배짱이 두둑한데?’

길드 마스터들은 걸어다니는 살인병기나 다름없었다.

민간인들은 각성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볼 기회가 별로 없으니, S급이 얼마나 강한지 잘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남준 대통령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상급 각성자들이 모인 곳에 혼자서 맨몸으로 가까이 다가온 용기가 가상했다.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 각성자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겠지만.

“이제 모두 모이신 것 같군요.”

정남준이 입을 열었다.

“현재 상황을 진솔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준 전시상황입니다. 오늘 보고를 받았습니다.”

“!”

한건우는 재빨리 회의석상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태일제는 표정을 숨긴 포커 페이스.

원유선은 놀란 척하지만 하나도 안 놀란 게 티가 났다.

나머지 길드 마스터들은 상황 파악이 안 된 눈치였다.

“만주에 S급 균열이 동시에 4개 발생했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닐 거라고 합니다. 중공군 부대가 출동했지만, 중국 정부는 만주 땅을 아예 포기하는 방향도 검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정남준 대통령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언변은 능숙하고 매끄러웠다.

“그러면 대한민국 영토도 안전하지 못할 거고요. 그래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군대가 출동하면 되지 않나요?”

한 길드 마스터가 볼멘소리를 했다.

비상 상황이라고 해도 민간 길드의 각성자를 동원한다는 게 반가울 리 없었다.

“군대는 당연히 투입합니다만, 그걸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도.”

“천천히 의견을 조율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고자 합니다.”

“....”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반면, 한건우는 흥미가 생겼다.

원래는 대통령이 이런 회의를 주관하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내용을 밝히지도 않았다.

3년이라는 시간 차이 때문에, 그때의 대통령과 지금의 대통령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정부도 조금 다를 수도 있겠군.’

정치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달라졌으니 모든 게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태일제가 침묵을 깼다.

“대통령 각하. 도움이 필요하다 하셨죠.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정남준 대통령은 숨기는 것 없이 대답했다.

“징집입니다.”

“징집···?”

“여러분 길드에서 가장 강한 최정예 인원이 필요합니다. 특히 S급 각성자는 반드시 참여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정부 소속의 S급 각성자도 모두 출동할 예정입니다.”

길드 마스터들이 술렁였다.

“대통령 나리. 우리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

박이경의 거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바보가 된 게 아니었잖아?’

잠시 박이경을 오해했던 길드 마스터들은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알던 박이경의 모습 그대로였다.

대통령과 길드 마스터들 앞에서 저런 거리낌 없는 태도라니.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죄송합니다만, 이번 소환에 응하지 않은 길드는 허가를 취소하고 각종 관리권, 채굴권 등 권리를 몰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라고?”

정남준 대통령이 딱 잘라 말했다.

박이경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박이경은 2m나 되는 거구였고, 육안으로 보이는 근육량도 어마어마했다.

그런 박이경 앞에서도 정남준 대통령은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그런···.”

“허가 취소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다른 길드 마스터들도 불평을 내뱉었다.

“크흠.”

그때 태일제가 헛기침을 했다.

그가 입장을 밝히려 하자, 다른 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길드 허가 취소 같은 조건을 거실 필요도 없습니다. 국민을 위한 일이니 저희 일성 길드는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

누가 봐도 미리 언질을 듣고 준비한 느낌이었다.

“저도 오랜만에 전장의 공기를 마시겠군요.”

“...!”

태일제가 직접 소환에 응한다고 밝히자, 다른 길드 마스터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일성에서 찬성할 줄은 알았지만··· 태일제가 직접 나간다고?’

정부가 하는 일에는 항상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일성 길드였다.

그 정도는 모두 감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태일제가 직접 나선다는 건 충격이었다.

“우리 아레스 길드는-.”

그 다음에 손을 번쩍 든 것은 한건우였다.

“예, 한건우 플레이어.”

정남준 대통령이 긴장한 기색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이 자는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

정남준 대통령은 한건우에 대해서 제법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청와대 비서실은 S급 각성자나 주요 각성자의 근황을 조사해서 보고하곤 했으니까.

그 중에서 정남준 대통령이 가장 관심을 가진 인물이 바로 한건우였다.

“-만주 작전에 저를 포함해서, 최정예 5명이 출동하겠습니다.”

“예?”

오히려 정남준 대통령 쪽에서 더 놀랐다.

상위 등급 한두 명이라도 지원해 주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아레스 길드의 최정예 파티라면···.

‘아레스의 초기 멤버들 말하는 거지?’

다른 길드 마스터들이 웅성거렸다.

“한건우 플레이어, 감사합니다.”

정남준 대통령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다른 길드 마스터들도 눈치를 보았다.

“저희 홍염에서도 A급 1명 포함 3명이···.”

“우리 기사단 길드에서는 저를 비롯해서 2명···.”

울며 겨자 먹기로 하나씩 입을 여는 분위기였다.

어느 정도 정리되는 분위기.

사람들의 시선이 박이경에게 몰렸다.

오직 박이경만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이경이 안 갈 리 없는데?’

박이경은 원래도 만주 사태에서 크게 활약했다.

특히 서리거인과 싸우려면 그가 필요했다.

한건우가 박이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박이경. 같이 갈 거지?”

박이경은 한건우의 권유를 듣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알파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저와 제 파티 여섯 명을 데려가겠습니다.

“허억?”

지켜보던 이들이 입을 떡 벌렸다.

“....”

정남준 대통령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한건우를 다시 보았다.

‘S급이라는 위명에 오히려 본 모습이 가려진 인물.’

그건 한건우라는 사람에 대해 정남준 대통령이 내린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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